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도 박해, 순교의 성지 '홍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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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도 박해, 순교의 성지 '홍주성'
  • 한관우 발행인
  • 승인 2010.08.02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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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홍주)은 충남 서북부의 중심지에 위치해 옛 부터 국방과 행정의 중심지로 서해안지역의 행정과 방위의 핵심 역할을 담당해 왔다. 조선 시대에는 홍주부를 두어 관찰사가 주재했던 홍성은 관할구역도 북으로는 평택이남, 동으로는 경부선 서부지역, 남으로는 금강이북의 22개 군에 이르렀다. 현재는 충남도청이 2012년까지 이전계획으로 홍북면과 예산군 삽교읍 일원에 도청신도시 건설 사업이 진행 중이어서 충남의 도청소재지로 '홍주'의 옛 영화를 되찾기 위한 변화의 중심에 서 있다. 홍성은 최영 장군, 만해 한용운 선사, 백야 김좌진 장군과 사육신 성삼문 선생 등을 배출했을 뿐만 아니라 1905년 을사 보호 조약에 의분을 참지 못한 의병들이 순국한 충절의 고장이기도 하다.

또한 홍성읍의 한복판에 위치하고 있는 홍주성은 전체가 순국과 순교의 현장이다. 군청, 객사, 동헌 등 구석구석이 처형지였던 홍주성은 아직도 무심하게 남아 있는 고목들과 함께 당시 천주교 신자들이 받았던 엄청난 핍박을 그대로 증언해 주고 있다. 홍주아문을 돌아 군청사 안으로 들어서면 그 안이 전체가 순교의 생생한 숨결이 배어 있는 장소다. 청사 안뜰에 무심하게 서있는 고목들은 당시 순교자들이 처분만을 기다리며 오랏줄로 꽁꽁 묶여 있던 기둥들이었고, 바닥에 깔린 흙에는 선조들의 피와 고통이 그대로 스며있다. 홍주성은 관부(官府)와 민거(民居)를 둘러쌓아 지방 군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 행정 기능을 담당하던 성으로 종묘와 왕궁이 있는 도성(都城)과는 구별된다. 당시 읍성은 부(府), 목(牧), 군(郡), 현(縣) 등 행정구역에 따라 또, 주민의 수에 따라 그 크기와 규모의 차이가 있었는데, 조선 말기까지 건재했던 성들이 일제강점기 읍성철거령에 따라 대부분 철거되는 비운을 맞았다.

홍주성도 수성당시 최장 1772m에 달했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소실돼 현재는 810m 규모의 성곽만이 남아 있으며, 성내에는 관아의 건물이 35동에 이르렀다. 지금은 조양문, 홍주아문, 안회당과 여하정만 남아있다. 홍주성의 축조 연대에 대한 명확한 자료는 없으나 대원군의 친필이 남아 있는 홍주아문, 홍주성의 4대문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동문인 조양문과 함께 사적 제 231호로 지정돼 있다. 최근에는 홍주성내의 도시계획도로에 대한 지중화사업을 위한 문화재 발굴조사 과정에서 북문의 위치가 확인 됐으며, 홍주성 서문의 위치도 발굴을 통해 위치가 확인됐다. 이미 홍성군은 '홍주성 서문'위치로 추정되는 예정지에 대한 땅 매입과 발굴을 위한 예산계획 등을 수립하고 있다. 홍주성 복원에 따라 홍주천주교 성지가 문화재로 등록을 받아야 개발과 복원에도 탄력이 붙는데, 문제는 천주교성지의 원형이 남아있지 않은 상황에서 명확한 기록이 보존돼 있지도 않다는 점이 걸림돌이라는 것이다. 결국 홍주성 복원과 홍주천주교성지 복원이 맞물려 있기 때문에 기록과 원형 복원은 중요한 과제다. 따라서 인근의 천주교성지가 기록과 원형지 보존 및 복원을 통해 문화재로 지정받았다는 점에 주목할 일이다. 홍주성지를 홍주성 복원에 따라 문화재로 지정받는 일은 국비확보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에 사업추진에 탄력이 붙는 이유이며, 관건이기 때문이다.



