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홍주순교성지, 순교자 212명 중 4위 복자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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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홍주순교성지, 순교자 212명 중 4위 복자 탄생
  • 글=한관우/자료·사진=김경미 기자
  • 승인 2016.09.27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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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천주교순교성지, 부활을 꿈꾸다 <3>

홍주, 이존창에 의해 복음 전파돼 많은 천주교 신자 있던 곳
천주교 신자들 심한 문초를 받아 죽거나 옥에서 굶어 죽기도
홍주 순교자들 참수형보다 교수형이나 갖가지 남형으로 순교
홍주의 천주교순교사는 종교의 영역을 초월한 지역사의 흐름


 

충청도는 순교지와 교우촌 등 천주교 성지가 많은 곳으로 꼽히는 대표적인 지역이다. 특히 내포지역에는 중심지인 홍주의 홍주성 감영 터를 비롯한 순교성지가 많은 곳이다. 예산군 신암의 여사울, 당진 합덕의 솔뫼, 신리공소와 구 합덕성당, 신평성당, 서산 해미의 순교지, 아산 공세리성당 등 관련 유적지가 집중돼 있는 연유는 이곳이 ‘한국 천주교회사의 못자리’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천주교는 처음에 서울과 경기도를 중심으로 전파되다가, 이존창에 의해 현재의 충남서부지역으로 전파된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이 지역은 초기 천주교 신앙의 중심지이면서 동시에 가장 가혹한 박해의 피해지가 되기도 했다. 이곳은 1839년 기해박해에서 1866년 최대, 최후의 병인박해까지 베르뇌, 페레올, 다블뤼, 오메트르, 위앵 등 파리외방전교회 계통의 프랑스 선교사들이 장기간 머물면서 선교의 중심지가 됐던 곳이다.

조선 후기는 유교적 신분질서가 서서히 붕괴돼 가고, 경제적 능력만 있으면 양반 신분을 살수도 있고, 과거에 합격하기만 하면 상민도 얼마든지 양반이 될 수 있을 정도로 신분변동이 심했던 사회였다. 하지만 정치의 부패와 착취가 심해 백성들은 압제에 시달리며 새로운 세상을 갈망했다. 이러한 1770년대, 사회개혁을 꿈꾸던 일부 남인계통의 실학자들은 중국에서 들어온 천주교 서적을 연구, 복음의 진리를 깨닫고 신앙으로 받아들였다. 아직 선교사가 들어오지도 않은 상태에서 천주교 신앙은 순전히 조선 사람들의 자각에 의해 서울과 경기도지역에 이어 충청도 내포지역으로 전파됐고, 그 중심에는 내포출신의 이존창이 있었고, 홍주가 중심이었다.

 

▲ 홍주순교성지 월계천변에는 네분복자에 대한 안내판이 순례객들의 발길을 멈추게 하고 있다.

■한국 천주교 신앙의 뿌리 홍주순교성지
홍주는 이존창 등에 의해 복음이 전파돼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있던 곳이다. 기록상으로 홍주에서 가장 많은 순교자를 배출했으며, 지금도 잘 보존된 홍주성 동문인 조양문을 비롯한 4대문 안으로 끌려 온 천주교 신자들은 심한 문초를 받아 죽거나 옥에서 굶어죽기도 했다. 또한 수많은 무명 순교자들이 한꺼번에 구덩이에 묻힌 것으로 기록된 곳이다. 지난 1984년 로마교황청의 심사를 거친 103명이 성인으로 공표됐고, 2000년 2차 순교자 124명 중 충청출신이 51명으로 가장 많았고, 경기도가 23명으로 그 다음이었다. 충청도출신 중에서도 홍주출신이 16명으로 가장 많았고, 덕산 12명, 예산 6명, 청양 5명 등인 점으로 볼 때 내포지역의 천주교 박해실태를 미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 지역 순교자들에 대해서는 일부 성지 안내서와 교구사를 통해 살펴보면 1866년과 그 후 2년간에 걸쳐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치명일기’에만도 80여 명의 명단이 전해지지만 전체적으로 명확한 숫자나 기록이 전해지지 않는 것은 큰 아쉬움이 다. 이밖에도 무명의 순교자들도 많았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실제로 현재의 ‘천주교 홍주순교성지’비가 세워진 합수머리의 생매장 터와 북문교 밖의 참수터 근처 등에 묻힌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홍주의사총’은 900여구의 유골이 묻혀 있는 곳으로 다분히 동학을 포함한 홍주의병과 홍주천주교 신자들의 뼈가 함께 묻혔을 것으로 추정되는 장소이다.

기록상으로 홍주지방에서의 첫 순교자는 1793년 원 베드로이다. 1797년에 박해가 발생한 이듬해 원 야고보, 배 프란치스코, 방 프란치스코 등이 잡혀 방 프란치스코는 이곳에서 순교하고 나머지는 청주로 이송돼 순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홍주’의 관할지역의 범위와 지리적 위치 등을 고려할 때 상당수의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혹독한 탄압을 일삼았던 흥선대원군이 1866년 병인양요와 1871년 신미양요에서 승리하고, 그 해 서울 종로와 전국 각지에 세운 척화비가 홍주(현재 홍성군 구항면 오봉리)에도 있기 때문에 박해의 정도를 미뤄 짐작할 수 있는 상징물이다. 교회 순교록에는 홍주에서의 순교자가 모두 115명(무명 순교자 11명을 포함해 1866년 51명, 1867년 19명, 1868년 27명, 1869년 2명, 연도미상 16명)으로 수록돼 있고, 관변 측 기록에는 1868년 4~7월까지 4개월 동안의 순교자만 모두 102명이 수록돼 있다.

