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리산의 옛 이름은 구봉산(九峯山)이다
상태바
속리산의 옛 이름은 구봉산(九峯山)이다
  • 유태헌(홍주신문 서울본부장, 홍성고 20회)
  • 승인 2010.10.08 14:2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유태헌의 백두대간 종주기] 15구간 ①

 


백두대간 종주기 15구간
산행일자 : 2010년 9월 4일~5일
구간 : 늘재-밤티재-문장대-천왕봉-피앗재-형제봉-갈령
도상거리 : 20.62km
산행시간 : 11시간 30분 


백두대간 북진 15구간이 지나는 속리산은 충북 보은군과 괴산군, 경북 상주시 화북면에 걸쳐 있는 산으로 연꽃모양을 연상시키는 산줄기가 활처럼 휘어져 여덟 개(상학봉을 포함하면 구봉이 된다)의 암릉을 이루며 곳곳에 솟아올라 설악, 월출, 월악, 삼각산 등과 견주는 빼어난 산세를 자랑하는 우리나라 12종산의 하나이며 조선팔경의 하나로 금강산에 빗대어 소금강으로 불리어 지고 있는 명산이다. 문헌에 나타나는 속리산의 옛 이름은 구봉산(九峯山)이다. 신중동국여지승람에 이르기를 “봉우리 아홉이 뾰족하게 일어섰기 때문에 구봉산” 이라는 기록과 함께 상주 동쪽 43리에 또 다른 구봉산이 있다고 적었는데 후자는 구병산을 칭한 것으로 보인다. 기록에 의하면 고대시절부터 일관되게 속리산으로 불렸지만 불교의 색체가 강한 속리산은 구봉산, 속리산, 소금강산, 광명산, 지명산, 이지산, 형제산, 자하산 등 8개의 또 다른 명칭을 가지고 있다.

속리산 명칭에 대한 유래를 보면 784년(신라선덕여왕5년)금산사에서 수도하던 진표율사가 속리산에 이르자 들판에서 밭갈이 하던 소들이 무릎을 꿇고 율사를 맞이했다. 이를 본 농부들이 ‘짐승도 회심이 저리 존엄한데 하물며 사람에 있어서랴’ 하며 머리를 깎고 진표율사를 따라 입신 수도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때부터 사람들이 ‘속세를 떠났다’는 뜻에서 속리산(俗離山)으로 부르게 되었다는 문헌이 구전을 통해 전해 내려오는 속리산의 명칭에 대한 유래다. 또 다른 유래는 ‘도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는데 사람은 도를 멀리하려고 하고(道不遠人 人遠道), 산은 속세를 여의치 않는데 속세는 산을 여의려 하는구나(山非離俗 俗離山)’

이 글을 고운 최치운의 시로 알려져 있지만. 백호 임제(1549~1587)의 시이다. 이 시에서 속리산이라 이름 지어 졌다한다. 속리산은 8자와 관련된 많은 승경(勝景)을 지니고 있는 산으로 유명하다. 첫째, 위에서 언급한 8개의 산 이름과 둘째, 천왕봉, 비루봉, 길상봉, 문수봉, 보현봉, 관음봉, 묘봉, 수정봉의 8개의 봉이 있고 셋째, 문장대, 임석대, 경업대, 배석대, 학소대, 신선대, 봉황대, 산호대의 8대가 있고 넷째, 내석문, 외석문, 상고내석문, 상고외석문, 비로석문, 금강석문, 상황석문 추래석문의 8개 석문이 있다. 다섯째, 속리산의 물줄기는 아홉 구비로 돌고 돌아 흐르는데 여기에 놓인 다리가 8개이며 조선팔경의 하나이니 8자와 유난히도 인연이 많은 산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이면 8이라는 숫자에 촛점을 맞췄을까? 8이란 숫자는 원래 불교와 관계가 깊다. 즉 8은 열반에 오르기 위한 불교의 실천 수행으로서의 여덟 가지 바른길인 8정도를 일컫는다. 8정도란 바르게 보는 정견, 치우치지 않고 바르게 생각하는 정사유, 바르게 말하는 정어, 올바른 신체적 행위인 정업, 올바르게 생활하는 정명, 올바르게 수행하는 정정진, 그릇된 생각을 바른 마음으로 수행하는 정념, 일심으로 몰두하여 밖으로 분산되지 않게 하는 정정의 여덟 가지를 말한다. 그러니 누구라도 속리산에 들게 되면 저절로 8정도의 수행 길에 드는 것이나 다름이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기암괴석과 맑은 물 그리고 울창한 산림은 천년고찰 법주사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 삼국시대 백제와 신라의 각축장인 보은 삼년산성을 지나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의 본향인 상주로 접어드니 들머리인 늘재에 도착한다.(02시40분) 깜깜한 새벽 밤하늘에 걸쳐 있는 그믐달과 초롱초롱한 별들이 유난히도 반짝인다. 그동안 북진하던 대간길이 남진으로 바뀌어 늘재에서 갈령을 향해 힘차게 출발한다.(03시00)

