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의병기념관 건립, ‘홍주성·홍주의사총’과 맞물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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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의병기념관 건립, ‘홍주성·홍주의사총’과 맞물려야
  • 글·자료|사진=한관우·한기원 기자
  • 승인 2022.11.26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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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홍주의병 발상지 홍주 〈4〉

충청남도가 ‘충남의병기념관’ 건립을 추진한다고 한다. 우선 정말 잘한 결정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일이다. 하지만 충남의병기념관 건립의 최적지를 놓고 몇몇 지자체가 치열하게 경쟁하면서 갈등이 커지는 양상이라고 한다. 충남지역, 특히 홍주지역 의병의 역사적 발자취를 기리는 의병기념관 건립인 만큼 상징성과 대표성이 있으면서 건립 취지에 맞는 곳에 건립되면 될 일이다. 경쟁하고 싸울 일이 전혀 아니다. 오히려 선열들의 정신인 충남의 정신을 오롯이 계승하고 살릴 수 있는 항일의병의 대표적 상징성이 있는 곳에 건립되면 시비할 일도, 논란이 될 일도 없기 때문이다. 나라가 어려움에 빠졌을 때 민중들이 스스로 나서 서로 협력하면서 하나로 힘을 모은 정신이 바로 충남의병, 즉 홍주의병의 전신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충남의병·홍주의병의 정신을 우리 후손들은 그대로 정신을 실천하면 되는 일이 아닌가?
 

■ 우리나라 3대 의총, ‘홍주의사총’
우리나라에는 3대 의총(義塚)이 있다. 홍성의 홍주900의총(洪州九百義冢)이라 불리는 ‘홍주의사총(洪州義士冢)’과 금산의 칠백의총(錦山七百義塚), 전북 남원의 만인의총(萬人義塚)이 바로 우리나라 3대 의총(義塚)이다.

우리나라 3대 의총(義塚) 중 한 곳인 ‘홍주의사총(洪州義士冢)’(충남 홍성군 홍성읍 의사로 79; 사적 제431호·2001. 08. 17 지정)은  조선말기(병오년) 홍주 지역에서 있었던 의병운동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희생된 분들의 유해를 모신 곳이다. 1905년 일본의 강압에 의해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홍주 지역에서는 1906년(병오년)에 전 이조참판 민종식이 채광묵, 박인기, 이만식 등과 농민과 유생, 관리를 중심으로 홍주성에 쳐들어갔는데 당시 홍성군수 이교석과 이주승도 처음에는 의병군에 호응할 기미였다가 일본군 다수가 입성한다는 소식을 듣고 성문을 닫고 입성을 막아 부득이 물러난 후 3월 22일에 재차 홍주성에 쳐들어갔으며 5월 19일에 홍주성을 함락시켰다. 이후 일본군이 5월 25일부터 홍주성의 의병군을 공격해 30일부터 본격전이 시작됐으며, 당시에 일본군 대포에 의해 조양문이 부서졌고 중과부적으로 의병 수백 명이 전사했는데, 그 시체가 대교리 일대의 냇가와 남산 일대에 흩어져 있었다고 전한다. 1949년 4월 5일 홍성군수 박주철과 홍성경찰서장 박헌교가 직원들을 인솔하고 현재 홍주의사총이 있는 부근에서 식수하다가 의외로 많은 유골을 발견했다.

옛 노인에게 설명을 듣고 병오항일의병 시에 전사한 의병군의 유골이 임시 매장된 것으로 판명돼 충청남도에 그 사실을 보고하고 도비를 지원받아 유골을 모아 이곳에 합장하고 분묘를 조성해 현재의 모습이 있게 했다. 1992년 구백의총(九百義塚)이란 이름이 ‘홍주의사총(洪州義士冢)’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홍주의병의 핵심적 연구자료인 ‘홍양일기’와 ‘홍양기사’ 등의 자료를 종합해 볼 때, 홍주성 전투에서 희생된 의병 전사자는 최소한 98명, 많게는 수백이라는 기록이 확인됐다. 사당인 ‘창의사(彰義祠)’에는 ‘900의사’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어 ‘구백의총(九百義塚)’이라 했던 것을 1992년 ‘홍주의사총(洪州義士冢)’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매년 5월 30일 순국의사 추모제를 올리고 있으며, 을미의병으로부터 연면히 계승되어 온 한말 홍주의병의 호국정신을 기리는 중요한 유적이다.

