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밖에 아무것도 없습니다”복자 원시장(베드로) 마을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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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밖에 아무것도 없습니다”복자 원시장(베드로) 마을을 가다
  • 조현옥 전문기자
  • 승인 2014.08.28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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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홍주순교성지 성역화·관광자원화가 ‘답’ <7>

홍주천주교회사 3

1775년 예산 여사울의 홍유한이 영남의 순흥으로 이주하면서 풍산 홍씨 집성촌은 조용해진듯했으나 바톤을 이어받은 이존창(루도비꼬 곤자가)의 활동으로 천주교 신자들이 늘기 시작했다. 덕산 일대는 성호 이익의 학맥을 잇는 이병휴와 홍유한, 제자인 이기양과 홍낙민 등이 근처에 살았고, 뱃길을 이용해 경기도 양근의 권철신과 광주의 이벽과도 교류를 하면서 천주교의 단단한 뿌리를 내리게 된다.

성호 이익의 문도들이 서학을 접하기 시작한 것은 1724년에서 1725년경으로서 제3세대인 녹암 권철신계 인물들이 서학 또는 천주교 신앙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776년 무렵이다. 1779년 천진암 주어사 강학회, 1784년 이승훈의 세례를 거치면서 한국천주교회가 성립된다.

 

 

 

 

 


이때까지 홍주 목사가 근무하던 홍주성에서 자동차로 30분가량 떨어진 덕산, 예산, 합덕, 신평, 솔뫼, 결성, 해미, 청양, 화성, 비인, 정산, 대흥은 천주교 신자들이 속속 생기기 시작했다. 평야지대인 합덕 근처는 마을 전체가 천주교에 입교하기에 이르는데, 현재의 합덕성당을 기준으로 좌우 큰길을 따라 가면 대부분이 성지다. 아마도 천주교 신부와 신자들이 삽교천을 이용해 배를 타고 움직이기 쉬웠을 것이다.

여사울 근처에서 배를 타고 결성 쪽으로 가기도 했으며 오천과 비인까지도 배편이 이용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이동 경로를 따라 가다보면 대부분이 순교 장소이거나 신앙촌이다. 또한 염전업을 하는 하층민들과 상인들, 옹기를 구워 배를 통해 장사를 다니던 옹기장이들과 바닷가 사람들이 천주교를 신봉했었음을 알 수 있다. 홍주지역의 전통적 유교사상과 양반가들의 정신세계는 ‘충절의 고장’이라는 전통을 만들어 낼 만큼 확고했다.

오백년 조선의 성리학이 살아 숨 쉬는 유생들의 고장이었으며, 양반의 구조적 권력은 한말 홍주의병을 만들어 낼 정도의 강한 힘을 행사했다. 지배 계급이 충절로 정신 무장이 되어 있었다는 말은 바꾸어 말하면 아래로부터의 하층민들의 한숨은 컸다는 증거가 된다.

 

 

 

 

 

 

 


강한 신분체제로 인한 낮은 계급의 원성이 깊었다는 얘기다. 이때 마침 천주교의 평등사상이 들어 왔고 순식간에 그리고 급속도로 홍주 일대에 퍼지게 되었다. 1791년 전라도 진산지방(현 충남 금산)에서 천주학을 접한 윤지충은 젊은 혈기의 신도답게 중국으로부터 전해 받은 ‘조상 제사 금지’ 교리를 그대로 받아 들여 자신의 어머니 장례에 위패를 모시지 않았고 조상들의 신주단지를 불태웠다.

윤지충으로 말하자면 남인 명문세족으로 7대조는 윤선도, 글과 그림이 뛰어난 윤두서가 증조부이며, 증조모는 이수광의 증손녀이다. 또한 고모가 경기도 마재의 정재원에게 시집가 정약전, 약용, 약종을 낳았다. 그와 함께 진산사건을 이끈 권상연은 안동 권씨로 할아버지 권기징은 딸 다섯 중 맏딸을 윤지충의 아버지 윤경에게, 둘째딸은 유항검의 아버지 유동근에게 시집보냄으로써 권상연은 윤지충과 유항검에게 고종사촌이 된다.

