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고의 동양미술학교 설립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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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고의 동양미술학교 설립 꿈꾼다
  • 글=장나현 기자/사진=김경미 기자
  • 승인 2016.11.08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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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희망이다>홍성의 인맥-홍성출향인을 찾아서 <18>

又出(우출) 이강세 도예가
▲ 이강세 도예가가 덕산면 낙상리의 고향집 툇마루에 앉아있다.

장곡면 천태리 고향, 낙상리는 8대조 선조 자리 잡아
숙부인 이응노 화백에게 그림 사사해 깊이 영향 받아
예스러움과 현대 조화시켜 자신만의 작업세계 구축해
도예와 그림을 함께 하는 ‘도화인 이강세’ 이길 소망 


고등학교 졸업 후 고향을 떠나 대학에서 동양화를 전공하고 도자기 작업을 하면서 작품활동을 펼치고 있는 이강세(71) 도예가가 그의 8대조 할아버지부터 살아왔다는 덕산면 낙상리에 내려왔다고 해서 그를 만나러 갔다. 낙상리는 홍성군과 예산군의 경계지역으로 홍천마을을 지나 고개 쉼터를 넘자마자 나오는 곳이다. 이 작가는 주말을 이용해 틈틈이 내려와 고향을 가꾸면서 내년 봄부터는 현재 살고 있는 경기도 광주시와 덕산면을 오가며 거주할 예정이다.

“프랑스에서 숙부이신 이응노 화백에게 그림을 배우던 시절, 화백께서 매일 새롭게 작업하라는 의미로 우출(又出)이라는 호를 제게 지어주셨습니다. 직접 만들어 주신 낙관을 지금도 여전히 쓰고 있죠. 대학에서는 동양화를 전공하였지만 도자기의 매력에 빠져 도예가의 길을 40년 넘게 걸어왔습니다. 이제는 도예와 더불에 그림에 매진해 도예가(陶藝家)가 아닌 도화인(陶畵人) 이강세로 불려질 날을 기다립니다. 저의 호처럼 더욱 새롭게 말이죠.”

▲ 홍성고등학교 재학시절 미술반 교사와 동료들.

이 작가는 장곡면 천태리가 고향으로 초·중·고등학교 시절을 홍성에서 보냈다. 시골에 농토가 있고 그의 아버지가 상업에 종사했기에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은 아니었다. 그러나 친형이 2차 세계대전 때 일본에 강제징용 되어 독립군으로 탈출을 시도하다가 병에 걸려 목숨을 잃는 일이 있었다. 실의에 빠져 있던 그의 아버지는 슬픔에서 헤어나올 시간도 없이 그가 6살 때 세상을 떠났다. 그 후 홀어머니와 생활을 이어가던 이 작가는 생활고에 시달리며 힘겨운 시간을 보냈었다. 어려웠던 시절, 그를 붙잡았던 것은 그림이었다. 어릴 때부터 그림을 배우지 않았어도 그림에 재능을 보여 각종 대회에서 수상하기도 했다.

이 작가는 미술을 시작하고 20살 때 숙부인 고암에게 사사해 고암의 영향을 깊게 받았으나 결국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왔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재수를 할 당시 1967년 동백림 사건이 터지고 이 작가는 고암 곁을 지키게 된다. 고암은 그림에 남다른 재능을 가진 이 작가에게 함께 도자기를 배워 프랑스에 가지 않겠느냐고 권유를 했다. 함께 작업장을 찾기도 한 이 작가는 경기도 광주에서 도자기 실습을 시작하고 도자기의 매력에 빠지게 된다. 이때는 프랑스에서 작업을 할 생각으로 꿈에 부푼 시기이기도 했다.

▲ 이강세 도예가가 작품 옆에 서있다.

광주에서 도자기 실습을 하던 이 작가는 공장장으로부터 도자기 공장을 인수해 사업과 작업에 몰두했다. 이 작가는 도자기 작업이 어느정도 궤도에 오르자 뒤늦게 미뤄놨던 대학을 늦은 나이에 들어가게 된다.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은 조선시대 도화에 관한 연구를 할 만큼 그는 도자기와 그림을 깊이 있게 파고들었다. 그의 작업은 처음에 옛것을 모방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 20년을 이어오자 이 작가는 자신만의 작업스타일을 찾는 데 주력했다. 그는 옛것을 지키되 작품을 현대적으로 해석하고 끊임없는 노력으로 작업해 좋은 결과를 얻었다.

