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의 욕심을 버리고 청정하게 불도(佛道)를 수행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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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의 욕심을 버리고 청정하게 불도(佛道)를 수행 하는 것’
  • 유태헌 본부장
  • 승인 2011.05.06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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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헌의 백두대간 종주기] 28구간 ②

 


올해 들어 본지는 국토의 등뼈를 밟아나가는 유태헌(홍주신문 서울본부장홍동출신·홍성고 20회·손전화 010-3764-3344) 출향인의 백두대간 종주기를 비롯해 산행기를 연재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편집자 주>

산행일자 : 2011년 4월 16일~17일
구 간 : 댓재 - 두타산 - 박달령 - 청옥산 - 연칠성령 - 고적대 - 갈미봉 - 상월산 - 원방재 - 백봉령
도상거리 : 29.1km
산행시간 : 13시간 소요

청옥산 넓은 헬기장에서 아침식사를 마치고 고적대로 향한다. 청옥산에서 급경사길을 내려서면 연칠성령(1170m)이다. 예로부터 삼척시 하장면과 동해시 삼화동을 오가는 곳으로 산세가 험준하여 난출령(難出領)이라 불리었다.

이 난출령 정상을 망경대(望京臺)라 하는데 이는 인조원년 명재상 택당이식(澤堂李植)이 중봉산 단교 앞에 올라 한양을 사모하여 망경(望京)한 곳이라 한다. 연칠성령을 거쳐 고적대로 가는 길은 다소 험하다. 절벽에 매달린 밧줄에 의지해 외길로만 가야 한다.

 

 

 

 

 

 

 


앞바람을 안고 오르다보니 아찔한 순간도 연이어 찾아온다. 위험하고 어려운 고비를 넘기고서야 고적대(1353.9m)에 오른다. 고적대는 그렇게 땀을 씻은 사람에게만 명품을 선물한다. 이곳에서 두타와 청옥을 바라보아야만 비로소 삼위일체의 균형이 살아난다. 그래서 예로부터 이 세 봉우리를 일컬어 해동삼봉이라 부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신선이 산다는 무릉계곡의 시발점이 되는 명산으로 높고 험준하여 넘나드는 사람들의 많은 애환이 서린 곳이다.

이곳에서 신라 고승 의상대사가 수행하기도 했다. 고적대 정상에서 북쪽으로 나 있는 내리막의 등산로는 아직 녹지 않은 눈 때문에 매우 미끄럽다. 조심조심 내려가니 이번에는 폭이 좁은 등산로로 이어지며 등산로 좌우에 서 있는 철쭉나무 등의 나뭇가지들이 얼굴을 마구 때린다.

이어서 갈미봉(1260m)을 지나 내리막길로 이어지는 898봉을 지나면 이기령(耳基嶺.810m)이다. 이기령 옛길은 구한말 백봉령 도로가 생기기 전까지 삼척에서 소금을 지고 정선으로 넘어 가는 길이었다. 잠시 휴식을 취하며 과일과 찹쌀떡으로 간식을 하고 다시 산행을 시작한다.

이기령까지 17km이니 백봉령까지 아직도 12km 정도 남았다. 이제부터 견디기 힘든 고행의 산행이다. 체력은 전부 소모되고 아직도 5시간 정도 더 가야한다. 송전철탑을 지나 오르막 헬기장을 지나면 내리막이고 다시 가파른 오르막을 치고 오르면 드디어 상월산(上月山.970m)이다. 강원도 정선군과 동해시 신흥동에 걸쳐 있으며, 암봉 암릉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옆에는 대단애(大斷崖, 크게 깎아 세운 듯한 낭떠러지)가 있으며, 동쪽으로는 깎아 지른 절벽이다. 동쪽으로 동해바다가 멀리 보이고 북쪽으로는 백봉령으로 오르는 고갯길이 보인다. 지나온 두타, 청옥, 고적을 뒤돌아보면 가히 영동의 명산이라 불러도 전혀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빼어난 산세다. 정상에는 나뭇가지가 모두 말라버린 고목이 한그루 서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안타깝게 한다.

상월산에서 내려서면 이기령을 지난 백두대간 분수령은 진회색으로 빛나는 벼랑이 바다와 환상적으로 어우러진 원방재(720m)에 도착한다. 동해 관촌마을에서 정선군 임계면 가목리를 잇는 고개다. 고개를 사이에 두고 부수베리 계곡이, 관촌마을에서는 서학골계곡이 흐른다. 서학골이라는 이름은 학이 둥지를 틀고 살았던 데서 비롯됐다. 원방재를 지나 크고 작은 봉우리를 힘들게 넘으니 백봉령 1.3km를 알리는 표지판을 만나고 마지막 920봉을 넘어 굴곡이 없는 순한 길 따라 올라서니 목책이 처져 있고 의자 두 개가 놓여 진 쉼터이자 전망대에 이른다. 바로 눈앞에는 송두리째 파 헤쳐진 자병산의 채석장이 볼썽사납게 바라보인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것은 우측으로 끝없이 펼쳐진 망상해수욕장과 동해바다가 한 폭의 그림같이 아름답다.