늘재에서 밤티재 사이의 692.2봉에 오르면 속리산의 서북능선과 남북능선이 모두 조망되는데 관음봉으로 이어지는 서북능선과 칠형제 봉으론 이어지는 남북능선의 암릉미의 아름다움은 천하제일경이라 하여도 손색이 없을 만큼 아름답다. 어두워서 보지 못한 아쉬움을 뒤로하고 밤티재에 도착한다(04시 30분). 밤티재에서 문장대로 오르는 암릉 구간은 스릴을 즐기고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구간이다. 입석바위를 지나 시어동 갈림길에 오르니 날이 밝아오고 시시각각 변하는 운해가 장관을 이룬다. 그 사이로 힘차게 비집고 나오는 일출의 아름다움에 탄성을 자아낸다. 더위와 땀에 옷이 흠뻑 젖는다. 드디어 스틱도 접고 올라야 하는 암릉 구간이다. 암릉 구간의 재미는 무엇보다도 미로 찾기가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을 주는데 굴속에 잘못 들어가면 나무를 타고 내려와야 하는 타잔이 되곤 한다. 안전하게 지나갈 수 있도록 고사목으로 계단이 되어 있지만, 어제 내린 비에 흠뻑 젖은 나무 계단은 너무 미끄러워 조심스럽게 올라가야 하는 제법 난이도가 있다.

스릴을 즐기기에 그만인 이 구간을 빠져 나오면 헬기장이 나타나는데 여기서 문장대 방향으로 서북능선을 보내고 백두대간의 마루금은 남서쪽으로 경업대와 입석대 사이에서 그 유명한 칠형제 봉을 동쪽능선에 내려놓고 천왕봉을 향해 이어간다. 4시간 예상했던 문장대에 한 시간이 넘은 08시 10분에 도착한다. 후미가 도착하길 기다려 철계단 통해 문장대에 오르니 방금 오른 대간길이며 북쪽으로 관음봉, 묘봉, 상학봉 등의 충북 알프스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고 반대로는 가야 할 천왕봉 지나 형제봉까지 조망되는 사방의 경관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하는데 특히 구병산 줄기에 걸쳐 있는 운해는 천상의 세계를 연출시킨다. 문장대(1028m)! 세 번 오르면 신선이 된다는 문장대다. 하늘높이 치솟아 흰 구름과 맞닿은 듯한 절경을 이루고 있어 운장대 라고도 한다.

속리산 문장대 비석 뒤에 새겨진 글을 보면, ‘도는 사람을 떠나지 않는데 사람은 도를 멀리하고 산은 세속을 떠나지 않는데 세속은 산을 떠나네 하여 붙여진 속리산 문장대 구름 속에 갈무리져 운장대라 하다가 세조가 이곳에 올라 시를 지었다 하여 문장대라 했으니 우러러 우주의 장대함을 보고 구부려 품류의 번성함을 살핀다는 기묘의 극치 정상에는 알이 부화한 둥글게 파인 곳이 있으니 태초 생명탄생의 신비를 일러주도다. 동쪽으로 칠형제봉, 문수봉, 신선대, 비로봉, 천왕봉이 이어져있고 서쪽으로 관음봉, 문수봉이 솟았으며 비켜서 낙영산과 도명산이 다가선다. 남쪽 아늑한 곳에 법주사를 앉혀 법맥을 잇게 했으니 조물주의 조화여 오! 선계의 아름다움이여. -박찬선 님 글 짓고 김정홍 님 글 새김

