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의 분수령 '서녘으로 장수, 동녘으로 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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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의 분수령 '서녘으로 장수, 동녘으로 함양'
  • 유태헌(홍주신문 서울본부장, 홍성고 20회)
  • 승인 2010.04.05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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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헌의 백두대간 종주기] 5구간

최근에는 주 5일제 근무, 공무원들의 연가사용, 건강 지키기 등 수 많은 갖가지 사연을 안고 휴일뿐만 아니라 평일에도 삼삼오오 산을 오르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산은 물을 건너지 않고, 물은 산을 넘지 않는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인 까닭이다. 옛 사람들은 산과 강이 서로를 넘보지 않는다고 여겼다. 비록 높은 산이 이웃해 있어도 사이에 물이 있으면 산줄기는 돌아갔고, 평야에서도 산맥이 흐르면 물줄기는 물러선다고 했다. 백두대간은 그렇게 산과 물이 평화로운 한반도를 달린다. 특히 산꾼들에게 백두대간의 의미는 속이 더 깊다. 백두대간은 민족의 영산 백두산에서 민중의 한이 서린 지리산까지 거침없이 뻗어 내린 산줄기다. 금강산을 넘고 설악산을 거쳐 오대산과 태백산, 속리산을 이어 달린다. 그 힘이 하도 세차고 맑아 한반도를 받치고도 남는다. 덕유산을 거쳐 지리산에 닿아서도 숨가쁨을 모른다. 그 장엄한 달리기에서 이 땅의 숱한 물줄기를 낳고, 평야를 길러낸다. 백두대간은 곧 이 땅이며 생명이다. 올해 들어 본지는 국토의 등뼈를 밟아나가는 유태헌(홍주신문 서울본부장홍동출신·홍성고 20회) 출향인의 백두대간 종주기를 비롯한 산행기를 연재,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편집자 주>

 

 

 

 


산행일자 : 2010년 3월 20일~21일
구간 : 사치재-시리봉-복성이재-봉화산-월경산-중재
도상거리 : 19.55킬로미터
산행시간 : 9시간

 

 

 

 

 

 

백두대간 네 번째 날이다. 언론에서 난리법석을 떨었던 황사경보 상황에서 잠실을 출발하여 죽암휴게소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뒤 사치재로 향한다. (밤 1시 50분) 차량 행렬이 간간이 스쳐가는 88고속도로를 뒤로하고 새벽 4시 10분 경 지리산 휴게소에 도착하니 춘분이 지났지만 날씨는 쌀쌀하고 바람이 거세다.

산불로 인해 산림자원이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는 사치재로 출발한다. (새벽 4시 40분경) 15년이란 긴 세월의 흐름 속에서 잡풀들이 터를 잡고 간간이 불타고난 소나무들의 앙상한 모습에서 산불조심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잡목들을 헤집고 오르는 대간길에 가끔씩 고사목들이 쓰러져 있어 내딛는 발걸음을 더디게 한다. 어둠 속 산길을 30여분 오르니 697봉이다. 새맥이재를 지나고 시리봉을 비켜 돌아가고 소나무가 빽빽이 들어찬 숲속길이 이어진다. 새벽을 알리는 산새들의 지저귐이 귓가에 들려오니 아침을 밝히는 새벽이 멀지 않다. 싸리나무 줄기를 잡고 아슬아슬 스릴 넘치는 스키도 탄다. 걱정했던 황사는 기우에 지나고 화창한 날씨에 바람은 차가워도 품안에 스며드는 것을 보니 봄이 가까운가 보다.

약간의 오르막을 오르다보니 돌무더기가 잔뜩 쌓인 아막서 터다. 옛날 백제에서는 <아막성>, 신라에서는 <모산성>이라 하여 치열한 쟁탈전을 벌렸던 곳으로 전북지방 기념물 제38호이다. 성의 전체둘레는 632.8m로 시리봉과 봉화산 사이에 있는 성이다. 조심조심 너덜 길을 내려서니 복성이재이다. (아침 6시 40분) 옹기종기 모여앉아 아침식사를 한다.

작은 능선을 오르내리며 좁은 길이 가로놓인 치재에 이른다. 치재에서 봉화산으로 오르는 완만한 경사의 긴 능선은 유명한 철쭉터널과 억새밭이다. 철쭉꽃이 피면 다시 오고픈 마음을 뒤로 하고 철조망에 달린 오색리본에 위안을 삼는다. 복성이재에서 봉화산에 오르는 길은 잠깐 사이에 많은 고갯길을 지난다. 치재, 꼬부랑재, 다리재 등을 지나면 백두대간은 어느덧 봉화산(919.8m) 정상에 이른다.

선비들 글 읽는 소리 끊이지 않는 함양고을 

매년 봄이면 철쭉제가 벌어지고 가을에는 정상부터 이어지는 억새 평원이 장관이다. 남원군 야영면과 장수군 번 앞면에 걸쳐있는 봉화산 정상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남원고을을 뒤로 하고 덕유산을 향하여 내쳐 달린다. 분수령 동쪽은 최치원 이래 선비들의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 함양고을이요, 서쪽은 논개로 대표되는 3절의 장수고을이다. 동남쪽 억새꽃무리 너머로 강남제비가 흥부를 찾아와서 박 씨를 떨어뜨려주던 아영의 성리마을이다. 땀을 식히고 한달음에 달려가면 이젠 남원과도 이별이다. 이후 백두대간의 분수령은 서녘으로 장수, 동녘으론 함양고을을 양 날개에 껴안고 이어진다.

