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유산 향적봉과 무주구천동 반딧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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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유산 향적봉과 무주구천동 반딧불이
  • 유태헌(홍주신문 서울본부장, 홍성고 20회)
  • 승인 2010.06.21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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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헌의 백두대간 종주기] 8구간

최근에는 주 5일제 근무, 공무원들의 연가사용, 건강 지키기 등 수많은 갖가지 사연을 안고 휴일뿐만 아니라 평일에도 삼삼오오 산을 오르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산은 물을 건너지 않고, 물은 산을 넘지 않는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인 까닭이다. 옛 사람들은 산과 강이 서로를 넘보지 않는다고 여겼다. 비록 높은 산이 이웃해 있어도 사이에 물이 있으면 산줄기는 돌아갔고, 평야에서도 산맥이 흐르면 물줄기는 물러선다고 했다. 백두대간은 그렇게 산과 물이 평화로운 한반도를 달린다. 특히 산꾼들에게 백두대간의 의미는 속이 더 깊다. 백두대간은 민족의 영산 백두산에서 민중의 한이 서린 지리산까지 거침없이 뻗어 내린 산줄기다. 금강산을 넘고 설악산을 거쳐 오대산과 태백산, 속리산을 이어 달린다. 그 힘이 하도 세차고 맑아 한반도를 받치고도 남는다. 덕유산을 거쳐 지리산에 닿아서도 숨가쁨을 모른다. 그 장엄한 달리기에서 이 땅의 숱한 물줄기를 낳고, 평야를 길러낸다. 백두대간은 곧 이 땅이며 생명이다. 올해 들어 본지는 국토의 등뼈를 밟아나가는 유태헌(홍주신문 서울본부장·홍동출신·홍성고 20회) 출향인의 백두대간 종주기를 비롯한 산행기를 연재,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편집자 주>

산행일자 : 2010년 5월 28일~29일
구 간 : 황점-삿갓골재대피소-무룡산-동업령-백암봉-귀봉-횡경재-못봉-대봉-갈미봉-빼재
도상거리 : 23.42km
산행시간 : 12시간 30분 소요

 

 

 

 


고등학교총동문회 상임부회장직을 맡아 크고 작은 행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억울하게 누명을 뒤집어쓴 가슴아픈 일이 있어 몇 주간 마음고생이 심했다. 그러던 중 지하철역 스크린에 김재진 시인의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같이>란 시에 이런 시귀가 있다. '때로는 용서할 수 없는 일이 가슴에 베어 올 때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같이 스쳐가는 만월같이 모든 것 내려놓고 길 떠나라.'

그래 지난주 바쁘다는 핑계로 못한 백두대간 8구간인 덕유산에 오르자고 결심하니 마음이 편해진다. 5월 28일 회사에서 오전일 끝내고 남부터미널에서 13시 15분 버스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려 16시 45분 거창에 도착했다. 17시 30분 황점가는 버스를 기다리며 거창시장도 구경하고, 몇 가지 필요한 것을 구입해서 버스를 타고 황점으로 향한다. 이팝나무의 하얀 꽃이 만개한 가로수 길을 달리니 지난 7구간에 소개된 수송대를 지난다. 들리지 못한 아쉬움을 뒤로하고 18시 30분 황점에 도착한다. 달빛고운마을 민박집(055-945-0198)에서 마음씨 고운 주인 아주머니의 맛있는 김치와 반찬 등 후한 인심에 소주 반주로 저녁을 먹고 일찍 잠자리에 든다.

29일 새벽 3시에 일어나 하늘을 보니 구름 사이로 보름달이 환하게 비친다. 어둠속에 가만히 손내밀어 잡고싶은 그리운 사람의 얼굴처럼, 가만가만 서쪽하늘에 돋아나는 별들을 그냥 하염없이 바라본다.

