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미읍성 3ha 소나무·대나무 숲 위용, 무기 자급자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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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미읍성 3ha 소나무·대나무 숲 위용, 무기 자급자족
  • 취재=한기원 기자 사진·자료=한지윤 기자·신우택 인
  • 승인 2019.06.01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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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세먼지시대 공동체의 삶과 생명의 공간이다<5>

서산시 해미읍성 소나무·대나무 숲

해미읍성 외벽 성돌에 고을이름 새겨 책임지는 ‘공사실명제’ 실시해
‘호서좌영(湖西左營)’ 현판 앞 수령 400여년 느티나무 한 그루 있어
소나무·대나무 숲, 전시에 대비 무기 성안에서 자급자족했다는 의미
청허정 울창한 소나무 숲, 충남의 아름다운 100대 소나무 숲 지정돼


서산의 해미읍성은 조선 태종 17년(1417) 때 왜구를 막기 위해 쌓기 시작해 세종 3년(1421)에 완성됐다. 바다가 아름답다는 의미의 해미(海美)라는 지명은 조선시대부터 사용됐다. 태종 7년(1407)에 오늘날 당진 서부지역인 여미현(餘美縣)과 해미지역의 옛 명칭인 정해현(貞海縣)이 합치면서 여미와 정해에서 한 글자씩 따서 해미라고 이름 짓고 태종 13년(1413)에 해미현 관아를 뒀다. 태종이 1416년 서산 도비산에서 강무(왕이 참석한 군사훈련 겸 수렵대회)를 하다가 해미에서 하루를 머물면서 주변지역을 둘러보게 됐는데, 당시 해안지방에 출몰하는 왜구를 효과적으로 방어하기에 적당한 장소라고 판단해 덕산에 있던 충청병영을 해미로 옮겼다. 읍성이 완성된 후 충청병마도절제사가 부임했고, 홍성·예산·온양·당진 등 인근 12개 군영을 관할했다고 한다. 소속된 군병은 4000여 명이었고, 효종 2년(1651)에 청주로 충청병마절도사영이 옮겨가기 전까지 230여 년간 서해안 방어의 요충지 역할을 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도 선조 2년(1579) 훈련원 교관으로 부임해 열 달 정도 근무하기도 했다.

■ 조선 500년 역사를 간직한 해미읍성
해미읍성은 사적 제116호로 전남 순천의 낙안읍성, 전북 고창의 고창읍성과 더불어 조선시대 3대 읍성으로 꼽힌다. 성벽의 높이는 약 5m, 둘레는 1.8㎞로 남북으로 긴 타원형이다. 성벽 외부는 잘 다듬은 성 돌을 쌓아올리고, 그 안쪽은 작은 돌과 흙으로 채워 넣는 내탁식(內托式) 성벽을 갖춘 평지성이다. 크고 작게 쌓인 돌들은 해미읍성이 지나온 역사를 머금고 있다. 성 외벽의 성 돌을 자세히 살펴보면 공주, 청주, 임천, 서천, 부여 등 희미하게 고을명이 새겨져 있다. 축성 당시 고을별로 일정 구간의 성벽을 나누어 쌓게 함으로써 성벽이 무너질 경우 그 구간의 고을이 책임지도록 한 일종의 ‘공사 실명제’를 실시한 것이 눈에 띤다. 또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읍성 전체를 감싸는 해자(垓子)를 설치했다. 현재 동문과 암문 사이의 일부 해자가 복원돼 있고, 진남문 해자 구간 시굴조사가 마무리됐다.

서산시에 따르면 정밀 발굴조사 결과에 따라 해자 복원계획을 세우고, 문화재청의 발굴·현상변경 허가 등 행정절차를 거친 뒤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해자 복원을 추진할 방침이라고 한다. 해미읍성을 ‘탱자성’이라고도 부르는데, 기록에 의하면 성벽과 해자까지는 5m 내외의 공간이 있다. 적의 진입을 지연시키기 위한 방책으로 이곳에 가시가 많은 탱자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해미읍성에는 세 개의 성문과 한 개의 암문이 있는데, 이 가운데 남쪽으로 통하는 진남문(鎭南門)만 원래 모습이고 동문과 서문은 1974년에 복원됐다.

