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방 하나 얻을 돈 없어 얼매나 서운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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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방 하나 얻을 돈 없어 얼매나 서운헌지···
  • 취재=김옥선/사진=김경미 기자
  • 승인 2018.10.30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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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삶이 역사다-당신의 자소서<17>
김종분 1941년생으로 홍동면 수란리에서 태어나 21살에 금마면 덕정리로 시집왔다. 다섯 남매를 두고 그 뒷바라지를 하며 온갖 장사를 다했다. 이제는 하루하루 만족하며 마음 편하게 산다.

동면 수란이 고향이여. 왕지가 한 부락이었는데 다른 부락이 됐지. 스물한 살에 일루 왔어. 아버지가 엄해서 연애를 할 수도 읎어 중매해서 왔지. 시아버지, 시어머니, 시동생, 시누는 결혼했구. 우리 아버지가 식구들 간편하다구 가라고 해서 왔지. 오남매 뒀지. 넷이 아들, 막내가 딸. 내가 안 뵈아서 애들 가르치느라 너무 힘들었어. 땅도 팔구 일도 무쟈게 했어. 우리 집 양반도 배운 거 읎은께 서울 가서 노동 일 했지. 그 어려운 벽돌 같은 거 빼고 나두 거기 가서 더러 일하고. 시골서 길쌈 삼베 700자까지 짰어. 1자가 1미터도 안 돼. 애들 등록금 허느라구 밤낮없이 삼은거여. 이빨로 삼아가지고 지금 이빨이 다 삭았잖아. 지금은 한 자에 만 원, 옛날에는 삼천 원했어. 700자 팔러 예산에 갔어. 엄청나게 많이 가지고 가니까 이걸 사람이 짰겄어? 하는겨. 안 믿드라구. 시어머니가 쓰던 베틀인데 장사가 가져가서 지금은 읎어. 여기만 해도 길쌈하는 집 읎었어. 날고 짜고 매고 우리 시어머니가 많이 하셨지. 그래 그렇게 돌아가셔서 안쓰럽고 그래. 그렇게 해도 등록금 한 번밖에 못 내. 애들이 두 살 터울이거든? 한 번에 대학을 셋두 갔슈. 엄청나게 어려웠어. 그래도 애들이 공부를 잘했어. 셋째 아들은 홍고에서 전교 1, 2등 계속 해서 학교 앞에서 자취했어. 내가 밥 해줘가며. 한 번은 선생 변또를 네 개 싸오래. 소풍 가는디. 선생은 몰르지 형편이 어려운 지. 우리 아들이 와서 걱정하는겨. 엄마 4개 싸오라는디 으떡해유? 걱정하지 마, 내가 할게, 그러구 선생 변또는 조금 다르게 싸야 하잖아. 우리네 매로 쌀 수가 있남? 그래서 소고기 사다가 볶아서 싸서 줬지.

