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산물이 예술이 되는 순간 ‘루드비히스부르크 호박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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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산물이 예술이 되는 순간 ‘루드비히스부르크 호박축제’
  • <공동취재단>
  • 승인 2025.12.04 07:04
  • 호수 919호 (2025년 12월 04일)
  • 7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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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축제 포화시대, 지역성을 담은 축제로 변해야 한다⑬
유럽 가을을 뒤흔드는 호박의 마법
독일 루드비히스부르크 ‘호박축제’

지역축제를 둘러싼 논란과 비판은 해마다 반복된다. 과도한 상행위, 주민 동원, 유사 콘텐츠, 과장된 실적 등은 축제의 본질을 흐리고 있다. 축제는 관광을 넘어 지역 고유의 문화와 정체성을 담는 공공의 장이어야 한다. 이에 홍주신문을 비롯한 5개 지역언론이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2025 공동주제심층보도지원 사업을 통해 국내·외 축제 현장을 공동 취재·보도함으로써 지역축제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하고자 한다. <편집자주>

지역농산물이 세계적 축제 브랜드로 확장된 여정
예술·정원·농업의 결합이 만든 다층적 체험의 힘
머무르고 즐기게 하는 체류형 공간·프로그램 전략
지속가능한 지역생태계를 구축한 농업축제 모델


독일 남서부 도시 루드비히스부르크는 인구 9만명 남짓의 작은 도시다. 그러나 매년 8월 말부터 11월 초까지 이 도시는 유럽 전역에서 몰려드는 사람들로 바글거린다. 바로 세계 최대 규모의 ‘호박축제(Kurbisausstellung)’가 열리기 때문이다. 꽤 평범해 보이는 농산물인 호박이 어떻게 국제적인 축제 브랜드가 됐을까. 
 

작은 실험에서 시작된 축제, 
세계적 브랜드가 된 비결은?

호박축제의 전시회 담당자 알리사 캐퍼는 “지난 1990년 스위스에서 농장을 운영하던 유커(Jucker) 형제가 선물 받은 호박 씨앗이 시작”이라 말했다. 

농장에서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자라난 호박에 골머리를 앓던 중 관광객들이 ‘호박은 먹기도 하고 장식용으로 쓸 수도 있으니 좋겠다’라는 말에 호박을 독창적으로 활용해 보겠다는 생각으로 작은 전시를 열었다. 

몇몇 조각 작품과 품종 소개가 전부였던 소박한 전시회였지만 해마다 규모를 키우며 새로운 아이디어를 도입했고, 2000년 독일 루드비히스부르크의 바로크 궁전 정원((Bluhendes Barock)과 협력해 본격적인 ‘세계 최대 호박 전시회’라는 브랜드를 만들어냈다. 

첫해의 상징적 콘텐츠는 바로 ‘호박 피라미드’였다. 단순히 호박을 전시하는 것을 넘어 설치예술로 승화시킨 이 구조물은 관람객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고 축제의 방향성을 확립하는 계기가 됐다. 

농산물 전시를 넘어 정원예술과 결합된 새로운 형태의 수확제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후 축제는 매년 완전히 새로운 테마를 도입하는 방식으로 확장됐다. 

2002년에는 고대 이집트와 클레오파트라를 모티브로 한 테마가 등장했고 다음 해에는 탐험을 주제로 호박을 이용한 배·탐험도구 등이 정원 곳곳에 설치됐다.

이어 2010년에는 동화, 동물, 대륙, 스포츠 등 다양한 주제를 넘나들며 호박 조형물이 해마다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냈다. 

공룡, 정글탐험, 해양, 서커스 등 테마가 등장할 때마다 호박의 활용 폭도 넓어졌고 기술도 정교해졌다. 

최근에는 영화와 대중문화까지 영역을 확장해 2023년 디즈니·픽사 애니메이션 캐릭터들이 등장했고 올해는 영화 속 상징적 캐릭터들(찰리채플린, 마릴린먼로, 해리포터, 스타워즈 요다 등)이 주인공이 됐다. 

이렇게 호박으로만 캐릭터의 표정과 질감을 구현하는 정교한 조형물은 축제를 ‘예술전시’의 차원으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유럽에서 가장 맛있는 가을축제 7선
호박축제, 독일 축제 중 ‘유일 선정’

25년 넘게 이어진 시간 동안 루드비히스부르크 호박축제는 단순한 ‘특산물 축제’를 넘어섰다. 농업축제가 예술, 놀이, 정원문화와 결합하면 얼마나 큰 파급력을 가지는지 보여주는 대표 사례가 됐다. 

