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 같았던 ‘석면’ 조용한 재앙으로 닥쳐올 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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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같았던 ‘석면’ 조용한 재앙으로 닥쳐올 줄은”
  • 취재·사진=한기원·김경미 기자, 자문=예산홍성환경운동연합 신은미
  • 승인 2023.11.05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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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대 석면피해지역 충남, ‘석면피해기록관’을 세우자〈9〉
1950년대 중후반경 8~9세의 어린 나이에 석면일을 했던 안계신 씨와 좌측엔 부인이다.

청양지역 석면피해자 안계신 씨

■ 깨진 원석 속 석면 모아 돈 벌어… 광산일로 번 돈으로 공책 구입해
청양군 비봉면에 거주 중인 안계신(79) 씨는 1950년대 중후반 비봉광산에서 돌을 깨 석면을 골라내는 작업을 4~5년간 했다. 2018년 가래침에 피가 섞여, 병원에 방문한 그는 폐암을 진단받았다.

청양군 비봉면 강정리, 과거 비봉광산 자리에서 가동되는 폐기물중간처리업체를 돌아 갈망골로 진입하면 바로 보이는 저수지 위에 안 씨가 거주하는 자택이 위치한다. 폐기물중간처리업체와의 직선거리는 500m가 조금 넘는다. 안 씨는 지금과 같은 도로가 없던 시절, 갈망골에서 고개 하나를 넘어 석면광산으로 일을 다녔다.

처음 일을 시작한 때는 여덟, 아홉 살로 기억한다. 농사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하기 어렵던 시절, 집에서는 학교 다닐 때 필요한 학용품을 사줄 형편이 되지 못했다.

모두가 궁핍하게 살던 때 한 푼이라도 벌 수 있었던 석면광산은 모두에게 좋은 기회였다. 외지에서도 왔고, 막사 형태의 기숙사에 살면서도 일을 했다. 인근 마을 사람들도 일거리만 있으면 너도나도 다녔고 안 씨의 형도 다녔다. 안 씨 또한 광산으로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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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양 비봉면 강정리 안계신 씨 석면광산서 4~5년 간 일해
60여 년 후, 피 섞인 가래침 나와 검사해 보니 ‘폐암’ 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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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는 주로 청년, 중년 남성들이 다이너마이트 따위의 화약으로 굴을 뚫는 행위인 ‘남포질’을 하고, 석면원석을 안에서 캐서 ‘구루마’로 싣고 밖으로 꺼냈다고 한다. 원석을 밖에 쏟아 놓으면 안 씨 또래의 어린이 혹은 소녀와 부인들이 돌을 골라 주운 후 자귀 망치로 깼다. 

깬 원석 사이에서 석면을 골라내 뭉쳐서 수집상들에게 가져다주면 선별한 양만큼 돈을 받았다. 지금은 얼마를 받았는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안 씨는 번 돈으로 공책을 사는 데 썼다.

없는 살림살이, 단 몇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한 생존투쟁의 공간이 바로 석면광산이었다.

“캐 나오면 서로 이제 좋은 놈 차지하려고 골라. 그 섬유줄 배긴 거. 서로 뺏고 막. 굵은 것도 있었어. 그런 놈 차지하려고. 근데 원체 자질한 게 많아요. 아주 자질한 거. 어쩌다 이렇게 이 정도만 돼도 막 노다지지. 그러면, 그걸 차지하려고 막 달려들고 그랬지.”

그에게 광산은 위험하고 힘든 노동의 공간이었지만 동시에 석면은 소중하고 귀한 것이기도 했다. 굴을 뚫기 위해 화약을 터뜨리면 감독이 위험하다고 멀리 떨어지라고 야단을 쳤다. 제대로 된 장비도 갖추지 못한 채 맨손으로 돌을 깰 때는 손 여기저기에 생채기가 났다. 하지만 석면은 불에 태워도 타지 않은 신비로운 놀잇감이었고, 석면이 굵게 박힌 돌덩어리는 학용품으로 환산할 수 있는 가치이자 친구들에게 자랑할 만한 보물 같은 것이었다.

“그때는 석면이 나쁘다는 것도 모르고 그냥 봉창에 넣고도 댕기고, 어쩌다가 굵은 놈 나오면 기분 좋아가지고 애들한테 자랑하고 그랬지. 석면줄이 굵은 돌맹이를 약정 서랍에다 넣어놨는디 나중에 보니께 없어. 갖다 버렸는지 없어. 찾다찾다 말았어. 하도 커가지고 가지고 있었는데….”

어린 학생에게 살림 밑천이자, 노동의 성과이자 자랑이었던 석면은 조용한 재난으로 닥쳐왔다. 4년 전, 가래침에 피가 섞여 나와 순천향대학병원을 찾아가 검사한 결과 ‘폐암’ 판정을 받았다. 석면이 위험한 물질이라는 것을 알게 된 때는 2013년쯤이었다. 비봉광산에 자리한 폐기물중간처리업체가 폐기물매립장 건설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주민 반대운동을 하다 석면이 위험하다는 걸 알게 됐다. 그 조용한 석면의 침략이 본인에게 암으로 나타났다.

