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에도 상품가치 있는 '인간브랜드'가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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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에도 상품가치 있는 '인간브랜드'가 있다면
  • 한관우 발행인
  • 승인 2009.11.10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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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관우 편집국장의 홍성비전 희망수첩]
▲ 강원도 화천군이 소설과 이외수를 유치해 방송 활동 등 각종 이벤트를 통한 지역홍보 마케팅에 활용하는 점은 눈여겨 볼 일이다. 사진은 감성마을 입구.

얼마 전 소설 만다라의 작가 김성동과의 인연에 대한 글을 썼다. 우연히도 당시 김성동을 비롯해 이외수, 이문열, 박범신, 최학 등 내노라하는 문인들과 얽혀 인연을 나누던 시기였다. 세월의 기점이 1970년대가 저물어 가면서 10․26으로 비롯된 일련의 사건이 1980년대의 문을 열면서도 계속돼 5․18 등 민주와 자유에 대한 갈망이 봇물을 이루던 때였다. 당시 나는 10․26으로 인해 대학이 휴교에 들어갔는데, 당돌하게도 서울의 하늘아래 피신해 있던 신세였지만 그 어느 때 보다도 좋은 인연과 만남이 계속돼 행복한 시기였다. 당시 정부산하기관의 잡지사에 근무하던 고향선배 임 시인은 월급을 쪼개 매일이다시피 광화문과 청진동, 종로3가, 종로5가를 넘나들며 술잔을 뒤집는 일에 빠졌던 때였다. 물론 나는 문인 축에도 들지 못했고 기라성 같은 작가와 기자, 문인들 틈에서 언제나 말석이었다. 잡지사에서 원고료를 대신 받아서 술값을 지불해야 하는 소위 시다바리 노릇을 해야 할 때였다. 그래도 행복과 희망찬 기대가 청춘의 순수를 자극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면서 만난 작가들이 베스트셀러 작가로 세상을 풍미했고, 지금도 여전한 저력으로 활발한 작품 활동과 글쓰기에 대한 정력 또한 만만치 않다. 

소설 만다라의 작가 김성동과 꿈꾸는 식물의 소설가 이외수

소설가 김성동은 1975년 겨울, 이외수와의 만남에 대해 󰡒우연히 만나게 된 시인 강우식 선생이 웬 양아치처럼 생긴 사내와 인사를 시키는 것이었다. 독주에 절여 비틀어 짠 오이장아찌의 몰골에 촌스럽게 잠바 위에 후줄근한 바바리를 걸치고 있어 언뜻 오십 줄에 들어 보이는 사내는, 이외수(李外秀)였다. 그는 내가 어떤 소설에서 만들었던 사내처럼 철저하게 말라서 오히려 황홀한 육체의 소유자였다. 얼마나 투철하게 자기 자신의 삶을 사랑했기에 저토록 마를 수가 있는 것인가, 문득 부끄러움을 느꼈다. 무릇 정신을 담는 그릇이 육체일진대 그 육체의 모양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화두를 들고 침음(沈吟)하는 누더기 납자(衲子)의 얼굴에 화색이 돌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지론이라고 밝힌 적이 있다. 

김성동이 읽게 된 소설이 이외수의 '꿈꾸는 식물'이었는데, 그러나 김성동은 마지막 장을 넘기고 나서 책을 던져버렸다는 것이다. 철저한 악서(惡書)였다는 것. 읽는 자로 하여금 깊은 슬픔과 허무에 빠지게 함으로써 문득 사세(辭世)하고 싶게 만들어버리는 소설을 쓴 작가는 그리하여 고독지옥(孤獨地獄)으로 가야 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작가는 지옥으로 가야 할 것이고, 독자는 재미가 하나도 없는 극락(極樂)에서 자기를 극락으로 보내 준 작가를 원망이나 해야 할 것이다. 

