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남원, 1300여년의 세월을 이어온 역사문화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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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남원, 1300여년의 세월을 이어온 역사문화도시
  • 취재=한관우·김경미 기자
  • 승인 2020.10.12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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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역사를 담은 땅, 지역의 정체성과 미래를 묻다 〈5〉
덕음정 원각사 전망대에서 바라본 남원시 전경.

전북 남원은 조선왕조 500년의 이야기를 고루 담고 있는 유적지 많은 곳
1300여년 세월동안 남원이라는 지명은 한 차례도 바뀌지 않아 역사 깊어
역사의 고비마다 불의에 대항, 역사를 바로 세운 사람들도 전라도 사람들
고려와 조선시대 대부분의 제사용 또는 생활용 목기제품을 남원에서 생산

 

지리산의 능선을 끼고 있는 전라북도 남원은 춘향전의 배경이 된 곳으로 유명하다. 전통시대의 남원은 전라좌도의 수부(首府)로 그 역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특히 전라도와 경상도의 경계에 있으면서 지리산의 정신사 또는 저항사와 밀접한 관련 속에서 역사를 전개해 왔다. 따라서 내륙에 위치해 있으면서 바깥 세력에 시달려 왔다고 볼 수 있으며 주민들의 저항적 기질이 결부돼 정체성이 생성됐다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역사문화를 담은 도시는 여러 도시가 있겠지만, 전북 남원은 조선왕조 500년의 이야기를 고루 담고 있는 곳이다. 최근 역사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여행지 또한 역사 유적지를 찾는 경우가 많아졌다. 1300여년의 세월동안 남원이라는 지명은 한 차례도 바뀌지 않았을 정도로 남원의 역사는 깊고 길다. 춘향전의 성춘향과 이몽룡의 사랑의 도시로도 유명하지만, 사랑이야기보다 깊숙이 담겨진 조선의 또 다른 이야기가 남원의 정체성을 지키는 중심에 있다.
 

■ 소외와 한을 예술로 승화한 사람들
조선왕조 500년의 가장 큰 사건 중 하나는 바로 왜란일 것이다. 만인의총은 정유재란(1597)때 남원성 전투에서 순절한 1만여 의사들의 호국의 얼이 서려 있는 곳이다. 홍살문, 충의문, 성인문, 충렬사까지 지나면 한층 더 엄숙한 마음으로 만인의총에 다다르게 된다.

‘백의종군’하면 이순신 장군을 떠올릴 정도로 이순신과 백의종군은 떼려야 뗄 수 없다. 백의종군로는 이순신 장군이 억울한 모함으로 의금부에 하옥된 이후, 관직 없이 백의종군할 것을 명받고 초계(합천)에 있는 도원수부를 찾아가는 640km의 여정을 말한다. 또 향교는 고려와 조선시대 중추적인 교육기관 역할 뿐 아니라 지역사회의 구심체 기능을 했다. 역사와 문화, 충절의 도시 남원, 그 중심에도 남원향교가 있었다. 1410년(태종 10년)에 건립돼 610년의 역사가 있는 남원향교는 화려하지는 않지만 정갈한 조선의 건축물들이 조용히 반기고 있다. 외삼문을 지나 명륜당에 다다르면 반 누각의 형태의 아름다운 건물이, 마치 선비가 아닌 신선을 배출해 냈을 것 같은 분위기다. 유형문화재로도 지정돼 있는 대성전에는 공자의 위패가 놓여있으며, 봄과 가을에 역대 현인들의 제사를 올리고 있다고 한다.

전라도 의기(義氣)는 조선 중기 문인 눌재 박상의 ‘비바람에 세상은 비록 어두운 것 같지만, 닭 우는 소리 새벽을 어기지 않네’라는 글귀가 상징적이다. 이는 박정희 독재시절 민주화 투쟁을 하며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고 역설한 YS(김영삼 전 대통령) 어록의 원작이기도 하다. 박상은 사림의 의리정신을 일깨운 ‘신비복위소’를 올린 장본인이기도 하다.

나라가 위기에 처하면 전라도 사람들은 분연히 떨쳐 일어났다. 임진왜란 최초 의병장 유팽로(옥과)를 비롯해 고경명(담양)·김천일(나주)·최경회(화순)·김덕령(광주) 등 셀 수 없이 많은 선비와 민초들이 의병을 일으켜 왜군과 싸우면서 목숨을 초개처럼 버렸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이런 호남을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란 말로 칭송하기도 했다.

이들 의병장의 후손인 고광순·기삼연 등은 300년 뒤 일제가 침입한 구한말 다시 떨쳐 일어섰다. 민초들은 동학사상으로 봉건과 외세에 맞섰다. ‘인내천(人乃天)-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평등사상을 설파한 동학은 ‘파리코뮌’에 앞서 자치기구인 ‘집강소’를 선보였다. 광주학생독립운동, 4·19혁명, 5·18민주화운동, 6·10민주항쟁 등 역사의 고비마다 불의에 대항하며 역사를 바로 세운 이들도 바로 전라도 사람들이다. 이러한 저항정신은 전라도를 피로 물들였고, 살아남은 자들에게는 ‘소외’와 ‘한(恨)’을 남겼다. 풍류와 멋을 아는 전라도 사람들은 소외와 한을 ‘예술’로 승화했던 것이다.
 

