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는 마땅히 죽어야할 장소에서 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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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는 마땅히 죽어야할 장소에서 죽어야 한다
  • 유태헌(홍주신문 서울본부장, 홍성고 20회)
  • 승인 2010.08.06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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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헌의 백두대간 종주기] 13구간

올해 들어 본지는 국토의 등뼈를 밟아나가는 유태헌(홍주신문 서울본부장홍동출신ㆍ홍성고 20회ㆍ손전화 010-3764-3344) 출향인의 백두대간 종주기를 비롯해 산행기를 연재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편집자 주> 

산행일자 : 2010년 7월 31일~8월 1일
구 간 : 큰재-개터재-백학산-개머리재
지기재-신의터재
도상거리 : 23.6km
산행시간 : 10시간 소요 

 

 

 

 

짙은 먹구름으로 덮힌 서울 하늘을 출발하면서 혹시나 비는 오지 않을까 내심 걱정하면서 잠실을 출발한다(11:20). 화서휴게소에서 잠시 머문 후 오늘의 들머리인 큰재에 도착하니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온다(02:30).

우리가 도착한 큰재에는 백두대간상의 유일한 학교인 옥산초등학교 인성분교는 1997년 2월 28일 폐교된 학교로 지금은 체험학습관 공사가 한창이다. 산행기점인 이 고개는 황간과 구미, 선산을 연결하는 68번 지방도로가 지나는 고개로써 재가 크다 하여 큰재로 이름 지었다 하나 우리가 보기로는 큰 고개라 할 수 없을 정도로 평지에서 지나는 2차선 포장도로였다. (03:00) 공사 중인 옆 진입로를 따라서 힘차게 출발한다.

도상거리 24.6킬로미터. 이번 구간은 해발 200~600미터 낮은 지대로써 민가와 인접한 야트막한 야산과 포도밭 등 과수원 길도 걷는다. 산천의 전통은 유구하며 대대로 강원과 경상이 그로부터 갈리고, 충청과 경상, 전라와 경상이 그로부터 나뉘었다. 오늘날의 도계 또한 변함없이 백두대간을 따라 마루금을 그었으니, 이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경계가 아닌 탓이다. 다만 지도를 펴놓고 백두대간의 마루금을 긋다보면 몇 군데 대간과 도계가 어긋나는 곳이 있다. 그 중 이번 구간이 상주 화령 일대의 무려 6개 면은 대간을 넘어 깊숙이 충북땅으로 들어섰으며, 이처럼 백두대간의 경계를 넘어온 그 경상도땅 여섯 고을을 두고 생겨난 말이 '중화지구대'이다. 화서, 화북, 화동, 화남의 4개 면은 본래의 화령현이요, 모동면과 모서면은 옛날의 중모현이니, 중화란 바로 상주목을 따르던 중모현과 화령현을 뭉뚱그린 이름이다. 큰재를 출발하여 시멘트길과 과수원 사잇길을 지나 얕은 능선을 1시간여 산행하면 내리막길을 바로 건너 뛰어 회룡재(340m)에 도착한다. (04:00)

잡초가 무성한 회룡재는 차량 통행이 불가능한 임도로 우측은 골기실로 통하고 좌로는 희룡과 무수동으로 연결된다.

회룡재를 출발하여 고개인지 안부인지 희미한 능선의 내리막이 끝날 즈음 쌍묘 2기가 나란히 계단을 이룬 지점인 개터재에 이르게 된다. (04:30) 윗마을 사람들이 개터골로 농사를 짓기 위하여 넘나들던 곳으로 봉산재, 효곡재라고 한다. 개터재를 뒤로하고 이 능선이 저 능선인지 이곳이 그곳인지 희미한 능선을 쉼 없이 가다보면 윗왕실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뒷산에 도착한다. 작은 봉우리 하나 넘어 505봉을 지나 방향을 북쪽으로 돌려 소나무와 잡목이 빼곡한 구간을 걸쳐 윗왕실재(380m)에 도착한다(06:00) 후미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며 아침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캔 맥주 한잔에 더위를 식힌다. 준비한 음식을 일행들과 나누어 먹고 잠시 피로를 풀면서 지나온 구간을 정리한다.

