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암마을 돌담길, 집과 집들을 자연스럽게 잇고 있다
상태바
외암마을 돌담길, 집과 집들을 자연스럽게 잇고 있다
  • 취재·글=한관우/사진·자료=이정아·한지윤 기자
  • 승인 2019.06.02 09:0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옛 돌담길의 재발견<3>

외암마을의 돌담길, 제주의 돌담길보다 더 정겹고 최고로 친다
마을 곳곳을 흐르다가 끊어지는가 싶으면 다시 이어지는 5.3㎞
고샅길 따라 마을안으로 들어가면 돌담에 시선을 빼앗기는 이유
돌 천지마을, 논밭 일구며 캐낸 돌로 수백 년 담장을 쌓고 쌓아


아산시 송악면 외암리 외암마을은 예안 이씨 집성촌이다. 원래 자연부락으로 형성됐지만 조선 중기에 예안 이씨가 들어온 이후 자연스럽게 집성촌으로 자리 잡았다. 지금도 예안 이씨 등 60여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마을이다. 그래서인지 충청지방의 고유 격식을 갖춘 고택과 초가, 돌담과 정원이 옛 모습 그대로 보존돼 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의 집들은 보통 100년에서 200년씩은 족히 됐다는 설명이다. 또 주인의 관직명이나 출신지명을 따와 참판댁, 건재고택(영암군수댁), 송화댁, 신창댁 등 고택마다 택호가 있다.

마을 앞 돌다리를 넘어서면 다양한 표정의 장승들이 먼저 반긴다. 마을로 한 발 더 다가서면 자연석으로 쌓인 돌담길이 시작된다. 얼기설기 쌓여진 올망졸망한 돌들 사이로 담쟁이 넝쿨이 타고 오른다. 돌담의 특징은 큰 돌을 먼저 쌓고 그 사이로 작은 돌을 메워 넣은 허튼쌓기 식이다. 갖가지 이름 모를 여러 들꽃들이 돌담 사이에서 피어나고, 파릇한 잎을 피운 담쟁이넝쿨도 돌담을 감싸며 어우러져 자라고 있다. 우리 옛 담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모습이다. 사람들은 제주 돌담길보다도 외암마을의 돌담길을 더 정겹고도 최고로 친다는 설명도 곁들인다. 이 마을의 돌담길은 마을 곳곳을 흐르다가 끊어지는가 싶으면 순간 또 다시 이어진다. 길이만도 5.3㎞에 이른다는 설명이다. 돌담길은 마을 입구엔 비교적 한가운데 널찍이 나 있고, 마을 깊이 들어서면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형국이다. 갈라진 돌담길은 산자락과 이어지기도 하고 집과 집들을 자연스럽게 잇고 있기도 하다. 돌담길을 천천히 거닐다 보면 어느덧 마을을 감싸고 있는 설화산(雪火山)을 자연스럽게 오를 수 있다.
 

■ 외암마을의 돌담 길이 자그마치 5.3km
마을의 돌담길 사이로는 기와집, 솟을대문집, 초가집 등의 고택이 떨어진 듯 이어지면서 늘어서 있다. 담장의 길이, 지붕의 소재, 정원의 크기는 집마다 다르지만 집들의 원형은 한결같다. 그래도 모두 200여 년 전 처음 지어진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일 터이다. 개천을 넘어온 집이 없고 산기슭까지 침범하는 집이 없는 원칙을 지키고 있다. 담장은 보통 높지도 낮지도 않다. 어떤 집이든 까치발을 하면 마당을 들여다볼 수 있는 높이다. 곳곳에는 디딜방아, 연자방아, 물레방아도 있다. 오래된 것이 희귀한 요즘에는 정말로 소중한 풍경들이다. 어떤 집에는 유독 길고 넓고 높은 돌담도 있고, 어떤 집에는 낮은 돌담에 밭가에도 돌담을 쌓았다. 담을 쌓고도 돌이 많이 남아 돌담을 가급적 넓게 쌓았다는 설명이다. 외암마을의 돌담이 자그마치 5.3km에 이른다니 그럴 만도 하다. 긴 것만이 아니라 넓기도 참으로 넓어 보인다. 얼마나 넓을까, 눈대중으로 대략 보아도 1m는 넘어 보인다. 마을의 좀 낮은 돌담 위로 팔을 쭉 뻗어 봤더니 손끝이 담 끝에 닿지 않을 정도다. 이 정도로 외암마을의 돌담들은 그렇게 높지는 않지만 길고도 넓은 돌담이어서 특별히 인상 깊게 남는다. 이러니 고샅길을 따라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면 집들보다 돌담에 시선을 빼앗길 수밖에 없기 마련이다. 이러한 이유로 외암마을을 빛나게 하는 건 누가 뭐래도 고택과 돌담일 것이다. 마치 마을 전체가 돌담으로 된 미로에 둘러싸여 있는 것 같은 분위기다. 이곳의 담장은 누구를 배척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서로가 불편하지 않을 만큼 그어놓은 최소한의 경계이기 때문이다.