충남 금산 칠백의총(錦山七百義塚; 사적 제105호)은 충남 금산군 금성면 의총리에 있는 조선 시대의 무덤과 사당으로 임진왜란 때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한 조헌, 고경명, 영규 대사(靈圭大師) 등 의사(義士) 700명의 유해를 합장한 곳이다. 1592년(선조 25) 8월 1일 조헌(趙憲)의 의병과 영규(靈圭)의 승병이 합군해 청주성을 수복했다. 이어 8월 18일 남은 7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금산으로 진격, 고바야카와(小早川隆景)의 막강한 왜군과 혈전을 벌여 전원이 순절했다. 4일 후인 22일 조헌의 제자 박정량(朴廷亮)·전승업(全承業) 등이 시체를 거둬 하나의 무덤을 만들고 칠백의총이라 했다.

1603년에 ‘중봉조헌선생일군순의비(重峯趙憲先生一軍殉義碑)’가 세워지고, 1634년(인조 12) 순의단(殉義壇)이 설치돼 제향을 올렸다. 이후 1647년 종용사(從容祠)를 세워 700의사의 위패를 모시고, 1663년(현종 4)에 ‘종용사’라는 사액(賜額)과 4결(結)의 토지를 내려 춘추제향에 쓰도록 했다. 순의단이 설치되면서부터 각 지방 수령과 유생의 성금과 의연금이 답지해 옆에 강당인 종용당(從容堂)도 건립했다. 일제강점기인 1940년에는 일본인들이 진화사(進化社)를 만들어 사우(祠宇)와 의총을 허물고 일군순의비를 폭파한 뒤 제토(祭土)를 강제로 팔아버렸다. 광복 이후 1952년에 군민이 성금을 모아 의총과 종용사를 재건했다. 1970년 박정희 대통령 시절, 국가에서는 경역을 2만 2800평으로 확장하고 종용사·기념관·순의탑 등을 새롭게 건립해 사적으로 지정했다.

전북 남원의 만인의총(萬人義塚; 전북 남원시 만인로 3, 사적 제272호·1981.04.01 지정)은 정유재란(1597)때 남원성 전투에서 순절한 민·관·군 1만여 의사들의 호국의 얼이 서려 있는 곳이다. 임진왜란(1592)때 호남을 침범하지 못해 승리하지 못했다고 판단한 왜군은 1597년 11만 대군으로 다시 침략, 적의 우군은 전주성을, 좌군과 수군 5만 6000명은 남원성을 공략했다. 조정에서는 남원성을 사수하기 위해 전라병사 이복남이 이끄는 1000여 군사와 명나라 부총병 양원의 3000 병사로 하여금 남원성을 지키게 했다. 그러나 목숨을 건 치열한 전투를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중과부적으로 주민 6000여 명을 포함한 1만 여 의사들은 분투 끝에 장렬하게 모두 순절했다. 전쟁이 끝난 뒤 피난에서 돌아온 성민(城民)들은 시신을 한 무덤에 모시고 1612년(광해 4년) 충렬사를 건립했다. 몇 번의 이전을 거쳐 호국선현 유적 정화사업의 일환으로 박정희 대통령 시절, 정부의 지원과 전북도민의 정성 어린 헌수로 1971년 정화사업을 시작, 1979년 정화를 마치고 충렬사에는 50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만인의총에서는 매년 9월 26일에 만인의사에 대한 제향을 올려, 그 숭고한 뜻을 기리고 있다.
 

