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야말로 어쩌면 산을 오르는 것과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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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야말로 어쩌면 산을 오르는 것과 닮았다
  • 유태헌(홍주신문 서울본부장, 홍성고 20회)
  • 승인 2010.04.16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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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헌의 백두대간 종주기] 6구간

최근에는 주 5일제 근무, 공무원들의 연가사용, 건강 지키기 등 수많은 갖가지 사연을 안고 휴일뿐만 아니라 평일에도 삼삼오오 산을 오르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산은 물을 건너지 않고, 물은 산을 넘지 않는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인 까닭이다. 옛 사람들은 산과 강이 서로를 넘보지 않는다고 여겼다. 비록 높은 산이 이웃해 있어도 사이에 물이 있으면 산줄기는 돌아갔고, 평야에서도 산맥이 흐르면 물줄기는 물러선다고 했다. 백두대간은 그렇게 산과 물이 평화로운 한반도를 달린다. 특히 산꾼들에게 백두대간의 의미는 속이 더 깊다. 백두대간은 민족의 영산 백두산에서 민중의 한이 서린 지리산까지 거침없이 뻗어 내린 산줄기다. 금강산을 넘고 설악산을 거쳐 오대산과 태백산, 속리산을 이어 달린다. 그 힘이 하도 세차고 맑아 한반도를 받치고도 남는다. 덕유산을 거쳐 지리산에 닿아서도 숨가쁨을 모른다. 그 장엄한 달리기에서 이 땅의 숱한 물줄기를 낳고, 평야를 길러낸다. 백두대간은 곧 이 땅이며 생명이다. 올해 들어 본지는 국토의 등뼈를 밟아나가는 유태헌(홍주신문 서울본부장·홍동출신·홍성고 20회) 출향인의 백두대간 종주기를 비롯한 산행기를 연재,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편집자 주>

산행일자 : 2010년 4월 3일~4일
구 간 : 중기마을-중고개재-백운산-영취산-깃대봉-육십령
도상거리 : 19.07km
산행시간 : 8시간 30분 소요

 

 

 

 


가운 사람들과 잠실에서 만나 인사를 나누고 버스에 오른다. 새벽 공기를 가르며 중기마을에 도착하니 새벽 3시다. 서쪽 하늘에 떠있는 달과 북극성의 안내를 받으며 힘차게 출발한다(03:40). 산행 들머리는 함양군 백전면 운산리 중기마을이다. 계곡을 가로지른 다리를 지나 40여분 걸어 올라가면 중재에 닿는다(04:20). 전라․경상을 가르는 백두대간의 백운산 서북릉길은 대체로 완만하다. 중재에서 40분 정도 오르면 중고개재다(05:00). 우측은 중기마을이고 좌측은 지지리 부락으로 전북 장수군의 가장 오지 마을이다. 중고개재에서부터 서서히 고도를 올리다가 정상 직전의 오르막에서 급경사를 이룬다. 선두대장 바로 뒤에서 한 번도 선두를 빼앗기지 않고 숨차게 오르니 무덤 두 기가 보인다. 이곳을 정상으로 착각하기 쉽다. 북쪽으로 헬기장을 지나면 드디어 백운산(1278.6m) 정상이다(06:20).

 

 

 

 

 

 

흰 구름산이라는 백운산은 같은 이름의 전국 30여 개 산 중 가장 높고, 사방이 탁 트인 훌륭한 곳으로 마침 일출의 장관을 맞이할 수 있었다. 남도의 내노라하는 명산들이 동서남북 어떤 방향이던 거칠 것 없이 한 눈에 들어온다. 천왕봉에서 노고단까지 지리산의 파노라마는 그리움의 경지를 넘어 차라리 연민이다. 반야봉의 자태는 너무 뚜렷해 민망스럽기까지 하다. 북쪽으로는 덕유산이 태평스럽게 앉아 있고 그 너머에 황석산, 기망산, 월봉산이 뻗대고 있으며, 멀리 동쪽으로는 수도산, 가야산, 황대산도 가물거린다. 백운산과 맥을 같이한 우측의 쾌관산(갓걸이산)과 억새가 멋진 장수군의 장안산이 좌측에서 마주보고 있다. 섬진강과 낙동강의 분수령으로 행정구역은 전북 장수군 번암면과 경남 함양군 백전면, 서상면이다.