또한 돌담이 이웃과 세대를 잇는 핏줄이라면 물길은 사람에게 이로운 생명줄이다. 외암마을은 물길을 내 설화산 계곡의 물을 마을 안으로 끌어들였다. 물길은 빨래터가 되고 설화산의 화기를 누르는 방화수를 제공하기도 한다. 풍류를 즐기는 집주인에게는 정원의 소재로도 활용되기도 했다. 송화댁, 건재고택, 교수댁 집주인은 이 물길을 이용해 전국에서 소문난 정원을 꾸미기도 했다.
 

■ 아산 설화산 아래 외암마을은 돌이 천지
외암마을은 예부터 제주도처럼 삼다(三多)의 마을로 알려져 있다. 삼다란 돌·말·양반이 많다는 것을 뜻하는데, 외암마을의 마을길이 돌담길이듯 돌이 많고, 말(글 읽는 소리)이 많고, 양반이 많은 마을이라고 해서 삼다마을이라 했다는 설명이다. 선비가 모여 살면서 고과(考課; 조선시대에 인사행정에 사용했던 방법으로 이조(吏曹)와 병조(兵曹)에서 매년 음력 6월과 12월 두 차례에 걸쳐 관리의 공과(功過)를 조사해 그 벼슬을 올리기도 했고 내리기도 했다. 다른 말로는 도목정사(都目政事)라 했다.)독서하니 글 읽는 소리가 계속 들린다 해 말(言)이 많으며, 양반이 많다는 것은 외암마을 선비들이 벼슬길에 오르는 등 많은 인재가 배출돼 그리 불렸다는 설명이다.

이와 함께 예부터 설화산 아래 외암마을은 돌이 천지라고 했다. 논밭을 일구면서 캐낸 돌로 수백 년 담장을 쌓고 또 쌓았던 이유다. 마을사람들의 정성을 닮았는지 세월이 쌓인 건지 그만큼 돌담이 두툼해 졌다. 그 두툼한 돌담은 기와집, 초가집, 큰집, 작은 집 가리지 않고 쉬엄쉬엄 이웃을 잇고 이으면서 자연스럽게 마을의 돌담장이 됐으며, 돌담길이 만들어 졌다. 이렇게 마을의 돌담 줄기마다 옛집이 달렸다. 마을 어귀에 있는 신창댁을 시작으로 마을 동쪽 끝에 있는 외암 종손 댁과 사당 등이 달렸다. 그 밑으로는 송화댁과 참봉댁 등이 돌담길을 따라 과일이 달리듯 열렸다. 마을 한복판에 마을의 중심인 건재고택이 움텄고, 옆으로는 감찰댁, 위로는 교수댁이 이어져 달렸다. 마을의 기둥인 참판댁은 마을의 동쪽 양지바른 터에 싹을 틔웠다. 모두 입향조, 이사종의 후손집들이다.

외암마을의 옛집 중에서 사람이 살아 윤기가 흐르는 집다운 집이 바로 참판댁인 듯싶다. 참판댁은 고종이 구한말 참판을 지낸 퇴호 이정열(1868-1950)에게 ‘퇴호거사(退湖居士)’의 사호와 함께 하사해 지은 집이라고 한다. 퇴호는 일본이 굴욕적인 통상조약과 사법권이양 요구에 울분을 참지 못하고 낙향했다고 한다. 지금은 이정열의 손자인 이득선 종손이 종부와 함께 살고 있다. 또 참판댁의 사랑채에는 영친왕이 쓴 ‘퇴호거사’의 편액이 걸려 있다. 퇴호거사는 ‘강호에 물러나 숨어 살며 벼슬을 하지 않는 선비’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이 편액에 아주 잘 어울리는 굴뚝이 사랑채 굴뚝인듯 싶다. 기단에 기와 두 개를 포개 구멍을 낸 기단굴뚝이기 때문이다. 숨어 살기로 작정한 거사가 그 의지를 담아 만든 굴뚝으로 보인다.

참판댁에는 예부터 그랬듯 이 집안에서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비법으로 빚은 연엽주(蓮葉酒)가 익어가듯 이 마을의 전통과 역사가 말없이 함께 익어가고 있다. 연엽주를 담그는 참판큰댁에는 대문이 활짝 열려 있으며, 마루에서는 누룩을 만지는 여인의 모습이 여유롭다. 참판큰댁 종부다. 돌담을 구경하러 왔다는 말에 종부는 “저 돌담이 나 국민학교 땐 높이가 저 반 만했어요. 여기 땅에서는 돌이 자꾸 나오니까 자꾸 갖다 쌓는 거여.”라는 말을 남긴다. 이곳 외암마을에 들어서면서부터 나지막하지만 넓게 쌓인 자연석 돌담장이 매우 인상적이었으며, 돌담으로 연결된 골목길과 주변의 울창한 수림이 마을 경관을 더욱 고풍스럽게 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이 마을의 담장 또한 모두 돌담으로 만들어져 얼핏 제주도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들게도 하는 마을이다. 이 마을의 돌담을 모두 이으면 6㎞는 족히 될 것이라는 설명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이유다.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