대흥향교와 교촌마을, 예당호반을 감싸는 소나무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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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흥향교와 교촌마을, 예당호반을 감싸는 소나무 숲
  • 취재=한기원 기자 사진·자료=한지윤 기자·신우택 인턴기자
  • 승인 2019.05.23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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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세먼지시대 공동체의 삶과 생명의 공간이다
예산 대흥 교촌마을 소나무 숲
예산군 대흥면 대흥향교 뒷산의 교촌마을 소나무 숲 전경.

숲, 나무 잘 심고 관리하면 결국 사람에게 유익하게 다가와
느티나무·은행나무 품고 상생(相生)하고 있는 대흥향교 마을
예당호반 물 버들, 무리지어 호수 위에 숲을 만든 모습 장관
대흥향교와 마을, 예당호반을 품고 있는 아름드리 소나무 숲


예로부터 마을 숲은 마을 공동의 쉼터였고, 굿을 하거나 마을 제사를 올리는 장소였으며, 지신밟기와 씨름 같은 전통놀이의 장소이기도 했다. 우리 고유의 생활과 문화와 역사가 온전히 녹아 있는 생태자원인 셈이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와 6·25한국전쟁, 근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상당수의 마을 숲이 훼손됐다. 가치 있는 수목들이 고사하고 후계목이 사라지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인류는 숲에 많은 것을 의존하며 문명을 만들어왔다. 인류는 숲을 보존하려는 노력도 기울였지만, 여러 이유로 숲을 파괴하기도 했다. 이렇듯 숲의 변화는 사람들의 삶에도 큰 영향을 끼쳐왔다. 농경이 시작되기 전 인류는 숲 속에서 사냥과 채집 등으로 삶을 영위해왔다. 하지만 농사를 시작하게 되면서, 인류는 숲을 농경지로 바꾸며 서서히 파괴하기 시작했다. 숲이 농경지로 바뀌어갔지만, 농업사회에서 숲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졌다. 숲이 훼손되면 목재와 땔감이 부족해지는 것은 물론, 물의 정상적인 순환을 어렵게 하여 홍수, 가뭄, 강의 범람 등으로 인해 농업생산에 타격을 주는 자연재해가 일어난다. 따라서 안정된 삶을 누리기 위해서는 숲을 보호해야만 한다.

마을 숲은 마을사람들의 생활에 직접적인 관련을 가지고 마을주민들과 정서적인 교감이 이루어 졌다. 또 마을사람들에 의해 인위적으로 조성되거나 자연적으로 형성돼 보호 또는 유지돼 온 것이 결국은 마을 숲이다. 마을 숲 자체가 정서적인 안정이라는 심리적 효과뿐만 아니라 생물의 다양성 유지는 물론 방풍과 홍수방지 등의 공익적 효과를 주는 등 아주 많은 생태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숲은 목재 공급처일 뿐만 아니라 휴양 및 교육공간이자 삶의 터전이다. 하지만 경제가치로서의 숲에 대한 투자가 부진을 면치 못함으로써 숲을 노는 땅으로 보고 투기와 개발의 대상으로 전환시킬 가능성 역시 현실의 문제로 다가서고 있다. 국내산림 산업재의 수익성이 저하하고 있으며, 임업의 성장동력 역시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숲의 경제적 가치를 여러 측면에서 조명해야 하는 이유다. 숲이라는 나무를 잘 심고 관리하면 결국 희망으로 사람에게 유익하게 다가오기 마련이다.

■ 시간에 순응하고 자연에 몸을 맡기는 곳
이러한 마을 숲이 잘 보존돼 있는 곳이 있다. 슬로시티로 이름 난 충남 예산의 대흥 교촌마을이 그렇다. 교촌마을에는 1405년 건립 이후 충남문화재로 지정된 600여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대흥향교가 있다. 대흥향교는 1405년(태종 5)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창건됐다고 한다. 그 이후의 역사는 전해지지 않으며,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성전(大成殿)·명륜당·동무(東廡)·서무(西廡)·삼문 등이 있다. 대성전에는 5성(五聖), 10철(十哲), 송조6현(宋朝六賢)의 위패가, 동무·서무에는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돼 있다. 조선시대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 1인이 정원 30인의 교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이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奉行)하며 초하루·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다. 이 향교의 대성전은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72호로 지정돼 있으며, 전교 1명과 장의(掌議) 수명이 운영을 담당하고 있다.

