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토를 비옥한 토지로 일궈내 부촌으로 성장시킨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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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토를 비옥한 토지로 일궈내 부촌으로 성장시킨 마을
  • 이은주 기자
  • 승인 2010.03.29 10: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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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홍북면 중계리 2 : 동막마을


홍북면 중계리라는 명칭은 중리와 동계를 합해 붙인 이름이다. 동막마을은 홍동산과 용봉산 사이에 위치한 마을로 봉신리 사거리에서 좌회전해 용봉초등학교를 지나 500여 미터를 더 가면 동막과 홍천으로 갈라지는 삼거리가 나온다. 이곳이 바로 동막마을의 입구로 마을표지석과 두 기의 나무 장승이 서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동막마을은 남북으로 홍성읍 소향리와 예산군 덕산면 가루실과 경계를 이루고 서쪽에는 홍천마을과 인접해 있으며 동쪽으로는 상산마을이 있다.

홍북면지에 따르면 현재는 다양한 성씨들이 살고 있는 각성바지 마을이지만 오래전부터 전의이씨 청강공파의 후손들이 세거해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의이씨 명준은 1603년 문과에 장원하여 성균관 전적과 사헌부 감찰 등을 거쳐 덕산현감, 충청도 관찰사, 병조참판 등을 역임했으며 이명준이 덕산현감을 지낼 때 왕소나무골의 정취를 좋아해 이곳에서 시름을 달랬다고 한다. 또한, 홍동산에 올라 눈에 보이는 땅이 모두 전의이씨들의 소유라는 말이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도 한해 수확이 천석에 이를 정도로 대단했다고 한다. 해서 일본경찰들도 인근 마을을 시찰할 때 이씨 댁에 들러 인사를 하고 갈 정도였다. 그러나 어려운 마을사람들에게는 온정을 베풀어 한국전쟁기 치안대가 빌미를 잡으려고 마을에 들어 올 때면 동네사람들이 보호해줬다고 한다. 1990년까지 40칸 한옥의 일부가 남아 있었으나 유지보수가 어려워 헐고 그 위에 새로 집을 지었다.

동막마을에는 오래전부터 이어오는 전통이 있다. 이는 마을공동제사를 지내지 않았던 동막마을에 젊은 사람들이 이유없이 죽거나 사고를 당하는 일 등 크고 작은 사고가 빈번히 발생하자 장승제라도 지내자는 의견이 속출해 주민들이 십시일반 모아 장승을 제작해 1999년부터 장승제를 지내고 있다. 동막마을 장승제는 음력 정월 대보름 오전 10시 30분경에 시작된다. 장승제를 지내고 난 해부터 이상하리만치 마을사람들 중에 사고를 당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해서 마을사람들은 되도록 장승제에 참여하고 있다. 장승제가 열리는 날 마을사람들은 마을회관 앞에 모여 마을 입구까지 동막 풍물패가 풍물을 연주하며 천천히 이동한다. 장승제를 지내기 위해 비나리는 외부에서 모셔오기도 하는데 마을 사람들을 제를 지내면서 액운을 털어 버리고 한해의 무사무탈을 빌고 있다.


이러한 오랜 전통과 함께 동막마을에는 천승골에 대한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용봉산 아래 천승골에는 예로부터 절터가 남아 있는데 이곳에 천명의 스님이 기거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지명도 여기에서 비롯되어 천명의 승려가 있는 골짜기란 뜻으로 천승골이라 불리운다. 현재는 경작이 이뤄지면서 본 모습은 사라졌지만 절이 있었던 흔적으로 북쪽방향으로 경사가 급하지 않은 지역이 이어지는데 소나무와 각종 잡목이 자라고 있다. 지형이 계단형을 이루고 있고 주변에서 깨진 기와편이 다량으로 확인되기도 했다. 수습된 유물은 고려시대 및 조선신대의 기와편, 자기편, 토기편 등이 있다. 예로부터 이 절에서 밥을 지어먹으면 천명이 먹을 분량이었기 때문에 냇물에 쌀뜨물과 싸래기가 실개천을 이루며 흘러내렸다고 한다. 그 후 천승골에서 흘러내리는 작은 실개천을 󰡐싸래기내󰡑라 불리우기도 했다. 또한, 동막마을에는 마을의 북서쪽에 있는 홍동산의 남향사면 중하단부에 동막사지가 위치하고 있다. 사지로 전해지는 곳은 중계리 동막고분의 상단부로서 약간의 평탄대지를 이루고 있는 지역으로 현재는 산림이 우겨져 사역의 대체적인 규모나 관련 유구․유물의 흔적을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민가가 들어서는 과정에서 고분이 파괴됐다고 하는데 자연석재를 쌓아서 고분을 축조한 석실분의 형태로 추정된다.