 

 

윤지충 33세로 예수님의 나이와 같아… 한국의 첫 번째 순교자 
원시장, 홍주 옥에서 숨 거둬… 충청도 땅의 첫 순교자가 되다



정약전의 영향으로 1784년 천주교에 입교한 윤지충은 개인 신앙을 키우면서도 고산, 고창, 무안 등지에서 찾아온 사람들에게 교리를 가르쳤다. 진산사건은 1790년 북경에 파견된 밀사 윤유일을 통해 알게 된 ‘제사 금지’에서 비롯되었다. 신주 단지를 불사른 사건은 일가 권상희가 좌의정 채제공에게 고발하였고, 같은 남인의 홍낙안이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채제공은 진산군수 신사원에게 윤지충과 권상연을 체포하도록 하였으며 이 둘은 피신하였다. 윤지충의 숙부가 잡혔다는 소식을 들은 두 사람은 진산군에 자수하였다. 진산군수의 회유에 상관없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자 12근짜리 큰칼을 받고 신주를 폐기하고 제사를 드리지 않은 이유를 진술하였는데, 첫째, 죽은 사람의 상징인 신주는 목수가 만든 나뭇조각이므로 나의 혈육과 생명, 출생과 성장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둘째, 죽은 사람을 위해 음식을 차려 놓는 것은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인 것으로 판단하며 물질적인 음식은 육신의 음식이므로 영혼의 음식은 되지 못한다.

죽음이라는 긴 잠을 드신 분에게 음식을 드리는 것은 허례허식이라는 것이었다. 11월 7일 정조는 전라감사의 조사보고서를 받고 이 사건을 엄정하게 다룰 것을 명하였는데, 이들에게 줄 마땅한 죄목이 없어서 신주를 불사른 것을 무덤을 파헤친 ‘발총조(發塚條)’로, 요사스런 글과 사악한 술수로 몰래 천주교를 전하며 익힌 것은 무당의 사술과 같은 ‘사무사술(師巫邪術)’에 해당하므로 사형을 선고했다.

그리고 윤지충이 살던 진산군은 5년 동안 현으로 강등시키고 진산군수는 감독 소홀 책임을 물어 귀양 보냈다. 1791년 11월 13일(양 12월 8일) 윤지충과 권상연이 참수 당하였는데 윤지충의 나이 33세로 예수님의 나이와 같았으며, 이로써 한국의 첫 번째 순교자가 되었다. 정조는 윤지충과 권상연의 사형 선고를 후회하여 전주감영에 파발을 보내어 사형 중지를 명하고 귀양을 보내도록 지시하였으나 이미 늦었다.

윤지충과 권상연의 ‘진산사건’이 나라를 뒤흔들자 조정에서는 홍주지역의 천주교도들을 잡아들이라는 명을 내렸다. 홍주목사는 응정리(현 합덕읍 성동리)로 포졸을 보내어 원시보 체포령을 내렸다. 미리 소식을 접한 원시보는 몸을 피했고, 사촌인 원시장이 그들을 맞았다. “너도 교 하냐?”는 질문에 천주교 신자임을 당당히 밝힌 원시장은 홍주목으로 순순히 잡혀온다. ‘시장’은 그의 관명이다.

성격이 사납고 야성적이어서 호랑이라고 불렸으며 55세에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고 1년 이상이나 교리를 배우러 고향을 떠났다가 돌아와 친척들을 모아 놓고 이 세상의 시초와 하느님의 존재, 천당과 지옥, 원죄와 강생에 대해 설명하여 30여 가구 이상을 입교시켰다. 홍주영장과 목사는 원시장에게 갖은 회유와 협박을 하며 배교를 강요하였으나 거절하자 주리를 틀게 하고, 치도곤(治盜棍) 70도를 치도록 하였다.

