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첫 도읍지 졸본성, 시조인 주몽이 세운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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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첫 도읍지 졸본성, 시조인 주몽이 세운 나라
  • 한관우 발행인
  • 승인 2011.09.08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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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민족의 역사, 애환 서린 만주벌 1만5000리 대장정

항일독립운동의 현장을 가다 <2>

우리민족의 역사와 애환은 광활한 중국대륙의 만주벌에 그대로 숨 쉬고 있다. 우리민족의 역사에서 고조선, 고구려, 발해 역사의 발상지로 일제 강점기에는 항일투쟁의 본산지로 수많은 애국선열들이 조국독립을 위해 투쟁했던 현장이기도 하다. 지금까지도 아픈 역사의 상흔을 그대로 간직한 채 그 자리에 있다. 다만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찬란했던 우리의 고대역사가 짓밟히고 있는 흔적이 역력했다. 이곳 항일독립투쟁의 역사현장을 지난 8월 9일부터 20일까지 11박 12일의 일정으로 홍성지역 중고등학생들과 함께 청산리 전투의 영웅 백야 김좌진 장군의 항일 사상과 선열들의 숭고한 독립정신의 숨결을 느끼기 위해 중국 대장정에 나섰다. 충청남도와 홍성군, 홍성교육지원청이 주최하고, 한국스카우트충남연맹(연맹장 조기준) 홍성지구회(회장 이상근)가 주관한 청산리 전투 승전 91주년 기념 백야 김좌진 장군 청산리 역사 대장정은 홍성지역 중·고등학생 65명과 교사, 임원 등 83명이 함께했다. 본지는 중국 동북3성(길림성·요령성·흑룡강성) 일대에 산재된 우리의 역사유적과 독립투쟁의 현장 등 민족의 영토와 삶의 현장을 소개한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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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본성

 

 


중국은 널리 알려진 대로 등소평에 의해 개혁개방의 길로 들어선 이래 이제 경제적으로 성공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북한 또한 이 같은 개방의 필요성을 이미 느끼고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한 모험적 실험의 대상이 되었던 곳이 바로 북한의 신의주특구다. 혹자는 개혁개방으로 인해 성공의 길을 걷고 있는 중국이 많은 한국의 기업가들이 중국에 투자하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이 추진하는 신의주경제특구는 이러한 과정에 차질을 빚을 수 있기 때문에 취한 조치였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이것이 중국의 의도된 정책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 미묘한 시점과 관련해서는 여운을 갖게 하는 것이다.

중국 단동에서 환인으로 향하면서 너른 벌판과 시골마을을 지나치며 끝이 안 보이는 들판보다는 얕은 야산과 너른 벌판에 끝없이 심어진 옥수수 지대가 이어진다. 작고 허름한 시골집의 마을을 계속 지나는 동안에도 그 넓은 벌판에 심어진 것은 대부분 옥수수다. 환인으로 가는 동안 조랑말이 끄는 우마차나 도로를 점거한 채 소떼를 몰고 가는 목동도 가끔 볼 수 있다. 수십 년 전에 우리의 시골에서 볼 수 있었던 그런 풍경들이기도 하다.

만주벌판은 우리들의 가슴속에 그리고 고난의 역사 속에 각인되어 있는 곳이다. 만주벌판으로 설명되는 중국의 동북지역은 우리의 옛 고구려의 화려한 역사의 무대이자 중국사에 있어서도 요나라, 금나라, 청나라가 일어나고 수많은 이민족과 중국의 한족간에 끝없는 쟁탈이 이루어진 곳이다. 또한 이곳은 중국과 일본의 패권다툼을 통한 청일전쟁의 현장이자, 청나라가 무너지고 마지막 왕 ‘부이’가 일제에 의해 정권이 수립된 중국 역사의 비극의 현장이기도 하다. 그리고 우리민족에겐 항일운동의 거점지로 마치 역사의 소용돌이가 이 만주벌판에서 모두 일어난 것처럼 만주벌판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동북아시아에서의 세력 다툼은 격랑의 역사를 만들어 놓은 셈이다. 지금 이곳에 흩어져 사는 조선족 교포가 200만에 이르고, 간도협약이라는 미제의 숙제가 남아있는 곳이다. 그래서 정서적으로 옛 고구려 영화의 흔적을 계속 반문하여 찾아가는 듯하다. 넓디넓은 옥수수 밭이 이어지는 만주벌판의 남단을 달리면 소리쳐 부르던 ‘광야에서’라는 노래의 ‘만주벌판’을 지나고 있다는 것이 실감이 난다. 오늘은 홍성의 중·고등학생들이 부르는 ‘독립군가’와 ‘압록강행진곡’이 너른 만주벌판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단동을 출발해 버스로 네다섯 시간 달려와 만난 곳은 환인현(桓仁縣)이었다. 환인현은 중국 북부 요령성의 만주족자치주로 인구는 30여만명에 이른다. 환인시내 중심가를 벗어나자 저 멀리 우뚝 솟은 바위 절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곳이 바로 고구려의 첫 도읍지인 졸본성<사진 위>이다.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이 나라를 세우고 최초로 쌓은 성이다. 졸본성은 BC 37년부터 국내성으로 천도한 AD 3년까지 40년 동안 고구려의 수도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중국은 산 정상에 있는 천지(天池)라는 연못에서 다섯 명의 선녀가 목욕을 했다는 전설을 내세워 졸본성의 이름을 오녀산성으로 바꿔 부르고 있다. 이곳은 지난 2004년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1986년에 구구려 유물이 발굴되고 주위에 수많은 무덤이 발굴됨에 따라 고구려 초기 도성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해발 800여m의 산꼭대기에 세운 졸본성은 남·서·북벽이 100여m 정도의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이루고 있는 천연요새다. 굳이 성벽을 쌓지 않아도 적들이 접근할 수 없는 철옹성이다. 따라서 고구려는 남동쪽 일부와 동쪽에만 성벽을 쌓았다. 지금도 당시에 쌓은 성벽이 2000여년의 장고한 세월을 견딘 채 고구려의 훌륭한 축조 기술과 기개를 엿볼 수 있다. 이곳을 오르기 위해서는 단연 급경사에 설치된 999개의 돌계단을 올라야 한다. 정상에 올라서면 환인시내와 주변지역이 한눈에 들어와 주몽이 왜 이처럼 높은 곳에 도읍지를 정했는지 그 이유를 금방 알 수 있다.