인생이야말로 어쩌면 산을 오르는 것과 닮았다. 그렇다! 흔희 마라톤을 인생에 비유하지만 등산이야말로 우리네 삶을 있는 그대로 대변하지 싶다. 오르내림이 그렇고, 한발짝씩 정상을 향해 오름이 그렇고, 이리저리 갈림길이 있음이 그렇고, 걷다가 돌아보면 지나온 발자취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음도 그렇고, 정상에서 느끼게 될 짜림함과 성취감 또한 그렇다. 그러니 함께 의지하며 어려움을 나누는 5기 백두대간 동료들의 소중함이야…. 산은 오를 때보다 내려가는 길을 더 조심해야 한다. 오를 때는 길을 잃어도 쉽게 찾을 수 있지만 내려갈 때는 잘못하면 엉뚱한 곳으로 가게 되며 돌이키기 어렵다. 이 또한 인생과 마찬가지 아닌가?

아침식사를 마치고 영취산을 향해 출발한다(07:00). 여기서부터 백두대간 길은 가파른 내리막길이다. 조심조심 내려오니 선바위고개다. 10여 분을 가파른 길을 숨 가쁘게 오르면 영취산(1075.9km)정상이다(08:20). 산세가 신성스럽고 빼어나다는 뜻의 영취산은 불교의 성지인 고대 인도 마가타국 수도 왕사성에 있는 산에서 따온 이름이다. 호남과 충남의 산줄기를 이어주는 금남호남의 출발점이 바로 영취산이다. 무령고개, 장안산(1237km)을 거쳐 광양 백운산까지 호남 정맥을 이루고, 북으로 대둔산, 계룡산까지 금남정맥을 이룬다. 섬진강, 금강, 낙동강의 분수령으로 행정구역은 전북 장수군 번암면과 경남 함양군 서산면이다.

논개,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알 정도로 뛰어났다

잠시 휴식 후 능선길을 걷다보면, 좌측으로 주촌마을이 보인다. 논개 열사의 생가가 있는 마을로써, 원래 생가는 대곡저수지 부근이었으나 수몰되어 현재는 남쪽에 생가를 복원시켰다. 논개는 1574년 대곡리 주촌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태어난 때가 갑술년, 갑술월, 갑술일, 갑술시 즉 개해 개월 개일 개시였다. 그래서 <사람이 아닌 개를 낳았다> 해서 <논개>라 했다. 논개는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알 정도로 뛰어났고 이미 10세 때 고상한 기품을 갖추었다. 하지만 당시 서당에 다니는 또래 악동들의 짓궂은 장난이 그치지 않았다. 항시 말없이 묵묵히 견디던 논개는 어느 날 글귀 하나를 악동들에게 넘겨주었다.

꽃이 높은 가지에 있으니 사람이 꺽지 못하고(花高人不折)
풀 섶이 무성하니 개 다니기 어렵네(草盛拘難行)

즉 자신을 높은 가지에 비유했고, 악동들을 풀섶을 헤치고 다니는 개로 비유한 것이다. 이후로 논개에게 희롱을 거는 아이들이 없었다 하니, 논개도 아이들도 그만하면 꽤 똑똑한 셈이다. 논개가 13세 되던 해 부친 주달문이 세상을 떠났다. 주색잡기에 빠져있던 논개의 숙부 주달무는 당시 토호 김풍헌을 찾아가 놀이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논개를 넘기려는 계략을 꾸몄다. 김풍헌은 백치 불구인 자신의 자식을 장가보내며 논개를 민며느리로 사오는 대가로 논개의 숙부에게 논 세 마지기와 염전 삼백냥, 당백포 세 필을 주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논개 모녀가 친정으로 도망가자 주달무도 도망갔고 김풍헌은 이들을 관아에 고발한다. 일이 이렇게 되자 주달무는 오히려 논개 모녀를 상대로 장수현감에게 소장을 올렸다. 결과 <죄없는 사람을 무고해서 괴롭히는 처사는 있어서는 안 된다>라고 판결이 났다. 논개 모녀는 무죄 방면됐다. 이때 판결을 맡았던 장수현감이 바로 임진왜란 때 제2차 진주 전투에서 싸우다 전사한 최경회(1532~1593) 장군이다.

