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마의 행정중심지로 질곡의 세월 이겨낸 으뜸부자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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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마의 행정중심지로 질곡의 세월 이겨낸 으뜸부자마을
  • 이은주 기자
  • 승인 2010.04.16 14: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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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마면 부평리


금마면 부평리는 금마면의 중심지로 예로부터 기름진 땅, 즉 들이 있다 해서 부평으로 통칭되었다. 면지에 따르면 신라 말엽에 신라와 후백제 그리고 고려의 싸움터로서 고려가 통일하기까지 몇 번의 격전을 치뤘던 곳이라고 한다. 이후 일제강점기 말엽에 상봉과 평리로 분구되었는데 한국전쟁 이후 잠시 합구되었다가 1960년대에 와서 다시 분구되어 현재에 이르게 됐다. 부평리의 평리와 상봉마을은 신평이씨 입향조는 훤으로 무오, 갑자사화로 부친과 조부가 화를 입게 되자 사금으로 개명하고 고모부인 첨사 김승헌에게 양육되었다. 그 후 대과를 준비하던 중 기묘사화(1519년)가 일어나자 정암 조광조의 사면을 집단 항소하였고 다포로 낙향하여 시양 부모에 대한 도리를 다하였다고 한다. 그후 훤의 후손들이 대대로 살아왔으며 훤의 12대손 이석정 대에 와서 이 일대의 신평 이씨를 다포파라 할 정도로 집안이 번창했다고 한다.


역사 속 질곡의 시련딛고 일어선 평리마을

평리마을은 금마면의 중심지이자 면소재지로 면사무소를 비롯한 농업협동조합과 금마초등학교, 보건지소 등 각종 농촌서비스 기능체들이 입지해 있다. 80여년의 역사를 간직한 금마면사무소는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의 조선 식민지배를 위한 금마면의 행정부 역할을 담당했고 한국전쟁기에는 인민위원회 사무실로 활용돼 인민군들이 주둔하면서 인민위원회를 설치하여 면사무소의 역할을 대행하며 궐기대회와 인민재판 등이 이곳에서 이뤄졌다고 한다. 즉, 평리는 일제강점기부터 금마면의 행정중심지였던 것이다. 면사무소의 원래 위치는 처음에는 봉서리의 도막거리에 임시로 있다 상봉마을의 윗다개로 이전한 후 현재의 자리로 옮겨지게 되었다. 또한, 면소재지에 위치한 금마초등학교는 일제강점기 금마심상소학교의 후신이라 할 수 있다. 심상소학교는 처음에는 1학년에서 4학년까지 두 개의 반에 불과했다. 이후 1929년 금마공립보통학교로 개교한 금마초는 지금까지 78회 총 8390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또한, 평리마을에는 90여년의 역사를 가진 금마감리교회가 위치해 있다. 금마감리교회는 초대 장로인 최설목 선생의 부친 최병운 씨가 설립해 금마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 7. 금마감리교회
평리마을은 예로부터 마을 뒤쪽에 천태산 줄기인 안태산이 있는데 이 산 정상의 당집에서 산제를 지내왔다. 음력 정월 초순에 길일을 택해 제사를 지내는데 초닷새를 넘기지 않는다. 만약 제사를 앞두고 부정한 일이 발생하면 닷새 내지 이레 정도를 연기해 다시 날을 잡았다고 한다. 산제는 마을의 안녕과 주민의 건강을 기원하는 뜻을 담고 있다. 옛날에 전염병이 극심했는데 이 마을에는 별다른 피해가 없었다고 한다. 아쉽게도 1970년대 후반부터 자연스레 중단됐다고 한다. 하지만 평리마을에는 또다른 민속신앙이 있다. 1958년 창설된 대동계를 통해 마을의 화합과 친목을 도모하고 있다. 대동회가 있는 날이면 마을사람들은 마을회관에 모여 연말결산과 함께 내년도 마을사업계획을 논의한 후 마을잔치와 함께 윷놀이도 행해진다.

▲ 3. 철마산공원 4. 평리마을회관

현재 면사무소 앞으로 나있는 지방도가 상봉과 평리를 구분하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덕정리가 있고 북쪽으로는 송강마을이 위치해 있다. 평리에 터를 잡고 누대로 살아온 성씨가 신평이씨로 알려져 있지만 평리마을은 예로부터 면소재지로서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던 만큼 일제강점기에 들어와서는 각성바지 마을이 되었다. 현재 104세대 230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평리마을의 대부분의 농가에서 벼농사를 짓고 있으며 3가구 정도가 딸기재배를 주수입원으로 삼고 있다.

