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에서 출발하는 내포지역 천주교 공소 탐험〈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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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에서 출발하는 내포지역 천주교 공소 탐험〈5〉
  • 글=조현옥 전문기자/사진=김경미 기자
  • 승인 2015.09.10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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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에게 보내는 공소行 편지

12시가 되어서야 응봉에 닿았습니다. 응봉성당에 들릴 생각이지만 우선 배고픔을 해결해야겠습니다. 들어가는 초입에 ‘덕성반점’이 보이는군요. 벽걸이 선풍기 앞에 앉아 자장면을 시켰습니다. 주인아저씨는 음식 만드느라 여념이 없으시네요. 밖에 오토바이 한 대가 와서 멈춥니다. 연세가 지긋하신 아주머니가 헬멧을 벗더니 주문한 자장면을 제게 가져다주십니다. “아까 저어기 걸어오더니만 우리 집으로 왔네?” 하시며 반가워하십니다. 배달하러 가셨다가 대로를 걸어오는 저를 발견 했던가 봅니다. 대부분 남자분이 배달을 하시는데 이곳은 좀 색다르군요. 맛있게 자장면 한 그릇을 다 비우고 응봉성당으로 올라가다 방앗간 앞에서 멈춰 섰습니다.

▲ 응봉성당 입구 방앗간에서 만난 제비집.

가게 지붕이 넓은 것도 아니건만 흙으로 집을 짓고 사는 제비가족이 보였기 때문이죠. 세상에, 제가 다가가서 사진기를 들이대도 빼꼼 쳐다볼 뿐 가만히 있네요. 제비를 본지 얼마만인지 게다가 제비가 다 없어진 것은 아닐까 생각했는데 여기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한적한 응봉성당에 앉아 뜨거운 뙤약볕 시간을 피해 볼 요량입니다. 양말이 젖게 될 경우를 대비해 여벌 양말을 챙겨왔어야 하는데 초행이라 이도저도 생각 못했습니다. 다리만 아픈 게 아니라 양쪽 발가락에 물집이 모두 잡혔습니다. 그리고 새끼발가락 근처 발바닥에도 물집이 잡혔으니 큰일입니다. 아직 반이나 남았을텐데 육체는 그만두고 집으로 갔으면 하는가 봅니다.

▲ 응봉성당.

뜨거운 시간을 피하고 1시 50분쯤 성당을 나와 다시 홍성~예산간 국도로 나왔습니다. 처음 생각은 예산을 통과해 신암면으로 들어가려고 했으나 사과밭들이 시작되는 부분인 ‘예산수덕사IC’에서 왼쪽으로 틀어 신암 쪽으로 향했습니다. 아침의 발걸음의 두 배 정도 속력이 줄었습니다. 걱정했던 오른쪽 무릎이 아파오기 시작한데다 발바닥에 생긴 물집이 터져버렸기 때문입니다. 준비해 온 진통제를 먹고 무릎에는 뿌리는 파스를 열심히 분사했지요. 갈 수 있을까 걱정이 시작되었습니다. 물론 묵주기도를 하면서 가고 있지만 이백년 전의 신앙의 선조들이 붙잡혀 가면서 당했을 고통을 견주면 아무것도 아니겠다 싶습니다.

그러다가도 신암 쪽으로 틀면서 집으로 돌아갈까 망설이던 마음은 이제 아무 생각도 없이 그저 걷기에만 집중하고 있습니다. 이미 돌아가기에도 늦었기 때문이고 무언가 저를 여사울성지로 이끌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사과밭을 지나고 보라색 꽃이 한창인 도라지 밭을 지납니다. 알통이 불끈한 오래된 사과나무들은 마치 프란치스코 성인이 살았던 이태리 아시시마을의 올리브나무를 보는듯합니다. 잠시 감상에 젖어 ‘태양의 찬가’를 흥얼거려봅니다.

1시간 반쯤 걸었을까요? 역탑리와 오촌리 중간에 위치한 분촌4리 마을 자그만 동네 슈퍼에 들렸습니다. 버스 정류장이 있는 곳이어서 아직 남아있는 것일까요? 주인아주머니는 화분이 잔뜩 놓여 있는 가게 앞에 의자를 놓고 앉아 바람 쐬시고 중학생으로 보이는 안경 쓴 귀여운 아들이 물건을 꺼내주고 돈을 받습니다. 노오란 쥬스 한 병과 시원한 물 하나를 샀습니다.

갈증이 난 터에 얼마나 시원하던지요. 쥬스를 마시면서 권한 의자에 앉아 잠시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학생은 검은색 흰 줄이 두 개 나 있는 슬리퍼에 빨간 라카를 열심히 뿌리고 있네요. 빨간 신발 만드는 중이랍니다. 참 웃는 모습이 아름다워 사진 한 장 찍었습니다. 여기서 여사울까지 길을 물으니 거기까지 어떻게 걸어갈 거냐고 깜짝 놀랍니다. 앞으로 2시간 이상은 더 가야한다면서요. 여사울성지는 하도 유명해 한 번 가봤는데 뭐 볼게 없더라는 아주머니를 뒤로 하고 다시 걷기 시작합니다.