이 마을의 뒤편에는 봉수산(鳳首山, 534m) 자락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고, 봉수산 아래로는 우리나라 최대의 농경저수지인 예당호반이 반짝인다. 예산과 홍성, 인근의 서산, 당진 등 내포평야에 물을 공급한다고 해서 예당이다. 일제강점기인 1929년에 착공해 1963년에 완공한 저수지다. 면적이 여의도공원의 네 배로, 둘레만도 40km에 이를 만큼 마라톤 코스와도 맞먹는다. 만만찮은 규모에 넋을 잃을 수밖에 없다.

봉수산과 예반호반 사이 마을의 들목에는 느티나무를 품고 상생(相生)하고 있는 대흥향교가 자리하고 있다. 그 앞을 지키고 있는 700여년 세월을 넘긴 은행나무(충남 기념물 160호)가 길목을 품고 오가는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다. 높이가 약 20m 둘레가 6m나 된다고 한다. 향교를 지키고 있는 느티나무는 은행나무에 뿌리를 맞대고 자라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두 나무를 가리켜 ‘사랑 나무’라고 부른다고 전한다. 이곳 대흥마을에서는 해마다 정초에 행장 군제를 지낸다고 한다. 먼저 향교에 제를 올리고 난 이후에 은행나무로 옮겨와 향장 군제를 지낸다는 것이다. 법사를 초청할 만큼 정성을 들여 마을의 축복과 안녕을 기원한다는 설명이다.

이곳 마을은 이성만·이순 형제의 ‘의좋은 형제’ 이야기로 너무나 유명한 곳이다. 서로의 살림살이를 걱정해 밤새 형님은 아우 집으로, 아우는 형님 집으로 낟갈이 옮겨놓기를 반복했다던 의좋은 형제다. 어느 보름밤, 낟갈이를 등에 지고가다 길 위에서 우연히 만난 두 사람의 마음은 얼마나 뿌듯했을까. 제 곳간을 비우므로 가득 채워진 마음의 풍요는 또 어땠을까. 조선 세종 때 대흥마을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마을 곳곳에 서린 의좋은 형제의 형상은, 살아 있어 아름다운 이야기가 믿기 힘들어 놀라운 세상에 던지는 온기다. 그 미담을 안고 거닐면 마을을 이룬 낱낱의 풍경이 예사롭지 않게 보이는 이유다. 예당호반의 물 버들은 다시 무리를 지어 호수 위에 숲을 만든 모습이 장관이다. 어느 아침에는 그 위로 옅은 물안개가 피어날 것이고, 또 해가 뜨고 질 때는 붉은빛으로 물들 것이다. 미끼도 없는 빈 마음을 늘어놓고 느릿한 시간의 입질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평화롭다. 이렇게 평화롭고 한가롭게 느리기만 한 대흥마을은 사람들과 함께 시간에 순응하고 자연에 몸을 맡기며 모두를 아우른다.

최근엔 예산군이 조성한 ‘예당호 출렁다리’가 새로운 관광명소로 급부상했다. 개통 한 달도 안돼 50만 명을 돌파했고, 평일평균 1만7000여명과 주말평균 2만8000여명이 방문해 주변지역 상권까지 특수를 누리고 있다며 행복한 아우성이다. 하지만 이면에는 교통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극심한 도로정체가 빚어지는 등 의도치 않은 부작용에 직면했다. 더욱이 요즘과 같은 농번기의 경우 방문객들이 몰리는 주말 등에는 농기계를 운행하기 어려울 정도여서, 농사에도 지장을 초래한다는 불만이 터지고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을 대흥향교 뒷산에서 향교와 마을, 예당호반을 품고 있는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감싸 안는다. 우거져 청량한 솔바람이 향교와 마을, 마을과 예당호를 감싸 안고 있는 모습이 평화롭다. 기대치 않은 발견이다. 아름드리 소나무들을 품은 이 마을 사람들의 삶의 풍경이다. 그래서인지 대흥의 교촌마을은 사람도 나무를 닮았다. 새로운 길을 열며, 유유히 내딛는 걸음이다.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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