해미읍성 정문인 진남문은 우리나라 성곽의 남문에 주로 붙이던 이름으로 ‘임금이 계신 북쪽을 공격하려는 기운을 억누른다’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다. 성 안쪽에서 보면 문루 아래를 가로지른 받침돌 중앙에 ‘황명홍치사년신해조(皇明弘治四年辛亥造)’라는 붉은 글씨가 새겨져 있다. ‘황명홍치’는 명나라 효종의 연호인 ‘홍치’를 의미하는데, 성종 22년(1491)에 진남문이 중수됐음을 추정할 수 있다. 한편 동헌으로 가는 길 중간에는 둥근 담장을 두른 옥사(감옥)와 300여년 수령의 회화나무(충청남도 기념물 제172호)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곳에는 천주교 신자의 아픔이 새겨져 있다. 1790년대 정조 때부터 시작된 천주교박해는 병인양요(1866)와 1868년 오페르트 도굴사건(독일인 오페르트가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묘를 도굴한 사건) 이후 더욱 극심해졌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천주교 신자 1000여 명이 고문을 받았고 이곳에서 처형당했다. 특히 옥사에 수감된 천주교 신자들을 끌어내 나뭇가지에 철사로 머리채를 매달아 고문했다고 전해진다. 마을 사람들은 이곳에서 희생된 순교자들을 등불(호야)에 빗대 이 나무를 ‘호야나무’라고 부른다. 옥사에는 내포지역에서 끌려온 신자들이 항상 가득했고, 나뭇가지에는 사람을 매단 철사 자국이 아직까지도 남아 있었으나 태풍으로 소실됐다는 것이 문화관광해설사의 설명이다.
 

해미읍성 청허정 근처의 소나무 숲과 대나무 숲

■ 울창한 소나무 숲, 해미읍성의 볼거리
동헌의 정문 누각에는 ‘호서좌영(湖西左營)’이란 현판이 붙어 있고, 그 앞에는 수령이 400여년 된 느티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동헌은 행정과 송사 등 지방관아의 정무가 행해지던 중심 건물로 외동헌과 내동헌은 담으로 구분했다. 외동헌은 사무처로 흔히 이를 동헌이라 불렀으며, 내동헌은 수령이 기거하던 살림집으로 내아라고도 불렀다. 내아는 민가와는 다른 건축양식을 보여준다. 객사는 고을을 찾아오는 관리나 사신의 숙소로 요즘의 영빈관과 같은 곳이다. 특히 조례에 참석하지 못하는 지방관리들은 임금을 상징하는 ‘전’(殿)자와 궁궐을 상징하는‘궐’(闕)자가 새겨진 전패(殿牌)를 객사에 모셔 두고,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임금이 있는 대궐을 향해 절을 올리는 망궐례(望闕禮)를 올렸다고 전한다.

특히 읍성 뒤편 높다란 언덕에 오르면 ‘청허정(淸虛亭)’과 소나무와 대나무 숲 군락이 눈에 들어온다. 누정에 오르면 탁 트인 시야가 일품인 청허정은 성종 22년 충청병마절도사로 부임한 조숙기가 지은 것으로 ‘맑고 욕심 없이 다스리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이곳 주변의 소나무는 마차나 무기로 제작하는데 사용됐다. 또 소나무 송진은 화약을 만드는 원료로, 대나무는 죽창으로 쓰이는 등 전시에 대비해 무기를 성안에서 자급자족했다는 의미다.
 

해미읍성 성벽에 새겨진 각자, ‘충주(忠州)’란 글자가 보인다.

해미읍성의 축성 배경과 숲이 만들어진 역사적 이유까지 더해진다면 서해안 최고의 볼거리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조선시대 군사적 요충지였던 해미읍성은 성 자체적으로 전투에 사용하는 무기와 말과 마차, 장비 등을 조달하던 보급창의 역할을 했다는 것은 많은 역사학자들도 주장하고 있는 대목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 안에서 자랐던 여러 종류의 나무들은 마차와 무기로 제작됐고 송진은 화약을 만드는 재료로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과거 기록에는 해미읍성은 소나무와 함께 대나무 역시 숲을 이룰 정도라는 기록이 있다. 곧게 자란 대나무를 잘라 활과 화살을 만들고 여러 가지 무기를 만들 때 보조 재료로 사용하는 등 전시에 대비해 많은 무기를 성안에서 자급자족했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해미읍성 가운데 높다란 언덕에 오르면 청허정으로 불리는 정자가 눈에 들어온다. 이곳은 태안 앞바다는 물론 날씨에 따라 안면도를 넘어 서해가 보일 정도로 탁 트인 시야를 자랑한다. 청허정 뒤편의 울창한 소나무 숲은 지난 2015년도에 ‘한국관광 100선’으로 선정된 해미읍성과 함께 충남의 아름다운 100대 소나무 숲으로 지정(충남 32)됐다. 해미읍성 소나무 숲은 3ha의 면적에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2010년 9월 태풍 곤파스로 인한 전국의 소나무 숲 피해가 말할 수 없었으나 이곳의 소나무 숲은 위기를 모면한 채 건재함을 자랑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계절에 관계없이 푸름을 간직하는 소나무 숲과 대나무 숲 사이로 만들어진 산책로는 해미읍성만이 가진 특별한 볼거리라고 할 수 있다. 해미읍성은 조선 500년 역사를 간직한 문화유산이자 천주교 박해의 성지이며 조선시대의 생활상을 체험할 수 있는 나들이 코스로 꼽힌다.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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