■ 저항의식 역사발전 기여 사회발전 동력
남원은 노략질을 하는 왜구와 영토를 침략한 일본군 등 외부의 침입에 대항해 처절한 항전을 벌였던 곳이다. 특히 동학농민전쟁의 2차 봉기 때에는 경복궁을 점령하고 청일전쟁을 유발한 일본군을 몰아내려고 대규모로 참여했다.

한편 동학농민전쟁 첫 단계에서는 반봉건운동에도 누구보다도 강렬한 의지로 참여했다. ‘춘향전’에서 보인 부정부패를 일삼는 수령에 저항하고 기생의 신분차별을 벗겨내고 끝내 연안이씨 양반가문의 맏며느리(판소리 춘향가 참고)로 들어가는 줄거리는 바로 반봉건 반부패세력에 저항하는 모습이다. 사랑 이야기만이 아닌 시대정신을 반영한 것이다. 

이런 저항의식은 역사발전에 기여하고 사회발전에 동력이 됐다. 비리와 모순에 대해 순응하고 맹종하는 것은 역사발전에 도움을 주지 못한다. 해방과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지리산은 유격대의 근거지가 됐다. 남원에는 지리산의 입구에 11사단 등 전투사령부를 두고 유격대 토벌에 나섰다. 국군과 경찰, 청년단체의 부대가 출몰해 주민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겼다. 청년들은 토벌대에 동원돼 희생을 치렀으나 주민들은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양측에 시달려 많은 고통을 겪었다. 남원은 민족 비극의 현장이 됐던 것이다.

또한 이승만 독재체제에서 자행된 3·15부정선거 당시에는 투표함을 불태운 탓으로 철제 투표함으로 대치할 정도로 항거했다. 이런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정신이 김주열 열사의 의열을 불태웠을 것이다. 마산에서 부정선거에 항의해 학생과 시민이 시위를 벌일 때 경찰에 의해 고문 끝에 최루탄이 박힌 학생의 시체가 바다에서 떠올랐는데, 바로 김주열이었다. 김주열 열사가 남원출신의 학생이란 사실이 전국에 알려졌을 때 엉뚱하게도 마산에서 남원의 저항정신을 실증하게 됐던 것이다. 4·19정신의 상징적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이다. 오늘날 잘못된 과거사를 청산해 갈등과 분열을 그치게 하고 통합과 화해를 추구하고 있다는 명분도 생각할 일이다. 한국전쟁 시기의 여러 모순을 비롯해 서로 적대관계끼리 형성된 과거의 일을 화해하고 밝은 미래를 열어가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해 진정한 민주사회의 길을 열고 통일로 가는 길을 다져야 할 것이다. 과거에만 집착해 있게 되면 진정한 미래 시회를 열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남원정신의 역사성과 정체성도 여기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밖에도 남원은 천년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목공예의 도시이기도 하다. 한때 우리나라의 목기 제품이 거의 대부분 남원에서 만들어지기도 했다. 어떻게 인구 8만여명의 작은 도시 남원에서 이렇게 목공예가 발달하게 됐을까? 우선 남원은 산림이 가장 넓은 지리산 자락에 있었던 환경이 한몫을 했다. 드넓은 지리산의 다양한 종류의 나무가 목기산업을 발달시킬 수 있는 원동력이 됐던 것이다. 남원의 목기는 신라시대 흥덕왕 때 세운 실상사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신라시대에는 실상사에 약 3000명의 승려들이 있었는데, 이 승려들과 주민들이 다양한 종교용 목기를 제작하면서 목공예 기술이 발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고려와 조선시대 때도 대부분의 제사용 또는 생활용 목기제품을 남원에서 생산했다고 한다. 특히 조선왕조 500여년 동안 궁궐의 모든 목기제품을 담당해 진상품으로 바쳐왔던 것이다. 이러한 점을 눈여겨본 일본인들은 일제강점기 때 한국의 목기와 기술을 일본에 보급하기 위해 남원에 ‘산내목공예기술학교’를 설립했던 것이다. 

이처럼 남원의 목기는 독특한 향과 섬세한 모양이 특징이다. 하지만 남원의 목기제품이 유명한 것은 외적인 디자인에만 있지 않다고 한다. 훌륭한 옻칠 기술과 품질이야말로 진정 남원 목기의 명성을 있게 한 요인이다. 옻칠을 더한 남원 목기제품들은 아주 튼튼하고 갈라짐 없이 오랫동안 쓸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품질 덕분에 남원목기가 조선시대 500여 년간 왕실과 전국의 목제품을 담당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 하나의 남원정신이며 정체성을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이 기획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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