해미 여숫골성지 등 충남도문화재 지정



한편 천주교 순교 유적지인 '서산 해미 여숫골 성지' '천안 성거산 천주교 교우촌 유적지', '당진 신리 다블뤼주교 유적지', '예산 여사울 이존창 생가터', '공주 황새바위 순교유적지' 등은 충청남도 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서산 해미 여숫골 성지는 대원군 집권기 천주교인들의 순교지로 알려져 있으며, 내포지역 천주교 전파 및 박해의 대표적 유적으로 해미읍성에서 처형된 천주교 신도의 시신 유기처 및 생매장 유적지로서 1866년 병인박해 당시 천주교 최대의 박해지로 알려져 있다.

천안 성거산 천주교 교우촌 유적지는 병인박해 당시 성거산 주변의 6개 교우촌에서 23명이 순교한 곳으로 19세기 초 천주교 교우촌의 모습 및 교우촌 운영의 형태를 알 수 있는 유적지이다. 당진 신리 다블뤼주교 유적지는 천주교 박해시기에 조선 제5대 교구장 다블뤼 주교가 머물렀던 주교관(공소)이 있었던 곳으로 천주교 박해기 교구청으로 유일하게 현존하는 곳으로, 병인박해 때 다블뤼주교 등이 이곳에서 체포돼 보령 갈매 못에서 순교했으며, 신리 다블뤼 주교관은 천주교 탄압기 다블뤼 주교를 중심으로 한국 천주교의 뿌리를 형성한 곳으로 유명하다.

예산 여사울 이존창 생가 터는 내포지역에 천주교 전파의 거점이었던 여사울은 충청도 지역교회 창설의 요람으로 󰡐충청도의 사도󰡑라고 불린 이존창의 생가 터가 있으며, 이존창은 스스로 충청지방 천주교 신자들의 지도자임을 자인하고 내포지역에서 포교활동을 펼쳤으며, 1795년 체포되어 정약종 등과 함께 공주 황새바위에서 참수형을 당한 유적지이다.

공주 황새바위 순교유적지는 19세기 천주교 박해시기 충청도 지역에서 체포된 천주교 신도들이 배교를 거부한 채 순교하였던 장소로 내포의 사도 이존창을 포함하여 확인된 순교자만 229명에 이르며 거의 1000명이 넘는 신도들이 순교한 대표적인 천주교 유적지로 알려졌다.

당진군도 국내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탄생지인 솔뫼성지(우강면 송산리)와 병인박해 때 다블뤼안 주교 등이 피신했던 신리성지(합덕읍 신리)에 대한 성역화 작업에 나섰다.

솔뫼성지는 2010년까지 40억여 원의 사업비를 들여 순교탑을 비롯해 공연장, 농산물판매장, 주차장 등을 건립하고 김대건 신부가 중국을 오가며 탔던 배인 '라파엘호'도 복원할 계획이다. 또 2020년까지 솔뫼성지 주변 지역을 매입해 김대건 신부의 생애 미니어처 등을 전시하는 생애 모형전시관, 청소년 수련관, 공원 등을 건립, 세계적인 천주교 성지로서 자리매김토록 한다는 구상이다.

아울러 천주교 박해시절 교우들이 숨어살며 예배를 보던 '신리성지'에는 2012년까지 40억여 원을 들여 교우촌을 복원하고 다블뤼안 주교관 내부전시실 정비, 야외 미사장 및 산책로 등을 조성한다. 내포문화권 개발 사업에 홍주성 천주교성지 등 4개 성지가 포함된 것은 천주교 성지의 역사적 가치가 객관적으로 인정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아울러 향후 인근의 문화 관광지와 함께 새롭게 단장될 홍주성 천주교성지의 모습에 벌써부터 관심이 쏠리고 있는 이유다.