03시 30분 황점을 출발하여 달과 별을 벗삼아 삿갓골재대피소에 오른다. 황점마을이 있는 거창군 북상면 월성리에는 거창의 명소인 사선대가 멋진 풍광을 자랑한다. 사선대는 월성계곡 상류에 놓인 명소이다. 동춘당 송준길 선생이 이곳에 은거해 송기 또는 송대라고 불렀다. 1909년 고종의 5남 의친왕 강이 나라가 어지러울 때 전 승지 정태균을 찾아와 머물면서 북상면과 위천면 지방의 우국청년들과 만나 사선대 일대를 뒷날 의병의 근거지로 도모했다. 훈련장과 병사를 만들기 위하여 준비하던중 일제에게 발각되어 뜻을 이루지 못한 구국의 한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05시 삿갓골재대피소에 도착했다. 05시 25분에 출발하여 06시 30분 무룡산(1.491m)에 도착한다. 용이 춤추는 산, 그래서 무룡산이다. 서봉에서 남덕유산, 삿갓봉을 거쳐 무룡산에 이르는 능선이 마치 한 마리의 거대한 용이 꿈틀거리듯 치 달려 온다 그렇게 치달려 와서는 백암봉 중봉을 지나 향적봉을 향해 휘몰아치듯이 달려간다. 굽이치는 산맥들, 초록빛으로 넘실대는 파도, 그 자체가 가슴 고동치게 하는 감동이다. 일망무제, 한없이 펼쳐지는 산자락들, 멀리 구름위에 섬처럼 보이는 지리산 연봉들, 신선이 사는 곳이 이곳인가 하노니. 아! 가슴이 황홀해지며 무아의 경지가 이런 것일까? 말로는 표현할 길이 없다. 오로지 보고 느낀 사람만 느낄 뿐일 것이다. 산을 좋아 하지 않고 산꾼이 아니면 어찌 이 맛을 알 것이며, 자연이 준 아름다운 걸작품을 시각으로 즐길 것인가! 너무도 아름다워 숨이 멎어버릴 것만 같다. 동업령 가는 길은 경사가 완만한 내리막길이다. 산비탈에 무성하게 자란 유난히도 파란색을 자랑하는 윤기나는 키작은 산죽이 숲을 이루고 있다.
07시 20분 칠연폭포 갈림길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08시 50분 바람이 세기로 유명한 동업령(1359m)에 이른다. 옛날 덕유산을 사이에 두고 영호남의 길을 이었던 동업령(일명 동업이재)은 거창․합천 지방과 장수․무주 지방의 토산품을 사고 팔기 위해 보부상들이 넘나들던 재이다.

여기서 오른쪽은 거창으로 흐르는 병곡리 계곡이고, 왼쪽은 칠연폭포가 있는 칠연계곡이다. 칠연계곡은 남덕유를 형성하는 계곡으로 덕유산을 대표하는 절경이다. 흔히 칠연 암동이라고도 부르는 이곳에는 150여명 의병들이 묻힌 칠연의총이 있기도 하다. 계곡의 규모는 구천동계곡보다 훨씬 작지만 아기자기하고 한적한 풍광이 계곡 여행을 즐기기에는 오히려 나은 편이다. 크고 작은 폭포수와 기암기석, 맑은 청류들이 줄지어 이어지는데, 그중에서도 최고의 볼거리로 꼽히는 곳이 바로 칠연폭포다. 계곡의 끝자락에 위치한 이곳은 일곱 개의 못이 위에서 아래로 연이어 있고, 연못과 연못을 폭포들이 차례로 연결하고 있는 모습을 위에서 내려다보면 그야말로 신비경이다.

 

 

 

 

 

 


칠연폭포 아래쪽 계곡 건너편에 칠연의총이 자리잡고 있다. 이곳은 조선말기에 의병장 신명선과 그 휘하의 150여 의병들이 일본에 항거하여 싸우다 전사하여 묻힌곳이다. 동업령을 떠나 밋밋한 능선길을 오른다. 북덕유산의 산세는 넉넉하면서도 느긋하다. 덕이 소매끝에서부터 묻어나는 산, 그래서 덕유산인가?

09시 40분 백암봉(1,503m), 일명 송계삼거리에 올랐다. 백암봉은 안성 방면으로 하얀 암봉을 내리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안성 방면으로 피라미드처럼 삼각형으로 솟아 오른 가세봉이 그 아래 망봉까지 지능선 꼬리를 늘어뜨리고 있다. 가세봉날망능선이란 긴 이름을 가진 가세봉은 갈길 바쁜 나를 유혹한다.

향적봉이 엎어지면 코에 닿을 듯하다. 향적봉과 빼재(신풍령)로 가는 갈림길이다. 향적봉 2.1km, 횡경재는 3.2km 거리다. 여기서 백두대간은 향적봉을 앞에 두고 오른쪽으로 90도 휘어서 간다. 배낭을 백암봉에 벗어 숲속에 숨겨놓고 향적봉을 갔다 오기로 한다. 맨몸으로 산길을 걸으니 날아갈 것만 같다. 중봉을 지나 덕유평전을 거쳐 10시 20분 덕유산의 최고봉인 향적봉(1.614m)에 오른다. 중봉, 백암봉, 무룡산, 삿갓봉, 남덕유산의 준봉들은 물론 저멀리 지리산, 가야산, 기백산, 적상산 등 준봉들이 장쾌하게 펼쳐진다. 1975년 2월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남한에서 네 번째로 높은산이다.