사도 안 해본 게 읎어. 채소 같은 거 호박 넝쿨도 안 남고 깻잎도 허구 그렇게 해서 애들 통학비라도 주고 했지. 요기 예전에는 이웃들이 도래도래 살고 그랬는데 이제 허물어서 읎어. 그래도 이웃에 돈 꾸러는 안 갔어. 우리 집 양반이 벽돌 빼면 난 그거 쌓는 거 했어. 장 수 대로 먹는겨. 처음 허먼 어려웠는데 해 버릇허니 괜찮더라구. 그리 같이 해서 애들 주고 그랬지. 겨울에는 못 허구 여름에는 거기 가서 많이 있구. 그 전에는 괜찮았는데 애들 가르칠 때가 어려웠지. 농사 지어두 보리밥 안 먹구 살았는디 빚 얻어서 등록금 대구서 그 때만해도 계가 많았어. 쌀 계. 쌀 몇 짝, 몇 짝 그래 가을이면 또 갚구 또 뭣허면 얻구, 그러다 애들 가르치니 끝나구 그랬지. 아모레 화장품 장사도 쪼끔 했지. 지금은 읎잖어. 그건 파는 대로 먹어. 만 원어치 팔면 3000원 나한테 오는 거야. 허던 이가 애기 낳아서 잠깐 쉰다고 해서 내가 한 이년 하다가 도루 줬지. 홍성 시장 가서 호박, 깻잎 이런 거 파는데 아는 친구가 그 때만 해도 곤로 있었잖아. 거기다 부침개 해서 시장에서 팔면 잘 된다고 해서 그것두 해봤지. 애들 자취허니께 거기다 갖다 놓구 해서 가져가고. 어떤 남자가 와서 아줌마 술도 팔아유? 그래 술은 안 팔아유, 그럼 사다줄 수는 있냐구, 그래 소주를 사다줬어. 그랬더니 따라 달래. 아저씨가 따라 잡숴유. 우리 친정 엄마가 술집 여자나 따라주지 술 따라주는 거 아니라고. 아줌마 장사할라믄 이런 것두 해야 허는디 그래. 아녀유, 혼자 따라잡숴유. 그러고 안 따라줬어. 그 때 부침개 한 장에 500원에 팔았슈. 호박, 졸 넣구 부치믄 맛있지. 상 장사도 했어. 육촌동생이 그걸 했는데 신앙촌 돗자리 있잖아. 그것두 가져다 팔아보구. 보따리 장사도 했슈. 옷 장사. 시장에서 떼다가 그 때만 해도 저고리 다 꼬매 놓은 거였어. 난닝구, 메리야스 같은 거 떼다가 이 동네 저 동네 보따리 이구 다니면서.

울서 방 하나 얻지 못해서 영등포 시동생네 가 있기도 허구, 계속 있을 수 없잖어. 그래 사촌시동생이 전당포 했거든. 낮에는 학교 가고 밤에는 이제 거기서 전당포 지켜주고 자는 겨. 내가 반찬 해다 날라주고. 별 짓 다해봤슈. 그 때만해도 젊고 근력 있응께 허지 지금 허라면 못허지. 우리 셋째 아들이 전당포서 자는데 학교 갔다 오믄 거기서 사람들이 모여서 고스톱 치고 들어가보니 담배연기가 자욱헌 게 엄마는 못 있겄다. 애들 보기 얼매나 미안헌지. 그 이튿날 시골로 내려오는 참인디 우리 아들이 그러는겨. 엄마 짐 있으니 버스까지 데려다준다고. 지가 짐을 들고 왔어. 버스 타는디 아들이 나 타는 걸 쳐다보고 계속 섰는겨. 막 눈물이 나는겨. 열차 타고 오면서 내가 얼매나 울었는지. 왜냐믄 서울 시내 집이 그렇게 많은디 셋방 하나 못 얻어서 애들 하나 못 주는 상항이 그렇게 눈물이 나. 열차 안에서 계속 울은께 옆에 앉은 아줌마가 친정에 갔다 와유? 왜 그렇게 울어유? 그냥 눈물이 나와유. 셋방 하나 얻을 돈이 읎구 그 생각에 얼마나 서운헌지. 우리 동생네도 세 놓고 살았어. 그래도 방은 안 주더라구. 그래 야속한 거야. 그래도 지금은 잘 해. 그 뒤에 방을 하나 얻었어. 100만 원 주고 사글세로 끊어주는 거. 내가 그 빚을 수술해가면서까지 다 갚은겨. 으떡혀. 해야지. 빚 얻는 과정에서 애들이 결혼했슈. 사글세라도 얻어줘야 허잖어. 사글세 얻으면 지들이 벌어서 전세 얻고 며느리들이 어렵지. 그래도 지금은 편치. 빚 다 갚은지 한 8년밖에 안 됐슈. 계도 다 끝나고. 지금은 아무 걱정 없이 인생 하루하루 사는 거야. 농사 이제 조금 짓고 아들이 기계 읎는 것 없이 다 있슈. 걔는 안 가르쳤응께 지가 안 뵈었어. 그래 내가 사진 안 걸어놔유. 사각모자 쓴 거 보면 그렇잖어. 나중에 나이 먹어서 좀 부럽잖아. 그래서 안 걸어 놔. 머리는 좋았는데 지가 안 갔어. 걔가 학교 들어가서 그 때 백일기침을 했어. 그게 안 낫더라구. 폐렴이 돼서 그 때 보건소가 있어 뭐가 있어. 걔를 업구 병원 데녔지. 1학년 들어가서 여섯 달 밖에 안다녔어. 아파서. 선생님한테 가서 얘는 학교 너무 빠져서 도루 1학년에 너줘유 허니 아니라구, 얘는 머리가 비상한 애라 다 쫓아오니께 그냥 둬유 그러더라구. 5학년인가 6학년 때 학교서 엑스레이를 찍었나봐. 선생이 오라 해서 갔지. 병원 가서 다시 찍어보라구. 바늘 끝만큼 안 좋다구. 병원 갔더니 이걸 으떻게 발견했냐구 그러대. 말하자면 폐병이야. 주사를 병원에 하루 걸러 와서 맞으랴. 교회 목사님이 그 주사를 놀 줄 아시드라구. 그 목사님이 계속 놔 주다가 내가 놨지. 항문에서 사방으로 한 뼘씩 물른 살에 찔러댄다구 그러더라구. 그래서 6개월을 내가 놨슈. 우리 집 양반은 벌벌 떨고 못 놔. 7개월 돼서 검사해보니 깨끗하게 나섰슈, 그래 학교를 가라고 안했지. 머리를 너무 쓰고 그러믄 안 좋을까봐. 그때부터 기계 같은 거 가지고 놀구 집이서 설계도 허구 집도 고치구 다 잘 허유. 