따라서 홍주의 순교자는 초기 8명을 포함해 중기 4명, 병인박해 당시 200명을 합하면 처형된 신자가 무려 212명에 이른다. 여기에 무명 순교자를 포함하면 실제 순교자수는 1000여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따라서 내포지역에서의 순교자의 숫자가 늘어나는 것은 당연할 일이며, 문서의 기록 등에서도 수정이 불가피한 사항이다. 기록상 210여명의 순교자와 1000여명의 무명순교자 숫자로 볼 때 한국 천주교 신앙의 뿌리인 충남서북부지역, 특히 홍주성 천주교 순교성지 등은 새로운 성역으로 재탄생해야 하는 당위성이 그래서 있다는 것이다. 이제 홍주의 천주교 순교사는 종교의 영역을 초월한 지역사의 흐름이고, 우리가 승화시켜야 할 시대정신의 핵심사상이다. 민초들이 주체가 돼 형성된 민중공동체의 삶의 진리이며 터전이다.

 

▲ 홍주순교성지 생매장 순교터 비.

■천주교 홍주순교성지 1000여명 순교한 곳
홍주는 충청도 최초 순교자의 치명 터이자, 병인박해 때까지 순교자 212명이 신앙을 증거하다 목숨을 잃은 곳이다. 지난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시인 8월 16일 복자 반열에 오른 원시장(베드로, 1732~1793)·방 프란치스코(?~1799)·박취득(라우렌시오 1769~1799)·황일광(시몬, 1757~1802)이 바로 이곳에서 거룩한 피를 흘리고 하느님 품에 안겼다. 이렇듯 홍주순교성지는 기록상으로 212명의 순교자가 있고, 알려지지 않은 순교자까지 거의 1000여 명이 순교한,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이름이 알려진 순교자가 많은 곳이다. 이곳 천주교 홍주순교성지의 특징은 예비신자들의 모범 성지이고, 둘째로 박해 처음부터 끝까지 순교자가 나왔다는 점, 셋째로 한국 순교자의 거점 성지라는 정신을 간직한 곳이다.

천주교에 입교하여 3년간 예비 신자로서 수계를 지키며 30여 가구를 입교시킨 원시장 베드로는 신해박해 때 옥에서 세례를 받고 동사로 순교했다. 또한 장장 22년간이라는 예비 신자 생활을 하며 거의 10년 넘게 옥살이를 하다가 순교하기 직전 자기 스스로에게 세례를 주고 하느님을 영접한 이여삼 바오로는 ‘예비신자들의 모범’으로 추앙되고 있다. 따라서 이곳 홍주순교성지는 예비신자나 신앙심이 깊어지지 않은 신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은혜로운 성지임에 틀림없다. 지금도 수많은 천주교 성지순례자들이 이곳에 와서 신앙을 키우고 예비신자들을 봉헌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천주교 홍주순교성지’비가 세워진 곳은 홍주성 북문 밖을 흐르는 월계천과 조양문 밖을 흐르는 지금의 홍성천이 만나는 합수머리 지점으로 1868년 생매장으로 순교한 최법상 베드로, 김조이 루치아, 김조이 마리아, 원 아나타시아 등을 비롯해 박해시대 홍주성 안에서 옥사나 교수형으로 순교한 순교자들의 시신이 매장된 곳으로 추정되는 장소다. 홍주 순교자들의 순교 형식은 오직 교회의 순교자 증언록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데, ‘홍주·해미성지 자료집’에 따르면 생매장 4명, 참수 2명, 미상 8명 등으로 나타난다. 1868년 유 마르타의 순교는 참수형인지 혹은 교수형인지는 명확치 않다. 1868년 5월에는 홍주 원머리 출신의 신자들 4명이 천주교 신앙 때문에 동시에 생매장되었으며, 최대 생매장 순교자는 9명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홍주 순교자들은 참수형보다는 교수형이나 갖가지 남형으로 순교했다. 또 1868년 5월 최법상 베드로, 김조이 루치아, 김조이 마리아, 원 아나스타시아를 비롯한 생매장 추정자 최대 9명이 순교한 생매장터의 정확한 위치는 지금까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교회 증언록에는 당시 생매장을 했던 이유를 “많은 교우들을 죽이기 어려우매”라고 기록하고 있다. 물론 순교자들은 홍주성 안이 아니라 성 밖 어느 장소에서 한 구덩이에 생매장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옥사하거나 교수형을 당한 순교자들의 시신이 묻힌 장소도 이 생매장터와 같은 장소로 추정된다. ‘홍주의 옛 숲거리는 홍주에서 희생된 동학군과 의병들의 시신이 묻힌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천주교 순교자들이 생매장을 당한 장소도 이 부근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지금은 없어진 홍주의 숲거리는 1871년의 ‘홍주목 지도’에 홍주성의 동문 밖을 흐르는 천의 동쪽 건너편에 자세히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곳이 지금의 홍성천과 월계천의 합수머리 왼쪽 지점이다. 이 숲거리가 홍주성 밖의 매장지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대목이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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