향적봉 정상에서 백련사를 거쳐 설천면의 라재통문까지 이르는 약 30km의 굽이진 계곡 일대를 구천동이라 한다. 장장 70리에 걸쳐 흐르는 계곡물은 곳곳에서 기암에 부디치고 암반을 미끄러지는가 하면 어느 때는 폭포가 되고 빨리 치닫다가 고요한 담을 이룬다. 구천동이라는 이름은 갈천 임훈의 <등덕유산 향적봉기>에 따르면, 옛날 이 골짜기에 성불군자 9,000인이 살았으므로 구천인의 둔지라는 구천둔이라 하였다가 구천동으로 개칭됐다는 등 몇가지 설이 전해온다. 구천동 33경은 숱한 전설과 지명의 유래가 전해온다.

33경중 제14경 수경대까지는 관광단지 밖에 있으므 외구천동, 제15경 월하탄에서 제33경 덕유산 정상까지는 내구천동으로 나뉜다. 크고 작은 폭포와 소, 그 중 백련사 근방에 있으며 먼 옛날에 천상의 선녀들이 무지개를 타고 내려와 목욕하며 놀았다는 구천폭포, 청류가 바위를 타고 흘려 내려와 비파모양 담을 이루고 있다하여 붙여진 비파담, 여울진 기암을 타고 쏟아져 폭포수가 달빛에 비추면 한폭의 산수화를 연상케 하고 장관을 이룬다는 월하탄, 그밖에 학소대, 추월담, 수심대, 수경대, 인월담, 구월담, 금포탄 등 명소가 셀 수 없을 정도다. 덕유산을 배경으로 그 중턱(해발 920m)에 고즈넉하게 자리잡은 백련사는 구천동 계곡에서 유일한 사찰로 신문왕(681년~692년)때 백련선사가 은거하던 곳에 하얀 연꽃이 솟아나왔다 하여 지었다는 설과 신라 흥덕왕 5년(830년) 무렴국사가 창건했다는 설이 전해진다. 한국전쟁 때 모두 불에 타버린 것을 1960년대 들어 옛 사지 위에 선수당, 일주문, 대웅전, 원통전, 명부전, 천왕문 등을 세우며 복원하였다. 이 곳에는 백련사지(기념물 제62호), 백련사 계단(기념물 제42호), 매월당부도(유형문화재 43호, 생육신 김시습이 아님), 정관당부도(유형문화재 제102호)등의 유적이 있다.

 

 

 

 

 

 


무주구천동 계곡하면 박해성 님의 <무주무릉도원>이란 시가 생각난다.

적상산성 무주품에 안고 / 초가삼간 실천(雪川) 걸터앉아 / 단 이슬 머금고 / 초야처럼 살자하네
부모 주신 어진 몸 /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가는 것 / 어인 미련이 있으리오
짊어진 것 없다한들 정년이거늘 / 곡기조차 입식 못할소냐
적목운무 산발하니 궁중궁궐 안부럽다/ 덕유산천 사계 등에 업고 / 임 품으니 무주무릉도원일세

여기에 적장산성은 전북 무주군 적상면 북창리에 있는 고려말, 조선초의 산성으로 사적 제 146호로 둘레 길이가 8km다. 고려말 최영이 산성 쌓기를 상주한 일이 있었다. 절벽으로 이루어진 산 위의 분지를 에워싼 대표적인 방어산성이다. 적상산 안국사에는 안국사천불전(불상1천불), 양벽의 탱화와 아미타불, 범종, 흙으로 만들어진 23나한상 등 600년 전의 것으로 보물 가치가 있는 문화유산들이다. 한편 무주구천동 맨 아래에 있는 라재통문은 높이 3m 길이 10m로 암벽을 뚫은 통문으로 옛날 신라와 백제의 경계관문이었다. 600년이 지난 지금도 통문을 경계로 언어, 풍습 등에 차이가 있으며, 사투리만으로도 두 지방 사람들을 식별할 수 있다. 무주구천동 입구의 경승지이며 현재 덕유산 국립공원 경역에 들어 있다.

11시 백암봉을 떠나 빼재로 향한다. 왼쪽으로는 구천동 계곡이다. 대간길 주변에는 키가 큰 나무들이 우거져 전망은 좋지 않다. 그대신 활짝 핀 철쭉이 반겨준다. 12시 15분, 귀봉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13시 10분 횡경재에 도착한다.

오른쪽이 송계사 계곡이다. 덕유산 지붕 남쪽 기슭에 고찰 송계사가 자리해 송계사 계곡이라한다. 불교 조계종 제12교구 해인사의 말사로 신라 진덕여왕 6년(652년) 원효, 의상대사가 창건한 영취사의 다섯 번째 부속암자 중 하나로 임진란 때 모두 불타고 숙종 때 다시 지었으나 6.25때 소실, 1969년 복원된 절이다.