 

 

 

(07:00) 윗왕실 임도를 지나 오르막 경사 길을 한차례 올라서 이 고개 저 고개를 넘고 지루한 능선을 오르내리면, 멀리 비슷한 봉우리 3개가 나란히 시야에 들어온다. 계속 직진하여 첫 번째 480봉을 지나 이름도 없는 안부와 재를 넘고 넘어 두 번째 477봉에 오른다. 조금 더 오르면 세 번째 봉우리 백학산(615m)정상에 오른다. (08:00) 공성, 내서, 모동, 모서면이 경계를 이루는 산으로 '백골봉', '장자봉'으로도 불리며, 백학이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백두대간과 615m 고지를 표시한 정상표지석을 잡고 기념촬영을 하고 사방을 조망하면서 잠시 숨을 돌린다.

백두대간의 체면을 겨우 유지하고 있는 백학산을 넘어서면 마루금은 겨우 해발 200~400m 내외를 넘나들며 야산지대를 이룬다. 그러나 백두대간 분수령으로선 낮아도 농사터로는 고원지대다. 이곳은 평지와의 평균기온이 3~5도 차이가 나고 낮과 밤의 기온차가 심해 당도 높은 과일을 생산하는 과수농업이 발달해 있다. 특히 이곳에서 재배된 과일은 당도가 높아 전국에서 으뜸가는 농산물이라고 한다. 이렇게 생산된 농산물의 유통을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발달된 교통체계는 남북으로 경부선철도와 국도3호선이, 상주시를 중심으로 대구, 김천, 구미, 문경 및 충북 보은, 청주, 괴산, 대전 등 사방으로 연결되어 영남 내륙의 물류 중심지로도 변모하고 있다. 과수원 가는 농로와 손에 잡힐 듯한 민가가 가까운 마을길, 야산의 잡목들 때문에 백두대간 분수령을 밟는 대간꾼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구간이기도 하다. 그래도 계절마다 변하는 농촌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고 포근한 농부의 미소도 가까운 곳에서 만날 수 있으니 어찌 사랑스럽지 않으랴.

백학산을 뒤로하고 우측 함박골 임도로 내려서니 좌측엔 개울물이 시원스럽게 흘러내려 땀으로 뒤범벅이 된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임도와 포도밭 그리고 인삼밭을 지나면서부터는 왼쪽에 넓직한 밭을 두고 잡풀로 무성한 수풀지대를 통과하여 원소정재에 도착하고 계속 내려서면 얕은 능선 2개를 지나며서 널찍한 개머리재(295m)에 도착한다(09:50). 개머리재는 우측으로 함박골 대포저수지와 좌측으로 원소정 삼거리로 연결되는 비포장도로로 일명 소정재라고도 한다. 또 개의 머리형태를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는데 보기에도 그럴 듯 싶다.

선유동 삼거리를 지나 급경사 내리막 계곡길을 한참이나 내려서면 멀리 가로놓인 지기재고개가 보이고 앞선 일행은 종착지인줄 알고 함성을 지른다. 그러나 종착지는 아직도 멀리만 있어 저기가 여기가 아니란다. 화동과 낙서를 지나는 25번 지방도로에 금강과 낙동강 분수령이라는 안내표지판이 서있고 우측에는 승정원 좌승지를 지냈다는 창녕 성씨의 큰 비석이 거북이등 위에 세워져 있다. 지기재를 뒤로하고 금은골 뒷산을 지나 오른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능선을 내려서면 안쑥 밭골논이 펼쳐진다. 송전탑을 지나 오늘의 날머리인 신의터재(280m)에 도착한다(12:00).