신라말기의 정치가요, 시인인 고운 최치원(857~?)은 함양사람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다. 당대 최고의 문장가로 이름 떨치던 그는 신라 말 경주에서 태어나 가야산에 들어가 살다가 어느 날 입산시를 남긴 채 홀연 자취를 감춘다. 신라의 국운이 다해가는 9세기 중반 12세의 나이에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 28세 되던 해에 고국 신라에 돌아온 그는 전북 태인과 정읍, 충남 서산의 수령을 거쳐 함양태수로 부임하면서부터 함양과 인연을 맺게 된다.

함양 사람들은 1100여년이 지난 지금도 고운을 잘 기억하고 있는데, 이는 그가 최초로 조림한 숲 덕분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인공림이라는 상림(上林, 천연기념물 제150호)이 그것이다. 함양읍 서쪽을 흐르는 위천은 예전에 물이 강둑을 자주 넘어 함양 읍내를 온통 물바다로 만들어 놓곤 했다. 태수로 부임한 그는 홍수도 막고 바람 피해도 줄이기 위해 지리산과 백운산 일대의 활엽수를 강둑 주변에 옮겨 심어 숲을 조성했고 그 뒤로 큰 홍수에도 함양은 온전할 수 있었다. 당시 숲의 이름은 대관리 이며, 그 길이는 5km에 80~200m의 폭으로 조성됐다. 그러나 지금은 일부가 훼손되고 약 2km 정도의 숲인 상림만이 남았다. 상림은 1000년이 넘는 세월동안 함양의 넓은 들을 지켰고, 사계절 휴식처로서의 역할을 해내고 있으니 어느 고을이 가진 국보급 문화재만큼 소중한 유산임에 틀림없다.

함양사람들이 상림 다음으로 자랑하는 유산은 군청 앞에 있는 학사루이다. 최치원이 자주 올라 시를 짓던 곳이라 하여 지은 이름인데 조선시대에도 많은 학자들이 올라 시를 읊었으니 이름에 걸맞는 누각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학사루는 고고한 이름과는 달리 조선시대 피 튀기는 투쟁이 벌어졌던 원인 중 하나를 제공하기도 했다. 「함양군지」는 이 학사루에서 일어났던 일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즉 성리학자요, 사림학파의 정신적 지주였던 김종직(1431~1492)은 함양 군수로 부임하여 학사루를 사랑했다. 그 무렵 사림학파의 정쟁의 상대였던 훈구파의 유자광(1439~1512)은 더 높은 직책인 경상도 관찰사로 내려와 있었다. 서자 출신으로 자수성가한 유자광이 함양을 들렸는데, 유자광을 기피인물로 삼았던 김종직은 공무를 핑계로 피해 있었다. 유자광이 직위가 높다 하더라도 서자 출신이기에 굽신 거릴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지만, 속사정은 유자광이 남이(1441~1468)장군을 모함하여 죽게 하였기 때문이다. 함양에 도착한 유자광은 상림을 둘러보고 학사루에 올라 "이 아름다운 고장에 와서 그냥 갈 수 없다"며 시 한수를 남기고 떠났다. 김종직이 돌아와, 학사루에 올라가 보니 못 보던 시판이 걸려 있었다. 유자광의 것임을 안 김종직은 크게 노하였다. "어찌하여 소인배의 글이 학사루에 걸렸느냐? 당장 철거토록 해라." 결국 떼어낸 시판은 불에 태워버리고 말았다. 이 일을 전해들은 유자광은 매우 분노했다. 세월이 흘러 김종직이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제자들과 영남출신의 유림들이 대거 등용되면서 훈구파에 맞서는 신진세력을 이루자, 유자광은 김일손이 「성종실록」사초에 그의 스승인 김종직이 지은 <조의 제문>을 실은 것을 트집 잡았다. 이는 세조가 왕위를 빼앗은데 대한 비유라고 연산군을 충동질 하였던 것이다. 마침내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났고, 김종직은 죽은 시체를 다시 끄집어내 사형하는 부관참시까지 당하는 참혹한 수모를 겪어야만 했다. 함양 지곡면 개평리에 뼈를 묻고 김종직에게 글을 배웠던 정여창은 세자(연산군)에게 강론할 정도로 학문에 뛰어났으나 그 역시 무오사화에 연류 되어 유배되었다가 죽었다.

