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천 지역의 독립운동은 마산면 신장리 만세운동으로 기독교도인 송기면, 송여직 형제 등이 주도해 시작됐다. 송기면은 기독교계 독립운동가 김인전이 세운 화양면의 ‘한영학교’를 다니며 근대교육을 받았다. 송기면은 1919년 3월 전국에서 독립만세운동이 벌어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한영학교 출신의 기독교도인 유성렬, 이근호, 임학규, 이동홍, 노형래, 하중호, 유일동과 신장 장날에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했다. 송기면의 형 송여직도 여기에 참여했다. 송기면과 송여직 형제는 23~27일 집에서 태극기를 200개 만들었다. 그리고 3월 29일 오전 11시 송기면은 태극기를 가마니에 숨겨 시장에 이르렀고, 주모자들과 함께 태극기를 나눠주며 만세운동을 시작했다. 마산면은 물론 장을 보러온 인근의 화양, 한산, 시초면의 주민도 동참했다. 송기면이 선두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치자 2000여 명의 주민들이 합세했다. 시위대의 위세에 위기를 느낀 일제 경찰은 송기면, 유성렬, 송여직, 나상준, 이근호 등 6명을 연행했다.
1919년 3월 29일 서천군 마산면 신장리 장터에서 2000여 명이 만세운동을 벌였다. 일제의 재판기록에는 “(시위대가) 경찰출장소에 돌을 던지고 혹은 장지문과 기물 등을 파괴했으며, 연행해 유치 중인 6명을 탈환해가고, 출장소의 기둥과 지붕만 남겨놓고 모두 파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시위대가 출장소를 공격해 연행자를 탈취해갔으며 건물을 거의 완파했음을 알 수 있다.
■ 송기면 주도, 서천 마산장터 만세운동
서천 마산장터에서는 3월 29일 송기면(宋箕勉)의 주도로 유성렬(劉性烈)·이근호(李根浩, 建浩)·임학규(林學奎)·이동홍(李東洪) 등이 시장 군중들과 함께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송기면은 3월 23일부터 동지를 규합하고,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의 준비 끝에 29일 마산 신장 장터에서 노형래(盧亨來)·하중호(河重鎬)·유일동(劉一童) 등과 함께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눠 주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독립만세 소리를 듣고 출동한 일제 경찰들은 주도 인사 송기면·유성렬·송여직 등을 체포해 연행했다. 그러나 이근호와 나상준(羅相俊) 등은 계속해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경찰출장소로 행진을 했다. 일제 경찰은 이근호와 나상준 등도 체포하면서 군중에게 해산을 강요했다. 이 과정에서 만세시위에 참여한 군중들은 2000여 명에 이르렀고, 군중들은 고시상(高時相)·양재흥(梁在興)·박재엽(朴在曄)·정일창(鄭日彰)·김인두(金印斗)·이승달(李承達) 등의 주도로 출장소를 파괴하고, 체포된 인사들을 구출했다. 서천에서 독립만세를 부르기 위해 이동하던 군중들은 마산과 서천의 경계에 이르러 헌병들의 매복 사실을 듣고 해산했다. 이 만세시위로 송기면 등 14명의 인사가 재판에 회부돼 징역 1년 3월에서 5년의 옥고를 겪었다. 연행에 분노한 시위대는 나상준, 고시상, 이동홍, 양재홍, 박재엽, 정일창, 김인두, 이승달 등의 선도 아래 경찰출장소를 공격했다. 출장소에 돌을 던지고 장지문과 기물을 파괴한 뒤 감금됐던 6명의 연행자를 빼냈다.
송여직 등 8명의 재판기록에는 “이동홍, 양재홍은 출장소의 유리와 장지문 등을 파괴하고, 박재엽은 군중의 선두에 서서 출장소에 침입 폭행하고, 고시상은 대들면서 (경찰의) 멱살을 잡았고, 정일창은 군중의 배후에서 선동 지휘하며 투석하는 등의 폭행을 했다”고 적고 있다. 시위대의 공격으로 주재소는 기둥과 지붕만 남은 채 모두 파괴됐다. 유치장에 갇힌 주모자 6명을 빼내 간 것도 큰 사건이었다. 일경의 발포로 부상자도 발생했다.
시위대는 만세운동을 더 펼치기로 결정하고, 한산을 거쳐 서천 시내로 행진했다. 마산면과 한산면의 경계에 이르렀을 때, 서천군수 권익채가 급히 말을 타고 와 ‘일제 헌병이 매복해 있다’며 해산을 요구했고, 시위대는 격렬한 항의 끝에 자진 해산했다. 주민들은 다음날에도 종천면 화산리에 모여 만세운동을 벌였다.