올해 루드비히스부르크 호박축제는 뉴욕타임스가 선정한 ‘유럽에서 가장 맛있는 가을축제 7선’에 올랐다. 트뤼플 축제가 열리는 이스트리아, 이탈리아 피에몬테의 밤 축제, 프랑스 바스크 지방의 후추 축제 등과 나란히 이름을 올렸고 독일 축제 가운데는 유일하게 선정됐다. 

뉴욕타임스는 루드비히스부르크 축제를 ‘수확제, 야외 예술관, 남독일 슈바벤 지역 특유의 삶의 기쁨이 결합된 가장 아름다운 가을 풍경 중 하나’라고 소개했다. 

보고 사는 장터형 농산물 축제가 아니라 예술·정원·농업이 어우러진 다층적 경험의 장이라는 점을 세계가 인정한 셈이다. 

루드비히스부르크는 세계 대형 호박 경연에서도 중요한 무대다.

2021년 이곳에서 기록된 1226kg의 호박은 당시 유럽 신기록이었다. 올해도 독일 챔피언이 1054kg 대형 호박으로 우승했고, 지역 기록 또한 꾸준히 갱신되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한 해 전시되는 호박은 무려 674종에 달한다. 색과 무늬, 크기와 형태가 모두 다른 호박이 정원 곳곳에 전시돼 있어 호박이 가진 생물학적 다양성이 하나의 박물관처럼 펼쳐진다. 
 

정원이 무대가 되는 체류형 축제 구조
프로그램이 머무르게 만드는 축제 동선

루드비히스부르크 호박축제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정원의 규모다. 

넓은 잔디, 대칭형 화단, 분수와 숲길로 이어지는 정원은 축제를 위한 거대한 무대 역할을 하고 호박으로 만든 조형물은 자연스럽게 풍경의 일부가 된다. 

정원 전체가 워낙 넓고 숲속 놀이터와 동화정원, 벤치, 그늘, 산책길이 잘 조성돼 있어 어른은 쉬고 아이들은 뛰어놀 수 있는 구조다.

이곳을 찾은 한 가족은 “축제가 아니라 하루 종일 머물 수 있는 공원 같다. 동화정원과 호박전시를 보다 보면 가을마다 오게 되는 이유가 생긴다”고 말한다. 

또 상징적인 프로그램인 호박보트 대회 ‘Pumpkin Regatta’다. 속을 파낸 거대한 호박을 배처럼 타고 물 위를 젓는 경기로 축제 기간 중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몰리는 프로그램이다. 올해도 많은 참가자가 몰렸고 예선전부터 관람객이 몰렸다. 

이 외에도 직접 호박을 조각해 보는 호박 조각 체험 워크숍, 호박축제의 사진을 찍어 응모하는 사진대회 등 참여형 프로그램과 공간의 조합이 만드는 체류형 동선이 호박 축제의 가장 큰 힘이다. 
 

농업기업 유커 팜(Juker Farm)이 만든 
지속가능한 유럽형 농업축제의 생태계

루드비히스부르크 호박축제는 농업의 생산, 가공, 전시, 체험, 판매가 한 축제에서 유기적으로 작동하는 유럽형 농업축제 모델이다. 

축제에 사용되는 대부분의 호박은 유커팜의 농장에서 재배되는데, 400종이 넘는 다양한 품종이 전시되며 일부는 조형물 제작 전용으로 키워진다. 크기·모양이 규격에 맞지 않는 농산물은 호박수프, 소스, 굴라쉬, 피클, 잼, 구운 호박씨 등 호박을 활용한 즉석 음식으로 판매되고 기념품 판매장에서는 호박 초콜릿, 술, 스프레드, 호박씨 스낵 등 가공품이 진열돼 있다. 여기에 장식용 호박과 다양한 품종의 씨앗 판매까지 더해져 관람객은 그 자리에서 먹고, 사고, 심을 수 있는 다양한 호박 경험을 하게 된다.

축제 자체는 현장 중심의 판매구조를 유지하지만 축제를 운영하는 유커 팜은 스위스에서 자체 온라인 스토어를 운영하며 일부 가공품을 판매한다. 그렇다고 루드비히스부르크 축제에서 판매되는 상품 구성이 그대로 온라인에 확장된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경험할 수 있는 현장성을 축제에 남겨둔다. 호박을 먹고, 사진 찍고, 씨앗 사서 돌아가서 심고, 다시 내년 축제를 기대하게 되는 구조다. 

올해 가장 무거운 호박 1등.
올해 가장 무겁고 큰 호박 전경.
공동취재단.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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