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재의 반은 영남에 있고, 영남인재의 반은 상선(상주와 선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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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재의 반은 영남에 있고, 영남인재의 반은 상선(상주와 선산)에 있다"
  • 유태헌(홍주신문 서울본부장, 홍성고 20회)
  • 승인 2010.09.17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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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헌의 백두대간 종주기] 14구간

올해 들어 본지는 국토의 등뼈를 밟아나가는 유태헌(홍주신문 서울본부장홍동출신ㆍ홍성고 20회ㆍ손전화 010-3764-3344) 출향인의 백두대간 종주기를 비롯해 산행기를 연재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편집자 주>

 

 



산행일자 : 2010년 8월 14일~15일
구 간 : 신의터재-윤지미산-화령재- 봉황산-비재-갈령삼거리-갈령
도상거리 : 26.6km
산행시간 : 11시간 10분 소요


상청에서는 중부, 영남지방에 국지성 호우가 쏟아진다는 예보다. 모처럼 강한 바람이 폭염에 지친 서울을 시원하게 해준다. 우리를 태운 버스가 옥산휴게소에 잠시 쉬었다가 들머리인 신의터재에 02시 20분 도착한다. 02시 40분 오른쪽 능선 길을 따라 대간길은 시작된다. 산행시작 후 40여 분 뒤 첫 번째 농로에 이어 봉우리 하나를 넘으니 곰터골로 밭이 보이면서 두 번째 농로가 나타난다. 이곳 대간길은 유난히 묘지가 많아 아마도 주변 마을에서 내로라하는 지관들이 명당자리임을 지칭하였음이니라. 높낮이가 거의 없는 마을 뒷산 같은 길을 걷다 보면 무지개산 정상과 화령재 삼거리가 나온다. 산 아래 폭포에 떨어지는 무지개가 그림처럼 아름답다 하여 무지개산이라 하였다는 무지개산을 270° 꺾어지는 마루금은 숭덕지맥의 시작인 437봉으로 내달린다. 437봉에서 소머리산(윤지미산)으로 이어지는 숭덕지맥은 박성태 님의 신산경표에 봉황산에서 시작하여 무지개산과 숭덕산을 지나 영강으로 이어지는 49.9km의 산줄기를 '숭덕지맥'이라고 한다. 433봉을 지나 제법 가파른 능선길을 오르면 문헌과 지도상에 표시되어 있지 않은 윤지미산(소머리산 538m)에 05시 30분에 도착한다. 날이 밝음을 알리는 새소리와 매미 소리가 반겨준다.

비교적 널따란 평지는 급경사로 이루어진 비탈을 오르느라 수고한 산꾼들의 땀과 더위를 식혀주기 충분한 시원한 바람이 불어주며 자연석으로 만들어 세운 앙증맞은 정상석이 재미를 더해준다. 예로부터 소머리산으로 불려오던 538봉이 언제부터 윤지미산으로 둔갑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윤지미의 뜻은 사서삼경 대학에 나오는 윤집걸중(允執乞中)이라는 단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인생전반을 다 안다. 세상을 포용한다. 세상은 두루 알아 말하다'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사자성어를 사용하여 윤지미산의 상징성을 부여한 것으로 보아 작명자의 노고를 엿볼 수 있는데, 이것은 삼백(쌀, 누에, 곶감)의 고장 상주사람들의 인품과 학풍을 은연중 자랑한 것으로 보인다. 상주시 사벌면 금혼리에 있는 충의사는 김준신 의병장보다 한해 늦게 태어난 정기룡(1562~1622) 장군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그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왜군과 100여 차례의 전투를 승리로 이끈 명장이다. 특히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토벌대장이 되어 6만의 왜적을 대파하고 상주, 합천, 의령 등의 여러 성을 탈환했고, 경주, 울산을 수복하는 등 부족한 군사와 무기로 용맹을 떨친 그를 흔히 '육지의 이순신'이라고도 불렀다. 충의사에서 십리쯤 낙동강 물길을 거슬러 오르면 강물 크게 휘도는 곳에 자리한 경천대는 정기룡 장군이 무예를 닦으며 심신을 연마하던 곳이다. 경천대는 상주 사람들이 '낙동강 1300리 물길 중 경관이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고 자랑하는 곳답게 낙동강 고운 모래밭 위로 솟은 절벽이 일품이다. 옥대, 신패, 유서, 교서, 교지 등 장군이 남긴 유물은 보물 제669호로 지정되어 충의사에 보관하고 있다. 이 외에도 장군의 행적을 기록한「매헌실기」의 판목58정과 장군이 임진왜란 당시 실전에서 사용하던 칼 등이 남아있다.