일본 경찰은 신장리 장터 만세운동 참가자들을 대거 체포해 태형을 가하거나 재판에 넘겼다. 만세운동을 주도한 송기면은 징역 1년 6월, 유성렬과 이근호, 임학규는 1년의 징역형에 처해졌다. 시위대를 이끌고 경찰출장소를 공격한 고시상, 양재홍, 박재엽, 정일창, 김인두, 이승달은 각각 3년, 송여직은 1년 6월, 나상준은 1년 형을 치렀다. 수십 명이 태형을 받았다.
서천 마산면 신장리 장터의 만세운동은 역사에 남을 만큼 치열했지만 기록은 많이 남아 있지 않다. 일제에 체포돼 재판을 받은 애국지사들에 대한 기록이 거의 전부일 정도다. 순국하거나 부상을 당한 사람의 인적사항도 전해지지 않고 있어, 이 때문에 독립유공자 인정도 못 받는 현실이다. 마산면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태를 맞은 수많은 애국지사의 숫자조차 알 수가 없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지난 1987년 서천 3·1운동기념비건립위원회와 동아일보사가 그날의 애국선열들의 숭고한 얼을 후세에 기리고 국민의 애국심 함양을 위한 산 교육의 장소로 활용하기 위해 이 비를 건립했다.
■ 이상재, 임시정부와 연계 독립운동 지원
한편 서천 지역 독립운동사에서 이상재는 독립운동가이자 계몽운동가로서 3·1독립운동의 정신적 기반을 제공한 독립운동의 사상적 지도자다. 이상재는 조선의 자주독립을 위해 신교육 운동과 사회운동을 전개하며 많은 독립운동가들에게 영향을 줬다. 3·1독립운동 당시에는 민족대표 33인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독립운동을 위한 연설과 조직 활동을 활발히 펼쳤으며,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계해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3·1독립만세운동은 한두 명의 지도자만이 이끌었던 것이 아니라, 학생, 여성, 종교계, 지식인 등 다양한 계층의 독립운동가들이 힘을 합쳐 만들어 낸 역사적인 사건이다. 이들의 헌신과 희생 덕분에 조선의 독립 의지는 세계에 널리 알려졌으며, 대한민국의 독립운동이 더욱 강력하게 지속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특히 광복 80주년에 충청 항일 독립운동가들의 애국애민정신이 재조명되는 가운데 청산리 전투의 백야 김좌진 장군, 중국 홍쿠공원의 윤봉길 의사, 아우네 장터의 유관순 열사, 만해 한용운 선사, 신채호, 손병희, 이상설, 이상재 등 수많은 충청 항일독립운동가들과 함께 말이다.
서천 출신의 월남 이상재(李商在, 1850~1927)는 1908년 황성 YMCA 종교부 총무가 됐다. 을사늑약이 체결된 1910년 전국기독학생회 하령회를 조직해 학생운동에 불을 지폈다. 1913년 항일 애국운동의 하나인 105인 사건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YMCA 총무 질레트가 국외로 추방을 당했는데, 후임으로 이상재가 총무직을 맡아 총독부의 집요한 매수 공작을 뿌리쳤다. 이후 조선중앙 YMCA를 비롯해 재일조선 YMCA, 경신, 배재, 전주, 광주 등 10개 YMCA를 규합해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를 조직하고 명예총무로서 젊은이들에게 독립정신을 높였다. 이상재의 이런 항일독립운동 움직임을 일제가 곱게 볼 리가 없었다. 일제는 이상재가 배후 인물로 활약했다는 점을 파악해 3개월간 옥살이를 시켰다.
드디어 1919년 3월,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에 앞서 2월 24일 천도교와 기독교의 종교 지도자들은 3월 1일에 ‘독립선언식’ 방식의 독립운동을 거행하기로 최종 결정했다. 3·1독립운동 거사는 명망가들의 불참으로 좌초 위기에 놓였으나, 조선의 대표적 종교 세력인 천도교와 기독교계가 손을 맞잡으면서 불씨가 당겨졌다. 막판 천도교의 최린과 기독교의 이승훈의 역할이 주효했다. 최린과 이승훈은 함태영 전 대한제국 판사 등 주요 인사들은 24일 밤 최린의 자택에서 비밀회동을 하고,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는 방식의 거사를 1일 오후 2시 서울 탑골공원에서 거행하기로 했다. 왜 하필 1일로 정했을까. 이유는 고종의 장례식인 3일을 피하되 국장을 보러 사전에 상경한 인파를 고려한 데 따른 것이다. 2일도 거론됐으나 일요일은 기독교의 주일인 점을 감안했고, 3일에 폭동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우려도 작용했다.
민족대표는 천도교와 기독교에서 각각 선정하되, 불교와도 연대하기로 결정했으며, 최린은 밤늦게 불교계 대표인 충남 홍성 출신의 만해 한용운 스님과 비밀회동을 하고 동참 의사를 확인, 3월 1일 거사를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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