상주고을 화동면과 내서면을 오가는 이 고개의 원래 이름은 신은현이다. 그러다 임진왜란 이후에 신의터재로 불리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어산재로 바뀌었고, 1995년 신의터재란 이름으로 되돌아 왔다. 해발 200m인 나지막한 고개에 대체 무슨 일이 생겼던 것일까. 때는 일본이 조선을 전쟁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1592년 임진년 4월 13일. 왜군 선봉은 물밀듯 부산 앞바다에 들이닥쳐 14일 부산진성, 15일 동래성을 함락하고 19일 언양성, 22일 영천성을 거쳐 별다른 저항 없이 북진에 북진을 거듭했다. 그러는 사이 조선은 유성룡을 도체찰사, 신림을 도순변사, 이일을 순변사로 임명해 백두대간의 조령, 죽령, 추풍령에 방어선을 편성하였지만 조선의 앞날은 풍전등화였다. 이때 신의터재에서 가까운 상주 화동면 판곡리에 태를 묻은 김준신(1561~1592)이 이 재에서 의병을 모은 후 25일, 60여명의 관군과 600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상주성을 지키기 위해 왜군 1만7600여 명과 싸우다 장렬히 전사했다. 중과부적으로써 처음부터 이길 수 없는 싸움임에도 김준신은 󰡒남아는 마땅히 죽어야할 장소에서 죽어야 한다󰡓며 부하들과 함께 왜군 수백 명을 죽였다. 왜군은 분풀이를 하기 위해 김준신 가족이 살고 있는 화동면 판곡리로 몰려갔다. 그러나 어찌 민간인이 정규군을 당하랴. 마을 사람들은 힘을 합쳐 저항했지만 남자들은 거의 학살당했고, 부녀자들은 왜군들에게 욕을 당하지 않으려 마을에 있던 연못에 몸을 던졌다. 그래서 이 연못의 이름이 낙화담이다. 그 당시 1600여평 이었던 낙화담은 세월이 흐르면서 메워져 이제는 불과 60~70평 남짓한 연못으로 변해 버렸다. 300여년 뒤 한일합병에 성공한 일제는 임진왜란 때 신의터재에 얽힌 이야기를 알고 있기에 이름을 어산대로 바뀌었던 것을, 문민정부 수립 후 광복 50주년을 맞이하여 민족정기를 되찾고 후손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 교육의 장으로 삼고져 옛 이름인 신의터재로 다시 고쳤다. 제단비는 김준신을 추모하기 위하여 1850년(철종1년) 무렵에 세워졌다. 그 뒤 낙화담 왼쪽의 나지막한 언덕 아래에 첨모재와 비각을 세웠다.

 

이번 구간은 높고 험하진 않지만 약간의 지루함도 느껴지는 코스였다. 하지만 역사의 숨결이 살아있는 신의터재에서 김준신 선생의 정신을 본받아서 남은 대간길을 무사히 마칠 수 있도록 다시금 다짐한다. 상주시 화동면 미소리에 있는 '팔음산 가든'(전화 054-533-9454)에 도착하여 샤워를 하고 갈비탕에 소주를 한잔하는데 갈비탕 속에 들어있는 화동면 한우갈비 3대가 맛과 양에 있어서 처음 먹어보는 맛이다. 인공조미료를 넣지 않은 국물은 단백하며 고기의 쫄깃하고 부드러운 맛에 가격까지 저렴하다.(5000원) 기회가 되면 다시 한 번 꼭 오리라 다짐한다. 평소보다 조금 이른 시간인 18:00경 잠실에 도착하여 그동안 대간을 하면서 가까워진 지인과 맛있는 안주에 막걸리 한잔하면서 코뿔소 백두대간 5기 대원 100여명과 임원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보낸다. 특히 5기 이동원 회장님을 비롯해 임헌주ㆍ최진택 등반대장, 민구홍ㆍ김해옥 총무님의 수고에 박수를 보낸다. 아울러 안전운전을 해주는 1호차, 2호차 기사님께도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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