임진왜란 최초의 의병장인 김준신, 그리고 정기룡 장군과 더불어 조선 중기 상주의 3대 인물로 꼽히는 이가 있으니 조선중기의 예학자인 우복 정경세(1563~1633)가 그 사람이다. 정기룡 장군보다 한 해 늦게 태어난 정경세는 문신 최고의 영예직인 홍문관과 예문관 대제학을 겸임한 대학자였다. 서애 유성룡의 문하에 들어가면서 영남학파에 속하게 된 정경세 이지만 이기설 논쟁에서는 기호파의 율곡을 편들기도 한 소신 있는 인물이다. 역시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싸우던 그는 조정에서는 나라의 기강과 백성의 생활안정을 강조했으며, 지방관이 되어서는 향인들의 교화에도 힘썼다. 화령재 동쪽의 외서면 우산리엔 정경세의 종가가 남아있다. 종택은 대산루 남쪽 언덕에 자리 잡아 '우산팔경'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명당지로서 현재 장군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 이렇듯 상주를 대표하는 세분이 모두 한해를 두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세상에 태어났으니 참 특별한 인연임에 틀림없다. 택리지의 저자 이종환이 "조선인재의 반은 영남에 있고 영남인재의 반은 상선(상주와 선산)에 있다"고 한 말은 이 분들에 대한 헌사일 것이다.

윤지미산의 시원한 바람에 땀을 식혀주고 약 200m의 급경사를 내려서면 화령재까지 이어지는 마루금은 시골길을 걷는 한가로움을 안겨준다. 시원하게 뻗은 상주~대전 간 고속도로 터널 위를 지나 담소 나누며 임도 따라 걷다가 오른쪽 오솔길 접어들어 25번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 소리를 노래 삼아 우측의 대궐터 산과 정면의 봉황산을 조망하면서 화령재(320m)에 06시 40분 도착하면 1990년 6월에 건립된 화령정이 대간 길에 수고한 우리들을 반겨준다. 원래 이름은 화령(化寧)이었으나 지금은 화령(火寧)으로 바뀌었다. 삼국시대부터 삼국 간의 국경지역이었고 김유신 장군이나 견훤이 중요시하던 군사요충지였으며 625때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라 불화자로 바뀐듯하다. 화령고갯마루 서쪽의 화서면 신봉리 장터에선 매월 끝자리가 3.8일인 날에 화령장이 선다. 고려 때부터 화서, 화동, 모동, 모서, 화북화남 등 중화지역의 중심 장으로 역할을 다했다. 다른 지방에서 화서는 몰라도 화령장은 안다."고 할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당시 장날이면 사람 어깨가 부딪혀서 걷기 어려울 정도로 인파가 붐볐지만, 지금은 점심 무렵이면 어느덧 파장분위기가 풍겨 나오는 한가한 시골장이 되었다. 화령장으로 유명했던 화령은 625전쟁 때 낙동강 방어선 전투 중 칠곡군 가산면의 다부동 전투 다음으로 치열했던 화령장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한국전쟁사」는 1950년 7월 17일 부터 25일 사이 화령장 주변에서 처절하게 벌어졌던 전투를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당시 북한의 인민군 제15사단은 괴산부터 보은에 이르기까지 국군 제1사단을 공격하는 한편, 증강된 1개 연대로 일시에 화령장을 돌파하고 상주를 점령하려 했다. 국군 제 6사단의 병참선을 차단해 이를 격파한 다음 인민군 제 1사단과 협공하여 대구를 점령하려는 계획이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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