이외수는 삶 자체가 그대로 소설이며 문학이다. 일체의 세속적인 상식이나 관습을 거부하며 홀로 우뚝해서 차라리 쓸쓸한 사내. 많은 사람들이 한 번의 회의도 없이 또는 회의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타성에 젖어 흘러가는 일상의 강물을 그는 철저하게 거부하며 혼자 그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고자 몸부림치는 한 마리의 고독한 물고기. 그 이상한 작가 이외수와 김성동은 몇 군데의 술집을 더 다닌 끝에 이윽고는 바람 부는 여인숙에 쪼그리고 앉아 밤을 밝혔고, 이튿날까지 밥 대신 술을 들이붓게 되었다고 한다. 문제는 그날 밤 김성동과 이외수는 세 번째의 여관에서야 겨우 방을 잡을 수 있었는데, 그것은 전적으로 이외수의 '발' 때문이었다고 한다. 방으로 들어간 김성동은 양말을 벗었는데 웬일인지 이외수는 그냥 구두를 신은 채였다는 것이다. 

김성동이 설명하는 당시의 상황은 가만히 보니 구두를 신은 게 아니라 그것은 '때'였다는 것이다. 거짓말 안보태고 1센티 두께의 때가 양말에 쓸려 잘 닦은 구두처럼 빛나고 있는 것이었고, 그래서 김성동은 이외수가 구두를 신고 있는 것으로 착각을 했던 것이다. 숙박계를 들고 들어오던 아주머니는 그 발을 보고 그만 '아이구머니나!'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방을 뛰쳐나갔고, 둘은 그곳을 쫓겨났던 것이다. 세 번째 집에서는 마침내 쥔아주머니가 떠다준 물에 이외수가 눈물을 철철 흘리며 발을 씻음으로써 겨우 쫓겨남을 면할 수가 있었다고 한다. 발만이 아니라 이외수는 세수도 양치도 하지 않는데, 이상한 것은 조금도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것은 분명히 이외수가 획득한 어떤 '경지'일 것이며,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외수가 일부러 그런 기행(奇行)을 꾸미는 것이 아니라, 세수를 하고 양치를 하고 발을 씻는 따위의 일상적 행위를 잊어버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밥도 잘 안 먹고, 최소한의 생존을 유지시켜 줄 수 있는 극소량의 밥을 어쩌다 겨우 먹을 뿐, 지금은 술을 끊었지만 그 때는 늘 술로 때우는 사람이라는 것이 김성동이 말하는 이외수론이다. 

혼의 소설을 쓰고자 하는 작가정신의 소유자 이외수

그런가 하면 이외수는 무예(武藝)의 고수다. 중국집에서 나오는 대나무 젓가락을 들어 던지면, 5미터 전방의 철제 책상을 뚫고 지나간다. 내공(內攻) 또한 상당한 경지일 것으로 추측되며, 고스톱 따위의 투전을 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해서 선(先)을 잡을 수 있는 비법도 갖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그의 본령은 역시 소설이다. 혼의 소설을 쓰고자 하는 선열한 작가정신의 소유자가 바로 이외수라는 사실이다. 

소설가 이외수와의 만남은 1980년이었는데 시절이 하 수상하던 시기였다. 소설가 데뷔를 꿈꾸던 시나리오 작가 상준 형이 술 한 잔하자고 해 끌려가 만났다. 그리고 그날 나는 술집에서 이외수와 첫 만남에 '동갑'이 되었다. "나는 46년 개띠야, 자넨~"이라며 나이를 묻길래 "58년 개띠"라고 했더니 "야, 동갑이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결국 '띠 동갑 선후배'의 만남은 "이제부터 형이라고 해"로 시작돼 지금까지 "외수 형님"으로 부르게 됐다. 기자를 하다가 출판사 일을 하면서 춘천의 교동 집을 자주 찾아가 밤이 밝도록 인생사를 비롯해 문학이며, 삶의 곡절을 이야기하곤 했는데, 고향으로 발길을 돌린 이후에는 모든 것이 뜸해졌다. 하지만 매스컴을 통해 '외수 형'의 근황을 확인하면서 춘천 교동에서 화천의 감성마을로 삶의 터전을 옮긴 사연을 접했다. 그러면서 양평에 있는 소설가 김성동과 홍성의 인연이 떠올랐고, 홍성에도 '외수 형'과 같은 소위 상품가치가 있는 '인간브랜드가 있다면 어떨까에 대한 호기심이 야릇하게 뇌리를 스쳤다. 