계속되는 고문과 치도곤에도 불구하고 원시장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그는 고통 중에도 기쁨에 넘쳤으며 옥졸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기까지 하였다. 얼마 후 한 교우가 찾아와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는데, 그때까지 그는 예비신자의 몸이었다. 아무리 맞아도 뜻을 굽히지 않자 목사는 공주감영에 보고하였고, 1792년 감사로부터 원시장을 때려죽이라는 명령을 하달 받는다.

그러나 고강도의 주리와 치도곤 속에서도 끄떡없고 혈육의 정에 호소하여도 변함없자 목사는 매질만으로는 원시장을 죽일 수 없다고 판단, 추운 겨울 밤에 물을 뿌려 얼려 죽이라는 명을 내린다. 원시장은 옥살이를 하면서 자신의 신앙에 대한 묵상을 많이 하였는데 “왜 예수님은 능력자인데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했을까?”를 고민하게 되었다.

죽지 않고 많은 사람을 기적을 일으켜 살리시고 많은 이를 먹여 살릴 수 있었을 텐데, 어떠한 거부도 하지 않고 제자의 배반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가장 고통스런 방법으로 죽어야만 했을까를 묵상하던 그는 “오로지, 나 때문이다. 나의 구원을 위해서!”라는 결론을 얻었으며 마지막 죽음의 문턱에서 얼음으로 변해가는 자신의 몸을 예수님께 바치기에 이른다.

“나를 위해 매를 맞고 가시관을 쓰신 예수님, 저도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이 얼어가는 몸을 바칩니다!” 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홍주 땅, 홍주 옥에서 숨을 거둔다. 그의 세례명처럼 반석(베드로)이 되어 충청도 땅의 첫 순교자가 되었다. 홍주의 응정리(현 합덕읍 성동리)는 합덕성당에서 1.6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마을로 주변의 무명 순교자 묘지(목이 없는 32구의 시신을 합장한 곳)와 신리성지, 여사울성지로 이어지며 솔뫼성지로 들어가는 길목이기도 하다.

인근 신평의 원머리공소와 함께 홍주목 관할 주요 교우촌이다. 원시장의 생가는 온데간데없이 사촌 원시보와 함께 거주했다는 생가 터 근처의 우물만 남아 있다. 성동리 주민들이 얼마 전까지 떠 마셨다는 우물은 새롭게 단장되어 성지의 면모를 자랑하고 있으나 어디에도 그들의 흔적은 없었다.

늦게나마 그들의 정신을 기억하고자 시작된 성역화 사업이 홍주 옥 터를 다녀간 신자들에게 연계되어 알려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앞선다. 합덕성당의 한 구역장님은 세상에 “원시장과 원시보의 우물”이 더욱 알려졌으면 하는 마음을 조심스럽게 전한다.

그의 말을 듣기가 무섭게 홍성읍의 ‘홍주 옥 터 우물’을 떠올린다. 1792년 원시장의 순교부터 박해 끝까지 이상하리만치 거듭되던 죽은 순교자들의 ‘원상회복의 기적’, 그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겠는가? 세종실록에 ‘홍주 읍 석성 안에 있는 우물물’에 대한 기록을 차치하고도 백년이 넘게 전해 내려온 홍주 옥 터의 우물물은 이제야 빛을 보는 것은 아닐까?

합덕읍과 합덕성당은 ‘원시장과 원시보의 우물’을 단장하면서 성역화 사업을 벌이고 있지만 정작 거대한 순교 터인 홍성읍과 홍주성지는 이 우물물을 어떻게 성역화 할 것인지 궁금한 시점이다. 두 곳 모두 그저 마실 수 없는 ‘우물밖에는 아무것도 없는’ 실정이다.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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