“작가라면 누구나 하는 고민들이 같을 겁니다. 자신만의 작업을 한다고 해도 어딘가 남들 작업과 비슷한 부분이 있어 항상 고민하고 자신만의 작업을 찾죠. 남들과 비슷한 작업은 의미가 없기에 계속해서 노력하다보면 자신의 작업을 찾는 것이죠. 남들과 다름으로써 결국 나의 작업이 되고 나의 작업을 찾음으로써 남들과 다른 작업이 탄생하게 됩니다.”

▲ 이강세 도예가 작품.

그의 도자기 작품은 소박하고 정감이 가며 시원한 면이 돋보인다. 기교를 부리기 보다는 우리의 멋을 살려 작업을 했으며 우윳빛 유약 위로 드러나는 그림은 소탈하여 더욱 마음이 간다. 이 작가는 도예와 회화를 같이 하는 부분은 어려울 때가 많으나 결국 좋아서 하는 일이기에 열정을 다하고 있다고 한다. 일생을 미술 한길로 걸어온 그의 생전 바람은 동양미술학교를 짓는 일이다. 학교를 세우는 일은 단번에 되는 일은 아니지만 이 작가가 첫걸음을 내딛는다면 누군가는 뒤를 이어 시작하지 않겠느냐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동양미술학교 역시 고암과 연결되는 부분이 있다.

“이응노 기념관을 지을 당시 기념관 위에 땅을 갖고 있는 분께서 동양미술학교를 지을 수 있는 땅을 내주겠다는 이야기가 나온 적이 있어요. 그러나 군에서는 학교에 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보니 불란서의 숙모님이 홍성에 비협조적인 부분이 있었죠. 그사이 대전미술관에서는 아주 적극적이었습니다. 파리가 센터가 되고 홍성과 대전은 같은 차원에서 홍성은 기념관으로 대전은 미술관으로 해서 생가가 있는 곳에 동양미술학교를 세운다면 지역미술발전에 크나큰 역할을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 파리에서 이응노 화백 가족들과 저녁식사.
▲ 파리에서 이응노 화백과 함께한 이강세 도예가.

고암은 생전 이 작가에게 특별한 애정을 보였다. 다른 사람이 고암을 ‘빨갱이’ 취급을 하며 멀리할 때 이 작가는 프랑스를 오가며 고암과 꾸준히 교류를 했기 때문이다. 프랑스에 다녀온 이후로 안기부에서 이 작가집에 도청장치를 하고 집요하게 찾아와 추궁한 일도 있었으나 이 작가는 고암과의 연락을 끊지 않았다. 이 작가가 프랑스의 고암 곁을 다녀간 지 5개월 후에 세상을 떠난 고암은 생전 “한국에 동양미술학교 분교를 세우려한다”며 “누구도 나서지 않으니 네가 용기를 내어 꼭 학교를 세워라”는 말을 하곤 했다. 그는 생가가 있는 홍천마을이 아닌 덕산면 낙상리에 학교를 세우는 일도 고려하고 있다. 동양미술학교를 짓는 일은 이 작가의 바람이기도 하고 고암의 바람이기도 했다. 이 작가는 학교를 세우는 대업이 중요하지만 작가로서의 마지막 소망을 내비치기도 했다.

“남들 앞에서 ‘이응노 조카’라고 소개 받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응노 화백께서 거장으로 이름을 알리시고 미술사의 한 획을 그으셨기 때문이기에 숙부가 저희 집안의 자랑이기도 하지요. 저 역시 숙부님의 지대한 영향을 받았고요. 미술 한길을 걸어온 저로서는 이제는 ‘이응노 조카’ 보다는 ‘도화인 이강세’로 불린다면 더욱 바랄 것이 없지요. 예술가라면 누구나 바라는 것 아닌가요?”

▲ 이강세 도예가가 낙상리 집에서 자신의 작품을 보고 있다.

우출 이강세 도예가… 
이강세 도예가는 장곡면 천태리에서 태어나 반계초등학교 10회, 홍성중학교 11회, 홍성고 20회를 졸업하고 경원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파리 동양미술연구소 이응노 화백에게 사사했으며 정부포상 대통령상 광주시 문화상을 수상하고 경원대, 삼육의명대 강사를 역임했다. 한국미술협회, 미술인횃불회, 광주도예협회, 한뫼골미술인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1980년 통인화랑, 1981년 세종문회회관, 1982년 아랍문화회관, 1983년 미도파 백화점화랑, 1984년 삼일화랑(미국), 1991통인화랑, 1996년 도판 소품전, 2004년 빛갤러리, 2006년 통인화랑에서 9회 개인전을 열었으며 1992년 한일 도예문화 교류전, 1995년 향토작가 초대전, 1998년 한국 도예작가 10인전, 2001년 세계 도자기 엑스포, 2001년 한국 전승도예 특별전, 2003년 제1회 너른골 미술축제 등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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