후미가 도착하여 아침식사를 마치고 천왕봉을 향한다(09:00). 신선대에 올라 당귀 막걸리 한잔을 하니 신선대의 전설이 스친다. 그 옛날 속리산에서 절경에 혼을 빼앗긴 고승이 청범대에서 불경소리를 듣고 멀리 남쪽능선을 바라보니 산봉우리에 백학이 수 없이 나라와 춤을 추고 그 가운데 신선들이 앉아 놀고 있는데 그 모습이 선유 세계인지라 황급히 그곳으로 달려갔으나 막상 당도하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고승은 크게 실망하고 그 자리를 떠나 다음 봉우리에 가서 다시 이곳을 보니 여전히 주위에는 백학이 놀고 신선들이 담소를 하는지라. 고승은 아직도 자신이 신선들을 만날 수 없음을 깨닫고 다시는 그 곳으로 달려갈 엄두도 못 냈다고 한다. 그리하여 신선들이 놀던 봉우리를 신선봉, 놀던 바위를 신선대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신선대에서 바라보는 남쪽에 법주사가 한 폭의 그림이다. 신선대를 출발 산죽 길을 걷노라면 오른쪽에 입석대가 서 있다. 조선인조 때에 임경업 장군이 7년 동안 몸과 마음을 수련하고서야 마침내 반석위에 돌을 세우는데 성공을 했다. 그 후 ‘돌을 세웠다’고 해서 입석대라 하였고, 범주사 쪽으로 내려오다 보면 임경업 장군이 독보대사를 모시고 무술 연마 등을 한 수련도장으로 삼았던 곳을 경업대라 부른다.

통천문을 지나고 비로봉을 조금 내려가니 상고암으로 내려가는 길과 천왕봉으로 가는 삼거리가 나온다. “경업대 1.9km, 천왕봉 0.6km, 상고암 0.7km, 법주사5.1km란 이정표가 서 있다. 이곳에서 5.1km오른쪽으로 내려가면 그 유명한 3대 불전 중 하나인 법주사다. 명산에 대찰 있다고 했던가, 속리산 기슭엔 산 이름에 부끄럽지 않을 천년고찰 법주사(法住寺)가 자리하고 있다. 553년(신라 진흥왕 14년)에 의신도사가 처음으로 창건했고, 그 뒤 776년 (혜공왕 12년) 진표가 그의 제자들과 미륵신앙의 중심도량으로 중창하며 대찰의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그러다 정유재란 때 왜군들의 방화로 불에 타 버렸는데, 사명대사가 대대적인 증건을 시작했다. 이런 과정 속에 건축물을 중심으로 불상, 화학, 공예 등의 많은 미술품들이 세워지거나 그려지면서 대찰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아름드리 떡갈나무와 느티나무, 소나무들 어우러진 ‘오리숲 지나 수정교를 건널 무렵이면 속세의 때는 어느덧 씻겨나간다.
이어 금강문 들어서면 국내에서 가장 크다는 천왕문이고, 역시 가장 큰 사천왕상이 압도할 듯 지키고 있다. 그 너머로는 우리나라 목탑으로는 유일하게 온전히 남아있는 5층 목탑인 팔상전(국보 제55호)보인다. 이외에도 경내에는 쌍사자석등(국보 제5호), 석련지(국보 제46호), 사천왕석등 (보물 제 15호), 마애여래의상(보물 제 216호)등의 귀한 문화재가 아주 많다. 모두 국보 아니면 보물인데, 지난 2004년엔 수암화상탑과 희견보살상, 학조등글화상탑도 모두 보물로 지정 되었다. 법주사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33m높이의 금동 미륵대불이다. 원래 진표율사가 조성했다는 미륵장육상이 조선 말기까지 봉안되어 있었던 것을 1872년(고종9)경복궁 복원을 명목으로 불상은 철거되어 압수되고 빈터로 남아 있다가, 20세기 초 조각의 선구자 김복진에 의해 100척의 미륵대불이 1939년 불상 제작에 착수 했지만 그 이듬해 김복진이 요절하는 바람에 미완으로 남게 되고 그러다가 20여년의 세월이 흐른 뒤 나라의 도움으로 1964년 단오절에 점안법회를 가졌다. 그런데 법주사 측은 1987년 시멘트 대불을 철거하고 1990년에 청동미륵대불로 해체작업을 했으나 청동불상의 용접부위가 부식되면서 얼룩지자 개금불사를 추진하여 황금가사를 입힘으로서 일단락된다. 황금의 덕인지 청동대불일 때 보다는 표정이 부드럽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