선비의 자존심 '좌강 안동이요, 우강 함양이다'

 

 

 

 

 

 

함양 선비의 자존심, 정여창! 조선시대의 함양의 명성은 참 대단했다. '좌강 안동이요, 우강 함양이다.' 함양 노인들이 함양 고을의 뼈대를 말할 때 지금도 곧잘 이용하는 말이다. 경상 좌로는 낙동강의 동쪽을, 경상 우로는 낙동강의 서쪽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 말엔 낙동강 동쪽에서 훌륭한 유학자(퇴계 이황)를 많이 배출한 고을이라면 낙동강 서쪽에서는 함양이 그렇다는 자부심이 배어 있다. 함양 사람들의 자부심 한 중간에는 정여창(1450~1504)이 지리산처럼 우뚝 서 있다. 학덕으로 조선의 성리학사에 큰 족적을 남겨 김광필, 조광조, 이언적, 이황과 함께 「동방5현」에 꼽히는 정여창은 김종직에게서 글을 배웠고 자신이 안의현감을 지내기도 했다. 왕세자인 연산을 가르쳤을 정도로 학문이 빼어났던 정여창은 벼슬길로 나가 실천적 도학사상으로 왕도정치를 구현하고자 했으나 김종직과 함께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함경북도 종성으로 유배되어 관청의 화부로 노역하다가 1504년에 죽었다. 제자들이 2개월간 운구하여 수동면 남강 건너 승안산 기슭에 묘소를 마련했으나 갑자사화 때 스승처럼 부관참시라는 끔찍한 일을 당하기도 했다.

지곡면 소재지인 개평 마을은 정여창 고택이 있는 하동 정 씨들의 집성촌이다. 골목길로 조금 들어가면 영남 남부의 대표적 양반 고택이 반긴다. 솟을대문엔 충신과 효자의 정려편액이 무려 다섯 점이 걸려있고 그 중 󰡐충효절의(忠孝節義)󰡑라고 걸려있는 현판은 마치 백마의 꼬리털로 만든 대형 붓으로 쓴 듯 보는 사람을 위압하고도 남음이 있다. 󰡐우도함양󰡑의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조상의 정신을 지키려 애쓴 덕에 꼿꼿한 선비 집안의 정갈한 기품이 가득하다. 최치원, 김종직, 정여창 등 함양을 거쳐갔던 선비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역사의 발자취가 묻어 있는 대간길을 걷노라면 선비들의 충절에 머리 숙여진다. 다음 백두대간 종주에는 역사가 살아 숨쉬는 동편제의 고장 비전마을, 이성계의 황산대첩비, 흥부놀부마을, 함양의 상림, 학사루, 정여창 고택 등을 두루 살피는 의미 있고 여유 있는 종주를 해야겠다. 광대치를 지나 월경산(981.9m) 삼거리를 지나니 목적지 중재에 도착한다.

(오후 12:00) 미리 내려온 대원들이 끓여놓은 김치와 라면의 절묘한 안주에 소주 한잔을 한달여 만에 마셔본다. 술을 좋아하지만 대체식 10일 단식 후 중요하다는 후단식을 2주 이상 하고보니 한잔 술에도 속이 얼얼하다. 대체식 단식 후 보건소에서 체성분 검사 결과 체중은 5kg 감량, 혈압은 120-70, 근육량 강화, 기초 대사량 증가 등 모든 기능이 몰라보게 좋아졌다. 그중에 체중 5kg 감량은 몸에 독소인 내장지방 0.6kg, 피하지방 2kg, 체지방 2kg 감소, 몸에 필요한 근육량은 2.6kg이나 증가되는 놀라운 변화다. 산기하게 생각하는 나에게 대체식 단식을 권유한 친구는 10일간의 단식이 비우기라면 앞으로 10일간의 장관리 프로그램과 10일간의 채우기 프로그램에 참여하란다. 고령화 시대에서 인생의 육십은 한창 일할 때다. 인생의 이모작을 위해서 뜻있는 몇 사람과 시작한 사업이 바쁘다는 핑계로, 대체식 후단식 20일은 다음으로 미뤘지만 내 마음은 지금이라도 바로 해보고 싶다. 꾸준히 등산하고 운동을 해 체중 63kg을 20년째 유지하기에 감소될 것이 없을 줄 알았는데 대체식 10일단식 후 필요 없는 각종 지방들이 5kg이나 감량되고 보니 20년은 젊어진 기분이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중기마을로 내려와 김치찌개와 각종 토속음식에 밥 한공기가 금새 바닥난다. 특히 된장에 박은 고추 인기는 2~3번 리필하고도 직접 갖다먹는 모습에서 고향의 맛을 느껴본다.

오후 2시 10분경 출발, 버스전용차선을 이용 시원하게 서울로 달려간다. 꽉 막힌 승용차들이 우릴 보고 부러워한다. 오후 6시 20분경 잠실에 도착. 일산 팀과 인천 팀을 보낸 후 서울 팀이 오랜만에 오붓하게 생맥주 한잔에 정담을 나눈다. 다음 6구간은 코뿔소 산악회 시산제다.

이은상의 「산악인의 선서」: 산악인은 무궁한 세계를 탐색한다. 목적지에 이르기까지 정열과 협동으로 온갖 고난을 극복할 뿐 언제나 절망도 포기도 없다. 산악인은 대자연에 동화되어야 한다. 아무런 속임, 꾸밈도 없이 다만 자유와 평화 사랑의 참 세계를 향한 행진이 있을 따름이다. 유태헌(☎010-3764-3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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