▲ 1. 금마면사무소 2. 금마농협

넓은 들과 많은 물로 옥답이라 불리운 상봉마을

상봉마을은 금마면사무소 맞은편에 위치한 마을로 서남쪽의 철마산과 두리봉을 중심으로 죽림리와 경계를 이루며 북쪽으로는 한다리(대교)를 중심으로 송강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넓은 들과 물이 많아 예로부터 옥답이라 하였으며 이로 인해 시내나 개울이 없어도 벼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고 한다.

상봉마을 역시 평리마을과 마찬가지로 가장 먼저 터를 잡은 성씨는 신평이씨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상봉마을은 신평이씨들만의 집성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신평이씨 훤이 다포에 들어올 때 이미 고모부 김씨가 거주하였고 윗다개 뒷산을 채씨들의 오래된 무덤이 많아 채산이라 불리었다는 점과 채씨들의 묘를 관리하던 묘막이 채산골에 있었다는 점으로 보아 채씨들도 상당히 오래전부터 상봉마을에 살았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 5. 금마초등학교 6. 상봉마을회관

상봉마을은 예로부터 매년 정초에 길일을 택해 산신제를 지냈다. 마을 사람들의 무병장수와 한해의 풍작을 기원하는 소망에서 비롯된 산신제는 마을사람들이 조금씩 정성을 모아 제사비용을 마련했다. 원래 예전에는 윗다개에서는 산제를 아랫다개에서는 유왕제를 지내왔으나 어느 해 전염병이 돌자 윗다개는 무사하고 아랫다개의 피해가 커 그 후로 아랫다개 사람들도 산제에 참여했다고 한다. 이렇듯 지내온 산제는 1970년대 이후 미신타파 등의 이유로 중단되어 이제는 더 이상 제를 지내지 않는다.

▲ 8. 상봉마을 담배 재배 농가 9. 상봉마을 느타리버섯
현재 55가구 110여명이 살고 있는 상봉마을은 예전에는 벼농사와 더불어 담배와 참깨도 재배하였으나 지금은 대부분의 농가에서 벼농사를 짓고 있으며 일부 마을주민은 한우사육, 담뱃재배를 하고 있으며 조성하(64)이장이 11년째 느타리 버섯을 재배하고 있다. 조성하 이장이 재배한 느타리 버섯은 전량 가락시장으로 출하되고 있다.

금마면 부평리의 주요인물로는 일제의 핍박과 억압에 시달리다 1919년 4월 2일 홍성시장과 4월 4일 철마산 정상에서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한 후 일본경찰에 체포돼 모진 고문을 당한 박용학, 임태수, 이계성, 김병길, 오현근, 고낙서, 오대근, 이보성, 박문백, 이흥주, 방기객, 김재철, 임문필, 이지성, 오향근, 이경석, 정해득, 이관영, 방기용 등이 있다. 이들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철마산 공원에는 기미독립운동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출향인으로는 지난 2007 외국기업의 날 기념행사에서 산업자원부 장관 표창을 받은 후쏘코리아(주) 이병락 대표의 고향이 부평리이다. 이병락 대표는 금마초(42회), 홍주중(4회)을 졸업했다. 또한, 지난 2007년 제49회 사법고시에 합격한 이병성․주행윤 부부의 1남 2녀 중 막내인 이보용 씨가 있다. 이보용 씨는 금마초(58회), 금마중(5회), 홍성고(50회)를 졸업했다.


<마을 주민들은 바란다>

평리마을, 금마초와 마을회관을 잇는 농로에 대한 확·포장공사를 원한다
상봉마을, 마을어르신들을 위한 건강관리실이 설치되길 바란다


평리마을주민들은 현재 금마초등학교와 평리마을 회관을 잇는 600여미터 구간의 농로에 대해 확포장공사가 이뤄지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 이 구간은 마을 주민들이 농사를 짓기 위해 하루에도 수차례씩 이용하는 길로 비좁고 포장이 안돼 그동안 큰 불편을 겪어왔다.

이장호 이장은 "농로확포장공사는 마을주민들의 오랜 숙원사업이지만 토지 소유주가 외지에 살고 있으며 경지정리에 대해 전혀 타협이 안되는 상황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상봉마을주민들은 마을에 건강관리실이 설치되길 바라고 있다. 농촌지역의 특성상 마을인구 대부분이 어르신들인데 반해 현재 마을회관은 공간이 협소해 농작업으로 인한 피로를 풀기위한 운동기구 및 찜질방 설치는 엄두도 못내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몇해 전까지 마을의 주수입원이었던 느타리 버섯재배 농가가 늘어 작목반을 형성, 마을의 특산물로 자리잡을 수 있게 되길 바라고 있다.

조성하 이장은 "마을과 주민의 소득창출을 위한 작목반을 형성하고 싶지만 마을주민들이 대부분 연로하신 노인들이기에 엄두도 못내고 있다"며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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