1시간 걸어 다시 오산3리 삼거리에 있는 동네 슈퍼에 들렀습니다. 이번에는 허기가 좀 지기에 바나나우유를 사먹고 주인 할머니와 담소를 나눴습니다. 할머니는 예전에 여사울성지 성당이 공소였을 무렵 그 곳으로 다녔던 분이었습니다. 지금은 신례원 성당으로 미사를 가고 있다는군요. 지폐를 셀 때 쓰는 물이 담긴 해면기가 아주 오래 된 것으로 보아 이곳에서 오래 장사를 하신모양입니다. 가게 한쪽에는 보라색 사랑초 잎들을 꺾어 꽂아 둔 화병이 햇빛을 받아 눈부셨습니다. “해동무 해야것어~” 하시는 할머니의 배웅을 받으며 또 걷습니다. 해가 질 무렵에나 목적지에 닿겠다는 뜻입니다.

▲ 오산삼거리 동네수퍼.

드디어 신암면 신종리에 위치한 이존창의 생가 터, 여사울성지에 도착했습니다. 저녁 6시 30분, 아침 6시에 출발했으니 12시간 반가량 밖에 있었고 10시간정도 걸은 꼴입니다. 지금의 아름다운 성당 뒤에 우뚝 서 있는 옛 성당에 올라갑니다. 1958년에 프랑스 출신 정신부님의 주선으로 프랑스로부터 원조를 받아 공소 신자들의 피땀으로 지어진 성당으로 충청남도 문화재로 지정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공소 신자수가 300여 명이어서 성당으로 지어졌으나 사제가 부족해 50여 년 간이나 공소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었다가 성지성당으로 승격되어 지금에 이릅니다. 공소 건물이 지어지기 전에는 ‘여사울 성지’라는 큰 이정표 표시가 있는 장소가 공소집이었다고 합니다. 현 성당의 바로 옆집에 살고 있는 옛 공소회장 고재성(안토니오) 할아버지 말씀으로는 “대전교구 방 신부님 알지? 그 댁 증조할아버지가 방춘화씨여. 게가 공소집이였지”라는데 아마 그 분들은 복자 방(프란치스코)의 후손들인 것 같습니다. 여기는 1780년 경 이존창이라는 사람이 서울의 권일신에게 천주교를 배우고 교우촌을 형성해 살았던 고장입니다. 박해 시절 많은 교우들이 잡혀 치명하셨지만 신앙의 자유가 생긴 1890년 이후에도 계속 교우들이 마을을 이루며 살았다고 합니다.

▲ 여사울 옛 공소.

 고재성 할아버지는 1929년생으로 15살까지는 천안 광덕산 근처의 ‘부원골 공소’에서 살다가 이곳으로 이주했다는데 이 분의 조부 고의진(요셉)도 병인박해 때 황새바위에서 치명하셨답니다. 형제처럼 지낸 배문호와 같은 날 함께 치명당하시면서 춤을 추면서 기뻐하셨다고 하며 남은 아들 셋과 할머니는 광덕산 부원골 공소마을에서 어렵게 생활을 이어갔다고 하는군요. 그러다가 해방되기 전 교우촌을 찾아 여사울로 오게 되었다고 해요.

“여기 와서 젊었을 때는 애들 교리를 했지. 신자들이 너무 많아져서 공소집을 넓히다가 저 위 성당을 정 신부님이랑 짓게 된겨” 하시는 할아버지께 신앙생활 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때가 언제냐고 물으니, “일제 때여. 아, 우리가 죄를 고백한다고 하니께, 뭔 큰 죄를 저질렀는 줄 알고 순사가 나왔어. 그때만 해두 공소에 판공이 부활, 성탄 이렇게 두 번이잖어? 그 때마다 고백실에 순사가 서 있었어. 함께 본 거지. 사실, 지들이 뭐 알기나 했것어? 우리가 죄를 져봤자 신공 잘 못했다는 거랑 참례 빠졌다는 거지. 그게 사람을 죽인 거여, 물건을 훔친 거여? 죄도 아니지”라고 말씀하십니다.

▲ 옛 공소회장 고재성(안토니오) 할아버지.

일제 강점기 때 신앙생활이 어렵다가 해방이 되자 신자들이 신이 나서 전교를 했는데 한 집에 하나는 다 공소에 나왔다고 하니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러나 지금은 유럽풍의 화려한 성당이 세워져 있는 여사울 성지는 신자들은 아주 작은 성당규모입니다. 여기서 홍주지역의 천주교 신자들이 교리를 배우고 전국 각지로 펴져나갔으니 ‘신앙의 못자리’라는 표현이 걸맞습니다. 욕심이 있다면 옛 성당 자리를 잘 보존하고 가꿔서 지나는 순례객들에게도 개방이 되면 좋겠습니다. 200여 년 전 신앙을 기억하고 배우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을 계속 이어 온 공소 신자들의 발자취도 더듬어 보는 것도 의미가 크기 때문입니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한 자매님의 차를 탔습니다. 10시간이상 힘들게 걸었던 길이 자동차로는 30분이 안 걸립니다. 다음 코스는 아마 좀 더 짧아지겠지요. 그대의 영혼이 건강하길 빌며 청양 비봉공소를 기대해 봅니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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