홍주성, 옛 홍주골 삶의 원형복원 필수



홍주 천주교 순교성지가 전국에 알려지면서 천주교신자들의 순례코스로 각광 받고 있다. 지난 2008년 4월 15일 천주교신자 생매장터에 홍성군이 3000여만 원의 예산을 지원 '천주교 홍주순교성지'비석이 세워진 것을 계기로 홍주순교성지를 찾는 순례자가 계속해서 늘고 있다. 홍주순교성지비는 홍주성 북문 밖을 흐르는 월계천과 조양문 밖을 흐르는 홍성천이 만나는 합수머리 지점에 세워졌다. 이곳은 1868년 생매장으로 순교한 최법상(베드로) 등을 비롯해 박해시대 홍주성 안에서 옥사나 교수형으로 순교한 순교자들의 시신이 매장된 곳으로 추정되는 장소다. 순교비가 세워진 장소를 포함해 1983㎡의 부지에는 홍주순교성지공원 조성을 위한 계획수립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한편 2008년 4월 19일에는 예산군 삽교읍 삽교성당에 집결한 1500여명의 천주교대전교구청(교구장 유흥식 라자로주교)소속 신자들의 도보순례가 진행됐다. 이날 삽교성당을 출발한 순례행렬은 홍주의사총에 도착 점심식사를 한 후 홍주성순교성지 순례를 마치고 홍주순교성지 비석 앞에서 순례미사를 진행했다. 이날의 홍주순교성지를 찾은 대규모 도보순례로는 최대 규모다. 지난 2007년 9월 9일 서울의 여의도성당 신자 900여명이 기차를 이용해 홍주순교성지를 찾아 단일성당 신자로는 최대 규모를 기록한바 있다. 이와 관련 홍주성 복원에 따른 순교성지의 체계적인 복원과 정비도 시급한 현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특히 충남도청이전에 따라 예상되는 원도심공동화 방지를 위한 각종 대책이 요구되고 있는 상황에서 순례자를 맞이할 준비도 병행돼야 한다는 주장이다. 홍주순교성지가 전국에 알려지기 시작한 상황에서 순례자를 위한 편의시설 등의 마련은 지역경제 활성화에도 큰 몫을 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종합적인 대책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충청 최초 순교자가 승천한 곳 '홍주성'



홍성지역의 천주교 순교사 정립을 위한 첫 사업으로는 홍주의사총 도로건너편 홍성천변에 세워진 천주교 순교 비석을 들 수 있다. '천주교 홍주성지' 순교 비석의 뒷면에는 "이곳 홍주골은 믿음을 지킨 성지로 충청 최초 순교자가 승천한 곳 이 숭고한 넋은 평화의 빛이 되리라"고 적고 있다. 또 홍주천주교 순교성지 비문에는 "이곳은 1792년 충청 최초의 천주교 순교 이후 병인박해까지 212명이 피어 올린 순교의 꽃이 향기를 품어 견실한 열매를 위한 자양과 순정한 진리로 오늘을 살아가는 지혜를 타득 하게 하는 근후한 자리려니와 이에 순교의 정신으로 내 나라 내 고장 홍주의 얼을 견고히 하는 거멀못이 될 것임에 삼가 순교자를 헌양하는 마음으로 이 비를 세운다."라는 비문은 구재기 시인이 글을 짓고 서예가 심응섭이 글을 썼다.

교회 순교록에는 모두 115명(무명순교자 11명을 포함해 1866년 51명, 1867년 19명, 1868년 27명, 1869년 2명, 연도미상 16명)의 순교자가 수록돼 있고, 관변 측 기록에는 1868년 4~7월까지 4개월 동안의 순교자만 모두 102명이 수록돼 있다. 따라서 홍주의 순교자는 초기 8명을 포함해 중기 4명, 병인박해 당시 200명을 합하면 212명에 이르며, 무명 순교자를 포함하면 실제 순교자수는 1000여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될 만큼 홍성지역의 천주교 성지는 한국천주교회사의 핵심성지다. 홍주성 전체가 천주교 성지라 할 만큼 홍성의 천주교 성지는 다른 지역의 성지보다 개발이 늦지만 전국에서 대규모 순례자들이 기차를 이용해 찾고 있는 대표적 천주교 순교성지다. 원형 복원이 시급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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쓴소리 2010-08-28 18:34:50
홍성에서 일어난 사옥은 프랑스 신부 페롱과 독일상인 오페르트가 주도했고 해미 천주교인들이 길을 안내하여 고종의 할아버지인 남연군묘를 도굴한 반인륜적이며 파렴치한 사건으로 시작되었다.
그런데 무슨 성지타령인가? 역사와 민족의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에 지역신문이 나서다니 한심스럽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