리 손자가 왔는디 반찬 해주면서 너 아빠 학교 다닐 때 참 어려워서 반찬도 제대로 못 해줘서 깻잎 멀미나서 지금도 안 먹는다. 근디 지금은 편타. 그랬더니 우리 손자가 우리 할머니가 그 소리 허니 내 가슴이 찌릿허네. 그러더라구. 할머니 내가 잘 할게. 그 때 한 번 등록금이 90만 원이었어. 우리 아들이 너무 아깝드랴. 그 때는 손수 가서 냈슈. 그래도 그 뒤로는 지들이 장학금 많이 탔어. 지들도 어려웠지. 그렇게 노력해서 셋째 아들이 대학 졸업허구 삼성 들어갔지. 삼성 다니는데 며느리가 자꾸 미국 가서 박사 학위 따갔고 오라 해서 여기 와서 시험 봐서 교수됐지.

금은 세월이 너무 빨라. 지금은 입맛도 읎구 먹고 싶은 것두 읎구. 애들 대학 들어갔을 때 교수 됐을 때가 제일 기분이 좋았지. 나 어려서 공부를 하고 싶었는데 6·25때 열두 살이었어. 6·25 끝나고 오빠 학교 다니고 여럿 다니니께 우리 아버지가 너는 가지 말라구. 그 때만 해도 안 갔지. 가고 싶었는데 그게 한이 되는거야. 못이 되더라구. 지금도 한글 선생이 나보구 숙제 왜 이렇게 많이 해오냐구 그래. 계속 써갔구 가는겨. 국문은 알았어도 쌍받침 이런 거 잘 몰랐어. 문자도 못 넣구. 모를 적에는 받기만 했는데 자꾸 알구 싶구 그래. 그래서 배울라 그래. 예전에는 그릇들도 아꼈는데 언제 죽을지 모르니께 애낄 거 읎어. 하루하루 사는걸루 만족하며 살어.

전당포 한 구석에서 생활하는 아들을 보며 짠한 마음에 눈물을 흘리시던 젊은 시절 어머니는 지금도 그 이야기를 하시며 눈물을 훔칩니다. 가슴 속 한이 되어 남은 그 시절 그 모습이 잔상으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지금은 자식 모두 잘 되어 한없이 기쁘기만 합니다. 한글을 배우며 하루하루 즐겁게 살아가시는 어머니, 오늘 하루도 행복하십시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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