14시, 못봉(1.342m) 일명 지봉에 오른다. 북덕유의 웅장한 산세가 한눈에 들어온다. 중봉과 향적봉도 보인다. 이곳에도 철쭉꽃이 활짝 피어났다. 산 넘어 산, 산봉우리가 계속 이어진다. 얼음재를 거쳐 15시 대봉(1.263m)에 올랐다. 못봉에서 대봉에 이르는 구간에는 하얀 둥글레꽃이 많이 보인다. 갈미봉을 지나 16시 드디어 오늘에 목적지인 빼재(신풍령, 수령)에 도착했다. 백암봉에서 빼재까지 구간은 매우 지루하고 힘도 많이 들었다. 오늘은 하루종일 왼발은 전북땅을 오른발은 경남 땅을 밟으면서 왔다. 빼재는 빼어날 수(秀)를 써서 수령이라고도 한다. 경상도와 전라도를 잇는 중요한 통로였는데 대전-통영간 고속도로 개통으로한적한 도로가 되었다. 휴게소도 주유소도 페허가 되어 지금은 대간꾼들의 바람을 피하는 공간이 되었다. 오른쪽 거창 31km, 왼쪽 무주 42km라는 이정표가 보인다.

먼저 거창을 둘러보자. 수승대에서 멀지않은 강천리 강동마을엔 동계 정온(1569~1641)의 고택이 있다. 동계는 남명 조식의 학풍을 이어받아 의로운 처신을 함으로써 사람의 추앙을 받은 인물이다. 벼슬이 이조참판에까지 이르렀던 학자로서 광해군 때 영창대군의 처형을 반대하여 무려 10년간이나 제주도에서 귀향살이를 했다. 유배 생활을 하면서 <덕벽록> 등을 지었고 1623년 병자호란 때는 이조참판으로서 척화를 주장하였으나,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하자 활복자살을 시도하였다가 너무 노쇠한 까닭에 실패하고 고향으로 내려와서는 본가를 떠나 덕유산 기슭으로 들어가 은거하다 5년 뒤 세상을 떠났다. 동계가 은거하던 곳이 바로 북상면 농산리에 자리한 모리재다. 경주 최부자집 맏딸로서 초계정씨 집안으로 시집와 접빈객의 전통으로 손님을 맞아주는 종부가 현재 명문종가를 지키고 있음은 잘 알려져 있다.

 

 

 

 

 

 

문바위를 지나 마애불 관리사무소 뒤로 난 108계단을 올라 바위덩어리 틈새로 들어서면 바위굴이 나온다. 이 굴속 바위면에는 마애삼존불상(보물 제530호)이 새겨져 있다. 고려 예종이 어머니의 극락 왕생을 위해 1111년에 새겼다고 한다. 마애삼존불은 모두 넓적한 얼굴에 둥굴고 작은 눈, 삼각형에 가까운 몽툭한 코를 가졌다. 두툼한 입술을 앙 다물어 다소 고집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거창의 향토사학자는 이를 󰡐덕유산의 품에 안겨서 사는 사람들의 순박한 얼굴󰡐 이라 평한다. 무주의 젖줄은 남대천, 백두대간의 대덕산과 삼봉산 사이에서 발원해 서북쪽으로 흐르며 무풍, 설천면을 적신 남대천은, 라재통문 부근에선 덕유산 향적봉에서 발원한 무주구천동의 원당천과 합류해 몸을 키운 뒤, 서쪽으로 흘러 무주읍을 적시고 대차리 서면 마을에서 금강에 합류한다. 남대천은 물이 맑고 깨끗해 모래무지. 금강모찌. 꺽지등 많은 물고기들이 서식하고 있다. 특히 반딧불이(개똥벌레) 유충의 먹이가 되는 다슬기가 많아 무주가 반딧불이 고을로 불리는데 큰 역할을 한다. 나라에서는 무주일대의 반딧불이 서식지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

옛날 중국 진나라의 차윤과 손강 두 사람에게서 유래한 형설지공 고사로 잘 알려진 반딧불이는 30년 전만해도 이땅 어디서나 쉽사리 볼 수 있었던 곤충이었다. 그러나 산업화사회로 접어들면서 대부분 반딧불이 서식지는 파괴되었고 농약같은 각종 오염원인으로 수질이 나빠지면서 멸종위기까지 처하게 되었다. 다행히 무주 고을이 남한에서 반딧불이를 볼 수 잇는 유일한 곳이다.

빼재에서 무주행 버스를 기다리는데 무주구천동 입구인 삼공리까지 승용차를 태워준 분에게 고마운 인사를 하고 삼공리에서 서울행 버스를 타고 무주 터미널에서 산 캔맥주를 차안에서 마시니 깜빡 잠이 든다. 대간길이 쉽지 않지만 오늘도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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