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구 막던 자연석 성곽인 고창읍성 45년째 복원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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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구 막던 자연석 성곽인 고창읍성 45년째 복원 중
  • 취재·글=한관우/사진·자료=김경미 기자
  • 승인 2019.07.23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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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콘텐츠가 미래의 답이다<6>
고창읍성은 성곽의 원형이 잘 보존돼 있는 국방문화재로 후세들의 산교육장으로 복원, 옛 모습을 되찾았다.

객사·연지 등 읍성복원, 영산강유역까지 관할했던 옛 모습 되찾아
호남내륙 방위 전초기지로 둘레 1680m, 높이 4m, 총면적 5172평
국방문화재로 정화·보존 후세들 산교육장으로 활용 위해 복원사업
고창읍성, 아낙네들 힘만으로 축조 사연 답성도 부녀자들 전유민속


전북 고창은 풍수지리학상, 오행에 적합한 형태를 취하고 있는 드문 지역으로 동쪽과 남쪽이 높은 반면 서북쪽이 낮게 형성돼 있다. 따라서 통풍과 햇빛이 골고루 퍼져 농작물 재배는 물론 인간의 두뇌 형성에도 아주 좋은 인맥의 고장이자 예향으로 널리 알려진 고을이기도 하다.

고창의 산야는 전라북도의 다른 시군에 비해 낮은 야산으로 형성돼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고창은 군 단위로는 우리나라 최대의 고인돌 밀집 지역으로 꼽히는 곳이다.
이곳에 있는 고창읍성은 1453년(단종 원년)에 왜적을 막으려고 쌓았는데 둘레는 1.7km, 높이는 4~6m, 면적은 5만여 평이며 동·서·북문과 3개소의 옹성(甕城), 6개의 치성(雉城) 및 성 밖의 해자(垓子) 등이 있다. 읍성에는 동헌, 객사 등 22동의 관아건물 등이 있었으나 전란 때 모두 불타고 성곽과 공북루만 남아 있었는데, 지난 1965년 복원을 시작해 현재대로 복원했으며, 지금도 45년째 마무리 복원 중에 있다.

■ 국방문화재 보존 후세들 산교육장 활용
국내에서 유일하게 성곽의 원형이 보존돼 있는 사적 제145호로 지정된 고창읍성은 객사와 연지를 복원, 영산강유역까지 관할했던 옛 모습을 되찾은 것이다. 모양성이라고도 불리는 고창읍성은 조선조 단종 원년(1453년)에 전라좌우도 주민들이 고려 말부터 법성포 일대에서 노략질을 일삼던 왜구를 막기 위해 반등산(743m)을 바라보며 남쪽으로 뻗어 내린 산상에 완만한 계곡 사이를 두른 원형으로 축성됐다는 점도 특징적이다. 이렇듯 고창읍성은 야산을 이용해 바깥쪽만 성을 쌓는 축성 기법으로 성문 앞에는 옹성을 둘러쌓아 적으로부터 성문을 보호하고, 성을 돌면서 재앙이나 질병이 없게 빌면서 성을 밟는 답성(踏城) 놀이 행사도 진행되고 있다. 고창읍성 안에 있는 척화비는 병인년에 비문을 만들고 신미년(1871)에 세워졌다고 전해지는데, 대원군의 쇄국정책의 상징으로 비문에는 “서양의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는 것은 곧 화친을 하자는 것이요, 화친을 하자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임을 온 백성에게 경계한다”는 뜻이 적혀 있다.

고려말기 축성양식을 딴 조선조 초기의 대표적 평산성인 고창읍성은 나주진관 입암산성과 연계, 호남내륙을 방위하는 전초기지로 둘레 1680m, 높이 4m, 총면적 5172평에 이른다고 한다. 지난 1965년 6월 7일 고창읍성이 사적으로 지정되고 1974년에 민간기구인 ‘고창읍성 복원추진위원회’가 발족되면서 전북도와 당시 문화공보부에 건의 복원계획이 세워지기에 이르렀다. 고창읍성은 민간기구가 설치되면서 756만 5000원을 투입, 공북루를 해체 복원하고 길이 1625m, 폭 5m의 성외도로를 개설, 사방식수를 실시했다. 1975년에는 2827만7000원을 들여 성곽 430m를 보수하고 단청·조경사업을 실시했다. 복원 3차 연도인 1976년에는 5700만원을 들여 서문복원과 성곽보수, 고창여중·고 이전을 위한 부지만 사놓은 상태에서 사업비가 뒷받침되지 않으면서 사업이 일시적으로 중단됐었다.

문화재관리국이 국방문화재로 정화·보존해 후세들의 산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복원사업을 직접 실시한 고창읍성 복원사업은 지난 1989년까지 22억 300만 원을 들여 고창여중·고의 이전을 끝냈고, 동헌(39평)과 내아(23평) 풍화누(13평)를 복원했다. 1990년 6억 원을 들여 객사(73평)와 연지를 복원하고 경내와 주변 정비를 끝냈다. 1991년에는 4억 600만 원을 들여 객사행랑(53평)과 작청(24평)을 복원해 300여 년 동안 폐허로 남아있던 고창읍성은 옛 모습을 되찾게 됐다.
 