강원도 화천군 상서면 다목리의 '다목 감성마을'은 소위 요즘 '이외수' 때문에 뜨고 있는 마을이다. 이외수가 촌장을 맡고 있는 감성마을은 지난 2006년 유명건축가의 설계로 건물을 짓고 집필공간으로 출발했다. 이외수는 오랜 동안 춘천시 교동이 터전이었다. 춘천 교동 집은 변변한 집 한 칸 없던 이외수가 1982년 작품 <칼>을 써 마련한 집이다. 이곳은 데뷔작 <훈장> 이후 작가로서 두 번째 전환점이 됐다는 <벽오금학도>를 시작으로 <장외인간>까지 숱한 베스트셀러를 쓴 '이외수 문학의 산실'이었다. 그런 이외수가 고향과 같은 교동을 떠나기로 한 것은 집 인근이 개발되면서 공사 소음과 먼지로 건강을 챙기기 어려운 데다 주변이 소란스러워 글쓰기가 더 이상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다목리의 새 집은 이외수가 2003년부터 옮겨갈 집을 찾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 강원도 화천군이 계획적으로 '기인 소설가 이외수'를 유치하기 위해 제공한 것이다. 화천군은 이곳에 문학 테마마을을 조성하고 있다. 집필실 등의 주거공간을 만든데 이어 문학전시관을 건립, 이외수 개인 소장품과 작품, 유명작가의 유품 등을 전시하고 갤러리로도 활용할 계획이다. 또 연수관․야외극장․산책로를 비롯해 들국화 군락지 등을 조성한다. 이 사업에 26억 원을 들인다고 한다. 이외수는 이곳을 자연이 주인인 마을, 감성이 살아나는 마을이란 뜻으로 '다목 감성마을'이라 이름 붙였다.
 
이외수의 감성마을에는 연간 4000여명의 관광객이 다녀가고 있어 이 지역 30여개 숙박업소와 식당 주인 등은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다고 한다. 감성마을에는 평일에도 이외수의 강의를 듣기위한 40~50여명의 수강생들로 붐비며, 주말방문객만도 200~300여명이 넘는다고 한다. 산천어축제에도 이외수, 쪽배축제에도 이외수, 온통 화천군이 이외수의 도시가 되어 버린 듯 이외수를 활용한 마케팅에 열을 올리고 있는 점, 원주의 박경리문학관, 통영출신 예술가들을 지역홍보에 활용하는 등의 성공사례를 홍성에서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제는 상품가치가 있는 지역의 특산품뿐만이 아니라 사람, 문화, 역사적 자산 등에도 과감히 눈을 돌릴 때이다. 홍성에는 이러한 가치 있고 경쟁력 있는 자산들이 많다. 이러한 요소들을 발굴, 개발하는 일이 지역의 경제를 활성화하고, 관광객을 끌어들이며, 인구를 유입하는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지역의 브랜드는 주민들이 직접 발굴해 명품화 시킨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새 충남도청 소재지 홍성'에서도 문화예술인 등 다양한 분야에서 고향의 우수한 인재를 키우거나 불러들이고 영입해 가치가 있는 '인간브랜드'를 만들고, 지역의 특산품 등을 활용 대표 브랜드로 상품화해 희망과 행복이 넘치는 마을로 홍성을 가꾸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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