오갈 곳 없게 된 논개 모녀는 드난살이로 현감 부인의 병수발을 했다. 하지만 곧 현감부인은 세상을 뜨고, 논개는 최경회와 부부 인연을 맺게 된다. 이후 최경회가 고향에서 모친 시묘 살이를 하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경상부병사가 된 최경회는 진주성 싸움에서 작렬히 전사한다. 당시 복수를 택한 논개는 왜군들의 승전 축하연에 기생으로 변장하고 들어가 용맹하기로 이름난 왜장 게야무라 후미스케를 껴안고 10여 일간 내린 장마비로 강물이 넘실대는 남강에 몸을 던져 자결한다. 신의 칼이라는 별명을 가진 게야무라는 쇼군인 가토 기요마사의 선봉장으로서 승승장구하던 전설적인 사무라이다.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은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중략)

흐르는 강물은
길이길이 푸르리니
그대의 꽃다운 혼
어이 아니 붉으랴.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논개의 충절과 애국적 정열, 아름다운 자태는 기생이라고 알고 있는 우리들에게 열사였음을 일깨워 주는 변영로 시인의 <논개>라는 시이다.

 

 

 

 

 

 


함양과 장수 잇는 고갯길 <육십령>의 사연들

이번 대간 길은 삼거리가 유난히 많다. 덕운봉 삼거리, 옥산골 삼거리. 민재골 삼거리 등 논개사당과 대곡저수지가 한 눈에 들어오는 전망바위를 지나 깃대봉(구시봉)에 오른다. 신라와 백제의 국경지대로서 그 아래 주둔하고 있던 군사들이 기를 꼿았다고해서 깃대봉으로 불렸으나 옛날 한 풍수가가 이 산에 올라 산의 형태가 구시형이라 하여 2006년 1월 6일 구시봉으로 지명이 변경되었다. 민재골 삼거리를 지나면서 서서히 고도를 높여간다. 눈앞엔 덕유산(1614m)의 커다란 덩치가 점차 가까워진다. 이렇듯 서서히 고도를 높이던 백두대간이 덕유산으로 건너가기 전에 문득 숨을 고르는 곳이 있으니 날머리인 육십령(734km)이다(12:00). 함양과 장수를 잇는 이 고갯길은 옛날엔 신라와 백제의 국경이었다. 두 나라의 전투가 벌어졌던 고개였으니 전하는 사연이 어디 한둘이랴. 실제로 육십령은 그 수십굽이 만큼이나 수많은 사연들을 품고 있다. 첫째는 동쪽의 안의 감영에서도 60리고 장수 감영에서도 60리라 해서 붙여졌다는 설이다. 두 번째는 이 고개를 넘기 위해서는 크고 작은 산굽이를 60개나 넘어야 한다고 해서 붙여졌다. 가장 널리 알려진 이야기는 산적들이 너무 많아서 함부로 고개를 넘나들지 못하고 산 아래 주막에서 60여 명의 장정들이 모일 때까지 기다렸다가 죽창과 몽둥이로 무장하고 떼를 지어 넘어야 했다는 데서 유래했다. 한국땅이름협회 배우리 명예회장은 육십령을 순수한 우리말로 풀었다. 고개가 길고 완만하여 <여슨(느슨) 고개>라 했는데 나중에 <여슨을 예순>으로 보아서 육십령이란 이름을 얻은 것이라 한다.

그러나 이곳 육십령은 일제시대 문태서 의병장을 비롯한 수많은 애국지사의 구국사상이 서려있는 현장이었으며, 6·25 전쟁 당시에는 북한군이 퇴각하면서 경남의 우익인사 삼백여 명을 압송하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이곳에서 순국하게 한 곳이다. 고개를 중심으로 동쪽엔 함양, 안의, 도천, 서쪽엔 장계, 장수, 명덕 등의 산간분지를 형성하고 있다.

오늘날 육십령은 경남과 전북뿐만 아니라 서울로 연결되는 중요한 대문이다. 육십령에 도착하여 백두대간 5기 시산제를 올린다. 무사안전과 대원들의 건강,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는 시산제는 종교와 풍습에 관계없이 산악인이면 누구나 엄숙하게 치러진다. 이은상 선생님의 산악인의 선서를 마지막으로 시산제를 마치고 늦은 점심을 해물매운탕에 소주 한 잔으로 배를 채운다. 이번 대간 길은 유난히 힘들었는지 서울로 올라오는 버스 안은 고요하고 적막하다. 차창 밖으로는 저녁노을이 황홀하다. 낙엽이 떨어지기 직전에 단풍이 황홀하게 드는 것이나 지는 저녁노을이 황홀한 것처럼 인생의 마지막도 황홀하게 장식해야 된다고 생각하니 이번 백두대간에 큰 의미를 주고 싶다. 잠실에 도착, 다음 대간을 약속하며 집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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