■ 충청의병 상징 ‘홍주성’과 ‘홍주의사총’ 
홍주는 1896년과 1906년 전국 최대 규모의 항일의병투쟁이 두 차례나 일어났던 역사의 현장이다. 그곳이 지금의 홍성이다. 홍성에는 홍주성 전투의 현장이었던 ‘홍주성(洪州城)’이 의연하고, 900명이 넘는 의병들의 넋이 잠들어 있는 곳이 바로 우리나라 3대 의총 중 한 곳인 ‘홍주의사총(洪州義士冢)’이다.

1896년의 제1차 홍주의병은 1896년 11월 청일전쟁 후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홍주(홍성)의 김복한, 이설, 홍주향교 전교 안병찬 등의 선비들이 의병을 일으켰고 청양의 선비들이 이에 합세해 홍주성을 점령했다. 김복한은 의병장으로 추대돼 충남 홍주부 관할 22개 군과 홍주군내 27개 면에 통문을 띄워 의병을 모집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홍주관찰사 이승우의 배반으로 지도부가 체포되면서 실패하고 만다. 1906년의 제2차 홍주의병은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으로 망국이 눈앞에 이르자 홍주의 안병찬, 박창로, 이세영 등은 1906년 3월 11일 정산의 전 참판 민종식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부여의 지티에서 의병을 결집해 남포전투에서 승리하고, 5월 19일 홍주성을 점령해 일제를 놀라게 했다.

이에 이토오히로부미 통감은 공주의 경찰대와 수원의 헌병부대를 증파해 홍주성을 공격했고, 홍주성안의 의병이 공격을 막아내며 성을 굳게 지키자 다시 조선주차군 사령관 하세가와에게 명해 용산에서 보병 2개 중대, 기병 소대, 전주수비대 1개 소대를 증파해 경찰과 헌병, 진위대 합동으로 홍주성을 포위 공격했다. 결국 일본의 막강한 화력을 동원한 정규군의 총공세에 막대한 희생을 치르고 후일을 기약하며 흩어졌다. 5월 31일 홍주성을 점령한 일제는 6월 7~9일경까지 열흘 동안 수색과 무자비한 탄압을 자행했다. 6월 14일 주차군 참모장은 학살 83명, 피체 154명으로 보고했으나 홍주의병의 유병장 유준근 일기에는 의병 300명이 순국한 것으로 생생히 기록하고 있다.

결국, 홍주의병 항쟁에서 순국 산화한 900여명의 넋들이 현재 홍주의사총에 모셔져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홍주의병과 희생된 의병들의 중심은 단연 ‘홍주의사총’과 ‘홍주성’일 수밖에 없다. 홍주의병은 충남인의 선비정신과 의리정신, 끈질긴 절의정신과 항일투쟁정신을 상징하고 있다. 지금의 홍성은 일제에 의해 강제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전국에서 가장 치열했던 홍주성 의병항쟁의 중심지이며, 예산, 당진, 서산, 아산 등 내포지역 행정과 군사적 요충지로 충청의 선비들과 민중들의 끈질긴 충의정신과 절의정신, 항일독립정신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곳이다.

충남의병·홍주의병을 대표적으로 상징하고 기념하는 일도 충남과 내포지역 의병항쟁 전체를 기념하는 대표성을 스스로 갖는 곳도 바로 ‘홍주의사총’과 ‘홍주성’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이곳에 순리적이고 자연스럽게 ‘충남의병기념관’이 들어서 의병정신을 계승해야 하지 않을까. 홍성과 예산의 최영 장군, 성삼문 선생, 추사 김정희 선생, 백야 김좌진 장군, 만해 한용운 선사, 매헌 윤봉길 의사는 우리가 또 다른 시각과 차원에서 또 다른 격에 맞는 헌양사업 등이 이뤄져야 할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할 일이다. 따라서 충남의병기념관 건립문제는 지역보다는 대표적 상징성이 반드시 고려돼야 할 일이다. 충남의병, 홍주의병과 직접적 연관성이 있는 ‘홍주성’을 비롯한 ‘홍주의사총’ 등과 연계되거나 맞물리는 대표적 상징성과 당위성의 전제가 제기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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