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 석성 수탕석교, 고려 말∼조선 초의 전통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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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산 석성 수탕석교, 고려 말∼조선 초의 전통양식
  • 취재=한기원 기자/사진·사료=김경미 기자
  • 승인 2019.08.26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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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돌다리에서 역사문화적 가치를 찾다<6>
논산 석성 수탕석교는 다섯개의 다릿발 위에 기다란 장대석을 얹었다.

수탕석교, 미내다리·원목다리와 우리나라 전통적 돌다리 양식
논산과 부여의 경계, 성동 뜰을 흐르는 석성천 가로질러 놓여
‘영조 16년(1740)에 다리를 고쳐 세웠다’는 중수비(重修碑) 발견
우리나라 석교연구에 중요한 학술적 연구자료 평가되고 있어


충남 논산에는 3개의 유명한 돌다리가 있다. 조선시대 충청도와 전라도를 연결했던 미내다리, 은진과 강경을 연결한 원목다리, 그리고 부여의 석성과 논산의 은진을 잇는 다리로 넓은 성동 뜰로 농사일을 나가는 마을 사람들을 위해 축조된 수탕석교(水湯石橋,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83호)가 그것이다. 미내다리와 원목다리는 미적으로 완성도가 높고 접근성도 좋아 많은 사람들이 찾는 명소가 됐지만 수탕석교는 논산 사람 중에도 모르는 사람이 적지 않다고 한다. 수탕석교는 미내다리, 원목다리와 더불어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돌다리의 양식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연구 자료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관심과 보존이 필요한 옛 돌다리로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 현지 주민들은 ‘주창다리’로 불러
논산 석성 수탕교 돌다리는 충남 논산시 성동면 원북리 618번지 석성천변 석동 뜰에 있는 조선시대의 돌다리이다. 논산과 부여의 경계 지역에 위치한 성동 뜰의 넓은 평야 지역을 흐르는 석성천을 가로질러 놓였던 돌다리이다. ‘동국여지승람’ 등 조선시대에 편찬된 지리지에는 수탕석교·수탕천교·수탕교 등의 이름으로 기록돼 있으나 현지 주민들은 ‘주창다리’로 부르고 있다. 수탕석교는 원북리 장둑굴 마을의 초입에 있다. 논산에서 부여로 가는 4번 국도를 따라 가다가 성동면에 위치한 ‘서논산장례식장’ 쪽 갓길에서 원북리 장둑굴 마을로 향하면 이정표가 보인다. 이정표가 서 있는 반대편 마을로 향하는 논길을 따라가다가 마을 입구에서 산길을 따라 우회전 하면 나무가 우거진 산과 제방의 석성천변 둑길 바로 아래에 자리하고 있다.

조선시대 논산의 석성천을 가로질러 석성과 은진(恩津)을 잇는 돌다리로 지금은 5개의 다릿발 위에 기다란 장대석을 얹었는데, 원래는 강가 모래밭에 강의 흐름을 가로질러 묻혀 있던 것을 지금과 같이 복원 했다고 한다. 발굴 당시 다리 옆에서 ‘영조 16년(1740)에 다리를 고쳐 세웠다’는 중수비(重修碑)가 발견됐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석성현조’에 수탕포와 수탕석교가 석성현의 동쪽 7리에 있고, 수탕원(水湯院)이 동쪽 13리에 있다고 기록돼 있어, 포구에 원(院)과 다리가 있는 중요한 교통요지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김정호가 지은 ‘대동지지(大東地志; 1864)’에도 다리의 이름이 전하고 있어 19세기까지 이용된 돌다리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이후 20세기 초에 신작로가 개설되면서 교통요지의 중요도가 낮아지면서 농로로 이용되다가, 1930년대 이후 옛길이 없어지고 홍수로 매몰되면서 다리의 기능을 잃었던 듯하다.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으로 보아 빠르면 고려시대에 세워졌을 가능성도 있다는 평가다.