 

 

 

 

 

 

 

 

 

 

 


동해 해안선의 북단은 망상(望祥)이다. 고운 모래가 깔린 해안은 넓고도 길다. 그래서 저 유명한 강릉의 경포대 해수욕장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망상의 옛 이름은 마들, 망성이, 마루뜨루, 한자로는 마상(馬上), 마평(馬坪), 마상평(馬上坪)이라 했다. 군사들이 말을 기르고 말달리기 훈련을 하던 넓다란 들판이라는 뜻이라 한다. 그러던 것이 어찌하여 한자로는 전혀 연관 지울 수 없는 지금의 망상(望祥)으로 불리게 된 것일까. 여기에는 ‘관동별곡’을 지어 영동지방과 친숙한 송강(松江) 정철(鄭澈.1537~1593)의 연애담에 얽힌 일화가 전해진다. 강원도 감찰사로 부임한 송강은 관동지방을 순회하던 중 삼척에 들렀을 때 수청 들었던 젊고 아리따운 기생 소복(小福)이 마음에 들었다. 송강은 나중에 삼척에 왔을 때 소복을 찾았으나 그녀가 강릉의 마들(현재의 망상동)에 사는 유생 최근축에게 시집갔다는 말을 듣고 장탄식을 하였다. 송강은 강릉을 지나다 마들을 바라보며 시를 읊었다. ‘상(祥)서러움을 바라고(望) 찾아온 마을에서 지난날의 추억을 떠나보낸다’ 는 내용에서 망상(望祥)으로 바뀌게 되었다 한다.

망상해수욕장과 함께 동해의 명물인 추암(湫岩)을 만나보자. 촛대바위, 칼바위, 형제바위 같은 기암괴석으로 유명한 추암은 예로부터 해금강으로 불렸는데 한명회(1415~1487)가 강원도 관찰사로 있을 때 빼어난 경관을 흠모해 능파대(凌波臺)라 칭한 곳이다. 애국가의 배경화면으로 더욱 유명한 촛대바위 옆에서 추암에 얽힌 전설을 들어보자. ‘옛날 바닷가에 살던 한 남자가 어느 날 소실을 얻었는데, 그날부터 여인들의 투기가 시작 되었고 이를 보다 못한 하늘이 벼락을 내려 남자만 살려 두었는데 그것이 지금 홀로 남은 추암의 촛대바위다’ 기암괴석이 좌우로 늘어서 사람이 눕기도 하고 비스듬히 서 있기도 하는 것 같고 또는 호랑이가 꿇어 앉는 것 같기도 하고, 용이 꿈틀거리는 것 같이 천태만상을 이뤘으며, 소나무가 우거져서 그 사이로 비치니 참으로 위대한 조물주의 작품이라 하겠다.

강릉 경포대와 통천 총석정과 그 경치가 난형난제이며 기이한 점은 이곳이 더 좋다. 그 앞에 자리한 해암정(海岩亭)은 고려 공민왕 원년(1532년)에 통천 군수를 지낸 심동로(沈東老)가 벼슬을 버리고 내려와 풍류를 즐기던 곳이다. 삼척 심 씨의 시조인 그는 해암정과 삼척 죽서루를 오가며 시를 짓던 가객이었다. 뒷문을 활짝 열면 바위 너머로 기암괴석과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명당이다. 832봉과 헬기장을 지나 철탑을 끼고 내려서면 오늘에 날머리인 백봉령(百鳳嶺, 780m)이다(16시20분). 백봉령 고갯길을 넘으면 강원도 정선고을이다.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 잘라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든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아리랑 고개로 나를 넘겨주소’

애잔한 정선아리랑 노랫가락 울려 퍼지는 정선은 산골마다 화전민들이 움을 틀고 신산한 삶을 이어 가던 오지 중의 오지였다. 조선 건국 무렵 고려의 충신들이 정선의 남면 거칠현동으로 옮겨와 은거하면서 겪었던 고난의 심정을 정선에 구전되던 토착 민요에 의탁에 불렀던 것이 정선 아리랑의 시원이라 한다. 유장하고 한스러우며, 단순한 한에 그치지 않고 승화의 차원까지 끌어 올렸다는 데 가치가 있다. 골지천과 송천이 몸을 섞는 아우라지는 남한강 천리 물길 따라 뗏목을 운반하던 뗏사공들의 아리랑 소리가 끊이지 않던 곳, 강 건너 산기슭에선 ‘ 아우라지 처녀’ 동상이 강물을 애타게 바라보고 있다.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 좀 건네주게/ 싸릿골 올동백이 다 떨어진다/ 떨어진 동백은 낙엽에나 쌓이지/잠시 잠깐 님 그리워 나는 못 살겠네~’

정선아리랑 중에서 대표적인 가사다. 사랑하는 사이였던 여랑리의 처녀와 구절리 너머 유천리에 사는 총각이 마을 사람들의 눈을 피해 어느 날 싸릿골로 동백을 따러 가기로 했다. 그런데 전날 밤에 내린 폭우로 강물이 불어 나룻배가 건널 수 없게 되었다. 두 연인은 애타는 연정을 품은 채 발만 동동 구를 수밖에 없었다. 위의 가사는 강을 사이에 두고 만날수 없는 안타까운 여인의 마음을 아라리에 실어 읊은 것이다. 당시 이 강의 뱃사공이면서 장구도 잘 치던 ‘지장구 아저씨’가 이들의 사이를 눈치 채고, 대신 두 사람의 심정을 아리랑에 담아 낸 것이라고도 한다. 아우리 처녀는 오늘도 아우라지 강변을 애잔하게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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