■ 전국에서 몰려오는 아낙네들 답성 행렬
산성은 성과 연결이 잘 되는 곳에 축성하게 되는데, 고창읍성에서 제일 가까운 곳에 입암산성이 있으며, 입암산성은 나주진관과 더불어 호남내륙을 방어하는 요충지였다. 호남내륙에서 한양에 갈 때는 노령산맥인 갈재를 넘어야 했는데, 갈재는 험준하고 봉변을 주는 곳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곳을 지키고 영광, 고창, 장성 등 부근 지역의 농산물과 해산물을 법성포를 통해 반출하는 것을 막는 역할을 입암산성이 담당했다.

서해안을 노략질하는 왜구도 입암산성에서 막아야 하는데, 입암산성과 법성포와 고창, 영광지역은 너무 멀어 입암산성의 힘이 크게 미치지 못해 서해안 일대를 지키는 전초기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것이다. 고창읍성은 이런 이유로 축성됐고 호남내륙을 왜구의 노략질로 부터 지켜왔던 것이다. 고창읍성의 축성에 사용된 석재는 거의 자연석이지만 초석, 대리석, 당간지주 등 어느 절에서 나온듯한 석재들을 깨뜨려 쓴 것도 가끔 끼여 있다. 특히 북문인 공북루의 주춧돌 높이는 제각각이라서 1m쯤 되는 것이 있는가 하면 아예 땅에 깔려 기둥이 바닥까지 내려온 것도 있어서 이채롭다.

이렇듯 조선시대의 읍성들은 평야지대에 양면을 돌로 쌓아 만들고 성문위에는 누각을 지어 적을 감시하고 전투를 지휘했으며 성내에서는 관민이 함께 생활했다. 그런데 고창읍성만은 나즈막한 야산을 이용해 바깥쪽만 성을 쌓는 내탁법 축성 기법을 사용했다. 성문 앞에는 옹성을 둘러쌓아 적으로부터 성문을 보호할 수 있도록 축성했다. 또한 성내에는 관아만 만들고 주민들은 성 밖에서 생활하다가 유사시에는 성안으로 들어와서 함께 싸우며 살 수 있도록 4개의 우물과 2개의 연못을 만들어 놓았다. 성벽에는 축성에 참여했던 고을의 이름과 축성연대가 새겨져 있어 계유년(1453)에 전라 좌·우 도민들이 모두 참여해 축성했음을 알 수 있다.

고창읍성은 언제부터인가 머리에 돌을 이고 성을 밟으면 무병장수 한다는 답성놀이가 전래, 윤 3월이면 전국에서 몰려온 아낙네들의 답성 행렬로 장관을 이룬다고 한다. 전래풍속에는 성을 밟으면 병이 없어 오래살고 저승길엔 극락문에 당도한다는 전설 때문에 매년 답성 놀이 행사가 계속되고 있다. 또 성 밟기는 저승문이 열리는 윤달에 해야 효험이 많다고 하며 같은 윤달이라도 3월 윤달이 제일 좋다고 한다. 또한 엿새 날이 저승문이 열리는 날이라고 해 초엿새, 열엿새, 스무엿새 날에 답성 행렬이 절정을 이룬다. 성을 “한 바퀴 돌면 다리병이 낫고, 두 바퀴 돌면 무병장수하며 세 바퀴 돌면 극락승천 한다”고 전해지고 있다. 성을 돌 때는 반드시 손바닥만한 돌을 머리에 이고 성을 돌아 성 입구에 다시 그 돌을 쌓아 두도록 한다.

한편 고창군청 문화유산관광과 윤석주 주무관은 “고창읍성이 아낙네들의 힘만으로 축조됐다는 전설적 사연으로 인해 답성도 부녀자들만의 전유민속이 됐다”며 “흙 한줌, 돌 한 개도 모두가 부녀자들의 손과 머리로 운반, 구축됐던 당시의 대역사를 되새겨 보는 뜻으로 돌을 머리에 이고 도는 풍습이 남아있다”고 설명하고 “또한 돌을 머리에 이고 성을 도는 관습은 여인네들의 체중을 가중시켜 성을 더욱 단단히 다지게 하는 의도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가장 깊은 뜻은 이 성곽의 축성 배경이 왜침을 막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유사시의 석전에 대비하는 유비무환의 예지로서 머리에 인 돌을 성안에 쌓아 두고 갔다는 전설도 모두가 호국의 예지를 빛내 주는 이야기들”이라는 설명이다.

고창군에서는 답성 민속을 기리기 위해 음력 9월 9일인 중양절을 군민의 날로 정하고 ‘모양성제’와 함께 답성 놀이를 재현하고 있다.

고창읍성은 성곽의 원형이 잘 보존돼 있는 국방문화재로 후세들의 산교육장으로 복원, 옛 모습을 되찾았다.

<이 기획기사는 충청남도지역언론 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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