수탕석교는 일제강점기까지도 논산의 석동 뜰에 농사일을 하러 가는 큰 길의 역할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부여~논산 간 도로가 확장되고 군계교와 주변에 제방이 쌓아지면서 석성천의 퇴적토가 높아짐에 따라 점차 다리의 기능을 잃었다고 전해진다. 3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다리의 상판이 보였는데, 1998년 성동면 원북리 주민들이 매장된 다리를 확인하기 위한 퇴적토 제거 작업을 포크레인으로 하면서 석교의 부재들이 많은 손상을 입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충남대학교박물관에 의해 발굴 조사됐으며, 수습 정리된 석부재는 계백 장군 묘역에 보관하고 있다가 지금의 형태와 모양으로 본래의 자리에 복원했다.
 

■ 1740년에 보수한 사실이 확인돼
발굴 조사 당시 석부재와 함께 발견된 화강암의 석교 중수비에는 다리 이름을 ‘석성(石城) 수탕석교(水湯石橋)’라 기록돼 있었다. 또한 ‘건륭 5년 경신사월일개중수(乾隆五年庚申四月日改重修)’라고 적고 있어 1740년에 다리를 보수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중수 연대가 확실하게 확인돼 당대의 다리구조를 알 수 있는 자료일 뿐만 아니라 고려 말∼조선 초의 전통양식을 지닌 석교로써 여러 번의 개·보수에도 불구하고 원래의 구조를 충실히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석교연구에 중요한 학술적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따라서 수탕석교 중수비에서 ‘석성 수탕석교’로 기록돼 있는 점이나 ‘1740년(건륭 5년 10월)에 다리를 보수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문화재적 가치가 있는 돌다리다. 다리의 형태는 5개의 교각 받침을 쌓은 위에 구들장 같이 평평하고 넓은 판석을 얹은 평교로써 동서 양쪽에 자연석 교대를 쌓았으며, 양쪽의 강가에서 다리로 접근하는 계단을 쌓아 통행하도록 했다. 대략적으로 전체 길이는 13.5m, 넓이는 1.15~1.38m, 최고 높이 약 3.2m정도이다. 특히 교각은 일자형 기둥이나 아치형이 아니라 투박한 농사꾼의 모습을 닮았는데 기둥과 단을 멋스럽게 쌓아올린 석공의 재치가 담겨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논산 석성 수탕석교는 중수 연대가 확실하게 확인돼 당대의 다리 구조를 알 수 있는 우리나라 돌다리에서는 드문 자료이기도 하다. 또한 고려 후기와 조선 전기의 전통 양식을 지닌 석교(돌다리)로 여러 번의 개수와 보수에도 원래의 구조가 충실히 유지돼 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석교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판단된다. 지난 2004년 4월 10일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88호로 지정됐다.

수탕석교 관련해 고향 땅인 논산 땅을 걷는 답사현장에서 소설가 박범신은 “수탕석교는 조선시대 석성과 은진을 잇는 돌다리인데, 5개의 다릿발 위에 기다란 장대석을 얹어 만든 다리죠. 사람은 곧 자연입니다. 우리나라는 지난 5~60여 년간 압축 성장을 위해 숨 가쁘게 달려오면서 고향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항상 어딘가 불안한 것”이라며 “잃어버린 나를 찾기 위해 자연이 주는 안락함을 되찾아야 하는데, 땅은 생명의 근원이자 삶의 본원적인 에너지이듯 수탕석교와 같은 문화재인 돌다리도 잘 보존해 후손들에게 물려줘야 할 문화유산”이라고 말했다.

우리조상들은 예로부터 마을에 놓는 다리는 자연의 일부로 동화시켜 생각했다. 우리의 삶이 반영된 외나무다리와 돌다리에서 그 가치를 발견하고 현대적인 계승 방법을 모색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이처럼 사람들은 강가나 바닷가 등 한곳에 여럿이 모여 사는 것이 농경과 어로에 편리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강을 건너거나, 계곡을 건너기 위해 무엇인가 필요로 했던 것이다. 개울가를 건너기 위해서는 발이 물에 닿지 않기 위해 발을 디딜 만큼의 크기의 돌을 하나씩 줄지어 놓은 다음 그 돌의 밟고 건너가기도 했다. 나무와 돌을 이용해 건너갈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것이 다리의 시원이 되지 않았을까.

논산 석성 수탕석교는 다섯개의 다릿발 위에 기다란 장대석을 얹었다.

<이 기획기사는 충청남도지역언론 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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