안 씨는 두 차례 항암치료를 받았지만, 너무 힘들어서 치료를 포기한 상태다. 죽으면 죽었지 항암은 못 받겠다고 말한다. 대신에 예산 소재 병원에서 이따금씩 항생제 처방을 받고, 주기적으로 검진만 받는다고 한다. 석면으로 인해 질병을 얻은 피해자들에게 어떤 지원이 있었으면 좋겠냐는 물음엔 다소 체념한 모습을 보였다. 이제 소용없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리고 같은 말을 계속해서 반복했다.

“광산에서 일하던 사람 이제 나 하나 빼고 다 죽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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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양지역 석면피해자 권혁호 씨

석면광산 위 폐기물매립장 반대 주민대책위원회 사무국장 권혁호 씨.
석면광산 위 폐기물매립장 반대 주민대책위원회 사무국장 권혁호 씨.

■사문석 캐내려 다이너마이트 발파… 사방으로 튀는 돌덩어리 피하기도
권혁호 씨는 1982년 군 제대 후부터 집안 살림에 보탬이 되려고, 본인이 살던 강정리 마을에 있던 소규모 사문석 광산인 비봉광산에 나가 사문석을 선별하는 일을 했다.

사문석은 석면을 채취할 수 있는 원석이다. 백석면이 함유된 사문석은 그 자체로 제철, 제강산업의 용융제 원료, 건축 재료 및 장식용 석재, 비료회사의 용해성 인상비료의 원료 등으로 사용된다.

청양군에는 비봉면 강정리와 남양면 흥산리에 석면광산이 소재했다. 비봉광산에서는 일제 강점기인 1930년부터 1982년까지 석면이 채굴됐다. 석면 채굴이 중단됐지만 사문석은 2014년까지 계속 채굴됐다.

권 씨는 학교 가는 길에 늘 비봉광산을 거쳐 갔다. 나지막한 산인 광산 주변에서 소 꼴을 먹이기도 하고 친구들과 함께 곱돌을 가지고 그림을 그리며 놀았다. 때론 학교에 가지 않을 적 더위를 피하며 친구들과 광산 안 굴에서 놀기도 했다. 권 씨에게 광산은 친구들과 일상을 함께하던 추억의 공간이었다.

광산 자리에서 사문석 채굴이 이뤄지고, 그곳에 건설폐기물 중간처리업체가 들어서면서 예전 석면광산의 흔적은 찾기 어려워진 상태다. 석면광산에서 일하던 어른들도 사라진 흔적처럼 세상을 떴고, 그들의 모습만 권 씨의 기억 속에 어렴풋이 남았을 뿐이다.

“어른들이 갱도에 들어가서 일하시고 막 나오시는 모습, 그런 모습들을 봤는데… 뭐라 그럴까 좀 남루하고 허름하게 그냥 나오시고 왔다 갔다 하시고 그랬던 것 같아요.”

권 씨가 했던 일은 채취된 사문석을 망치(오함마)로 깨 불필요한 원석을 제거하고 순수한 사문석만 선별하는 단순 작업이었다. 흰색 석면줄이 박힌 사문석을 채취하기 위해선 먼저 암맥에 굴을 낸다. 착암기로 돌을 깨서 굴을 낸 후 그 안에 다이너마이트를 설치해 발파를 한다. 큰 덩어리로 부서진 사문석을 중장비가 퍼내 광산 너른 마당에 깔아 놓으면, 그때부터 오함마를 든 광산노동자들이 돌덩이를 쾅쾅 두드린다. 필요 없는 돌덩이를 골라내 사문석만 모아 놓으면 중장비가 한데 모아 덤프트럭에 싣는다. 덤프트럭은 그 사문석을 ‘풍농비료’로 싣고 갔다고 한다.

사문석을 캐내는 과정에는 수많은 위험이 서늘하게 발톱을 숨기고 있었다. 다이너마이트로 암맥을 터뜨리면 크고 작은 돌 조각들이 사방으로 튄다. 발파에 앞서 공장 직원이 광산의 높은 언덕에 올라 발파한다고 소리를 지른다. 발파가 시작되면 쿵쾅거리는 시끄러운 소리가 나고, 권 씨는 사방으로 튀는 돌을 피해 차 밑이나 뒤에 잠시 숨는다. 때론 돌덩이가 인근 민가 지붕에 떨어지는 경우도 더러 발생한다.

“발파할 때 위험한 장면이 많이 있었죠. 돌이 튀어서 사람한테 날아오고 막 그런 위험한 장면들이 생각나요. 안전 조치나 이런 게 하나도 없으니까. 어디 차 밑에 숨어 있다든지 비켜 있다든지 그런 수준이었죠. 발파하면서 그 조각들이 심지어는 몇 킬로까지 날아가는 경우도 있었어요. 근방에 가까운 남의 지붕에 떨어지는 경우도 있었죠.”