 

 

 

 

 

 

 

 

 

오녀산성

 

 


고구려의 첫 수도 ‘졸본성’이 지금은 ‘오녀산성’?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자인데, 뒤쫓는 군사가 있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주몽이 북부여의 일곱 왕자의 추격에 쫓겨 오리, 마리, 협부 세 사람과 함께 송화강 유역인 엄리대수(奄利大水)에 이르러 길이 막히매 하늘을 향하여 울부짖으며 한 말이다. 이때 갑자기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강을 건너게 했다. 그리하여 비류수(혼강=졸본천)에 이르러 도성을 짓고 기원전 37년에 고구려를 세웠으니 그 곳이 졸본(卒本)이었다. 졸본은 토양이 비옥하고 산과 내의 지세가 험하여서 다른 부족들의 침입을 막기에 용이해서였다. 졸본은 환인(桓仁)에서 10km 북쪽에 있는 지금의 오녀산성(五女山城)을 말한다. 오녀산성은 비류수 골짜기의 홀본(졸본) 서쪽 산 위에 쌓은 동화 속에서나 볼 수 있는 잠수함 같이 생긴 사방이 깎아지른 절벽의 천연적으로 이루어진 성이었다. 산성(五女山城)은 남북 1000m 동서 300m, 성벽의 높이는 5~6m로 정상은 넓고 평평한데 거기에 천지(天池)라고 하는 연못이 있고 근처에 많은 사람들이 먹을 수 있는 샘이 있는 천연의 요새다. 주몽은 이곳 환인지역 졸본에서 백성을 다스렸다고 전한다. ‘한단고기’에 의하면 주몽 시절의 고구려 연호가 다물(多勿)이다. ‘다물(多勿)’이라는 말은 고구려 말로 ‘옛 땅을 회복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옛 땅은 물론 고조선과 부여의 땅이니 그것을 되찾는 것이 고구려의 건국이념 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졸본성이 왜 오녀산성(五女山城)이란 이름으로 바뀌어 전해 올까?

오녀산성은 고구려의 수도인 집안과 서쪽지방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대에 위치했다. 산성의 동문 터에서는 성벽이 서로 엇갈리면서 한쪽 벽이 다른 쪽 벽을 모나게 감싸서 옹성(甕城)을 이루었다. 이런 형식은 오녀산성과 국내성에서만 보이므로 고구려 옹성으로서는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인 듯하다. 성안에는 천지라고 하는 못이 있고, 이 못의 물은 마른일이 없다고 한다. 못은 동서로 긴 장방형인데 그 크기는 동서의 길이 12m 남북의 너비 5m, 깊이는 2m 정도 된다고 한다. 못은 암반을 깎아낸 다음 변두리에 큼직큼직한 막돌을 쌓았으며, 지면에 나타나는 부분에만은 네모나게 잘 다듬은 돌을 쌓았다. 못의 북쪽 벽 가운데에는 물이 빠져나가는 구멍을 만들었고, 서남 모서리밖에는 이 못과 연결된 조그마한 샘을 팠다. 이 샘 역시 못에 쓴 돌과 같은 잘 다듬은 돌로 쌓았다. 광개토대왕릉비에는 추모왕(鄒牟王)이 비류곡(沸流谷)의 홀본(忽本) 서쪽의 산 위에 성을 쌓고 도읍을 정했다고 한다. 이곳 오녀산성이 이때에 쌓았다는 견해도 있으나 고고학적인 뒷받침이 되어 있지 않다고 한다. 특징은 전형적인 고구려의 축성법인 굽도리식축조공법이 이용됐다는 점이다. 굽도리축조공법이란 굽도리를 조성할 때 계단식으로 경사지게 쌓는 방법으로 산성에서는 협곡에 쌓을 때와 높은 성벽을 축조할 때 많이 적용되었다. 이 축조방법의 기본은 높은 성벽을 보다 견고하게 하기 위하여 성벽의 굽도리부분을 밑에서부터 위로 올라가면서 성돌을 약간씩 뒤로 물려 쌓는 것이다. 또 고식(古式)의 옹성형태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들고 있다.

우리민족의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곳, 고구려의 첫 도읍지 졸본성의 웅장한 위용은 거대한 암벽으로 이루어진 산의 정상에 산성을 쌓아 만들었다. 유사시에는 이 산성으로 올라가고 평상시에는 산성 밑의 환인분지에서 농업 등을 하며 도읍을 지킨 조상들의 지혜가 그래서 더욱 빛나고 있다. 그런데 중국은 ‘졸본성’의 이름을 아예 ‘오녀산’으로 바꾸어 부른다. 설화 같은 이야기에 근거했다고 하니 엉터리치고는 상 엉터리며, 허구일 뿐이다. 이곳은 분명히 북방을 호령하던 고구려의 첫 도읍지였으며, 수도로서의 역사적인 의미가 더 큰 곳임은 삼척동자도 다 안다. 중국은 고구려라는 이름자체를 의도적으로 묻어버리려는 의도로 오녀산성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 옛 역사에 대한 흔적과 기억은 자연적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명심할 일이 바로 이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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