18년간 전통가락의 맥 이어온 풍물패

동막마을은 크게 4개의 반으로 이뤄져 있는데 절골, 윗동막, 아랫동막, 원마루로 나뉘며 현재 73세대 200여명이 거주하고 있다. 동막마을은 예로부터 마을 앞들인 구렛들을 제외하고는 콩심어도 콩이 안난다는 박토였다. 해서 새마을 사업 이후 통일벼가 확산됐지만 보릿고개를 넘기기도 어려웠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30여년전 딸기 묘목이 도입되면서 마을은 새로운 활기를 되찾게 됐다. 적어도 배고픔을 면할 수 있었으며 지금은 부촌으로 성장했다. 해서 동막마을의 주수입원은 대부분의 농가에서 재배하고 있는 딸기와 대규모로 이뤄지고 있는 축산 농가이다. 현재 딸기재배 농가는 23농가, 축산농가는 20농가이며 이외에 논농사와 밭농사를 짓고 있다. 동막마을에서 생산된 딸기는 전량 부천농협공판장과 서울 가락동농수산물시장으로 출하하고 있으며 축산농가의 한우와 돼지는 홍성축협과 서울 등지로 판매되고 있다.

동막마을에는 우리 고유가락의 맥이 끊기지 않게 하기위해 18년간을 꾸준한 노력으로 이어오고 있는 동막 풍물패가 있다. 풍물패는 딸기농사로 인해 1년을 꼬박 하우스에 매달려야 하지만 농번기에는 매월 첫째 주 목요일과 농한기에는 매주 목요일에 홍천마을 구회관에 모여 풍물연주를 하고 있다. 풍물패의 인원은 16명으로 매년 홍농연회관에서 홍북면 30개 마을의 어르신들을 위한 국악한마당을 개최해오고 있다.

동막마을에는 올해로 8년째 마을 일을 돌보며 애써 온 공로로 주민들에게 감사패를 받은 우찬제(58) 이장은 마을 풍물패 회원이기도 하다. 또한, 우 이장과 함께 마을 대소사를 챙기고 있는 우문제(76) 노인회장이 있다. 또한, 동막마을의 출신인물로는 마을 일에 적극적인 후원을 아끼지 않고 있는 홍성낙협 이영호 조합장과 이장호 변호사가 있다. 특히 이장호 변호사의 부친 이종권씨는 현재 마을에 거주하며 마을회관 자리인 대지를 마을에 희사해 마을의 행사나 주민들의 쉼터공간으로 이용될 수 있도록 한 공로로 주민들에게 감사패를 받기도 했다. 이장호 변호사는 현재 서울시 체육회 사무처장을 맡고 있으며 용봉초등학교(19회), 홍성중(28회), 홍성고(36회)를 졸업다. 또한, 마을청년회의 명예회원으로 위촉돼 마을의 주요행사 시 한번도 거르지 않고 참석하고 있을 정도로 고향사랑에 푹 빠져있다.


<마을 주민들은 바란다>

소하천 정비사업으로 장마철 홍수 범람 피해를 막아주길 바란다
마을 어르신과 부녀자들을 위한 건강관리실 준공을 원한다


동막마을 주민들은 마을의 소하천 정비사업을 원하고 있다. 소하천정비사업은 이종건 군수시절 읍․면순방 시 건의한 내용으로 연차적으로 개선시켜주겠다던 약속이 이뤄지지 않아 마을 주민들은 속만 태우고 있다. 현재 마을 중앙에 들어서있는 딸기재배하우스 주변의 소하천이 상류지역은 정비사업이 이뤄져있는 반면 하류지역 1km구간 정도는 정비사업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라고 한다. 우찬제 이장은 "동막마을의 토지는 주로 모래로 이
▲ 소하천 상류(위), 하류(아래).
뤄져 있어 장마철 비가 오면 모래가 하천으로 유입돼 하 천이 범람해 딸기재배하우스로 넘쳐 들어오고 있다"며 정비사업에 재정적이 어려움이 있다면 연차적으로 이뤄주길 바란다고 전했다.

또한, 마을주민 중 5~60%정도를 차지하고 있는 노인들과 부녀자들을 위한 건강관리실을 마련해주길 원했다. 현재 동막마을에 건강관리실이 마련된다면 토지를 희사하겠다는 토지소유주가 있다고 한다. 우찬제 이장은 농작업에 지친 피로회복과 생활의 활력을 주기 위한 찜질방, 안마기구, 운동기구 등을 갖춘 건강관리실 준공에 대한 간절한 바램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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