권 씨는 기계를 다루는 재주가 좋아 착암기가 사문석 바위를 뚫을 때 바람을 일으키는 기계를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어도 잘 다뤘다고 한다. 바위를 뚫는 과정에서 손가락이 크게 다쳤는데,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말을 잇기 어렵고 울컥하게 된다.

권 씨가 사문석에 박혀있는 석면줄이 석면폐나 악성중피종을 일으키는 위험한 물질이었다는 점을 알게 된 건 2013년경이었다. 권 씨가 다니던 광산이 1990년대 중반 문을 닫고 나서 같은 자리에 건축폐기물 중간처리시설이 2001년에 들어섰다.

운영 회사가 세 차례 바뀌더니 업체가 폐기물매립장 조성을 시도했다. 권 씨는 폐기물 매립장 반대 주민대책위 사무국장으로 활동하면서 매립장 예정지인 광산 속 석면의 위험성을 알게 됐다.

이미 마을 주민들이 석면에 노출된 상태였다. 석면의 위험을 모른 채 사문석을 파쇄하는 과정에서 나온 찌꺼기를 마을에 길을 낼 때 깔았다. 축사나 주택을 지을 때에도 바닥 기초로 사문석 파편을 사용했다. 석면폐를 앓는 동네 아주머니는 석면광산 주변 밭에서 땅을 갈고 김을 맸다고 한다. 

권 씨 또한 사문석 선별과정에서 직접적으로 석면 분진을 흡입했을 것이다. 석면에서 안전했던 마을 주민이 없었다. 무엇보다 건설폐기물 중간처리업체 작업현장에 사문석 찌꺼기들이 널려 있고, 지금도 민가에 방치된 석면슬레이트도 있다고 권 씨는 말한다.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인 문제다.

이렇다 보니 폐기물 매립장 건설은 막았지만, 석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권 씨의 마음 한편에 턱 하니 걸려 있다.

“어쨌든 조금 그렇더라고요. 석면 문제를 이렇게 떳떳하게 터놓고 막 이야기하고 그런 건 좀 아닌 것 같더라고요. 지금 이런 문제를 알고 있는 세대에서 해결하지 못했다는 그런 어떤 자책감 그런 것들 때문에….”

그래서 권 씨는 이미 석면에 노출된 마을사람들과 이주해 떠난 주민들이 주기적으로 건강검진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마을에 도로를 까는데 사용하는 등 실생활에서 쓰인 사문석을 제거하는 데까지 후속 조치가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주민들 집에 보관됐거나 지붕에 설치된 석면 슬레이트를 공공이 나서 대대적으로 수거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실은 저희 친구 한 명도 오래 전에 소식을 들었는데 석면폐증이라고 하더라고요. 초등학교 때 저하고 똑같이 그 광산에서 놀고 했었으니까요. 석면질환이 언제 어떻게 나타날지 모르기 때문에 자세하게 지켜보고 건강검진이라든가 이런 것 좀 더 신경 써서 해줘야 될 상황인 것 같아요”

권 씨의 또 하나의 바람은 석면기록관을 만드는 것이다. 석면의 위험성, 석면이 일으킨 피해 등 다음 세대가 이를 기억할 수 있도록 관련 기록관이 만들어지면 좋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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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양 비봉면 강정리 권혁호 씨 석면광산서 사문석 선별작업
석면광산 사문석 선별과정에서 직접적으로 석면 분진 흡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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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권 씨는 석면 박물관 자리가 현재 건설폐기물 중간처리시설이 운영되는 곳이길 바란다. 석면광산 자리에 들어서려던 폐기물 매립장을 막아낸 과정을 남겨 다른 지역에 중요한 참고사례로 공유하기 위해서다.

“이런 사례들을 수집할 때, 어떤 것이 주민들한테 유익하며 어떤 것이 도움이 되는가를 알려주는 역할도 또한 필요한 것 같아요. 각 지역별로 그런 사례들을 좀 이렇게 수집을 해놓는 등 석면기록관 같은 것을 하나 만들면 좋을 것 같아요.”
 

청양군 비봉면 강정리 석면광산터.
청양군 비봉면 강정리 석면광산터.
강정리 마을 회관, 폐기물매립장 조성을 반대하고 있다.
강정리 마을 회관, 폐기물매립장 조성을 반대하고 있다.
강정리 마을회관에 폐기물매립장 조성을 반대하는 시위 사진이 붙어 있다​.
강정리 마을회관에 폐기물매립장 조성을 반대하는 시위 사진이 붙어 있다​.
청양군 비봉면에는 아직도 슬레이트 지붕이 많이 남아있다.
청양군 비봉면에는 아직도 슬레이트 지붕이 많이 남아있다.

 

<이 기사는 충청남도 지역미디어지원사업이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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