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이라는 지명은 황금이 난다는 금지천 샘물에서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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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이라는 지명은 황금이 난다는 금지천 샘물에서 유래
  • 유태헌(홍주신문 서울본부장, 홍성고 20회)
  • 승인 2010.09.03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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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헌의 백두대간 종주기] 12구간

올해 들어 본지는 국토의 등뼈를 밟아나가는 유태헌(홍주신문 서울본부장, 홍동출신, 홍성고 20회, 손전화 010-3764-3344) 출향인의 백두대간 종주기를 비롯해 산행기를 연재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편집자 주>

산행일자 : 2010년 8월 5일
구간 : 추풍령-사기정고개-작점고개-용문산-국수봉-큰재
도상거리 : 19.67km
산행시간 : 7시간 소요


서울역에서 09:10 출발하는 부산행 무궁화호에 몸을 실었다. KTX 인기에 승객은 좀 줄었지만 추풍령 쉬어가는 열차는 수원을 지나면서 만원이다.

12:03 정시에 도착하니 예약한 택시가 들머리까지 안내한다. 흔히들 추풍령에서 화령까지 54km구간을 중화지구대라 부른다. 백두대간 구간 중 가장고도가 낮으며 분수령의 산세가 뚜렷하지 않기 때문이다. 큰 산이래야 고도가 700m정도인 용문산, 국수봉 정도다. 겨우 백두대간의 체면만 유지할 뿐이라고 하니 어찌 미운오리라고 말하지 않으랴. 그렇다고 명색이 백두대간인데 생략할 수도 없고 또 피할 수도 없다. 그래서 대간꾼들은 이 구간을 대부분 마음을 비우고 무심으로 지난다고 한다.

지리산에서 힘차게 달려온 백두대간 또한 숨을 고르며 잠시 쉬어가는 구간이기에 별로 힘들지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역시 대간은 대간이다. 추풍령노래비 맞은편 좁은 길 따라가니 드디어 들머리다. 이제 일상이 세속을 벗어나는 가장 행복한 순간이다. 등산로에는 나무계단이 설치되어 있고 리본은 나뭇가지가 휘어지도록 걸려있다. 하늘은 잔뜩 찌푸리고 날씨는 무덥다. 금산을 오르는 내 마음 같다.

'금산'왜 이름이 금산인지 모르지만 예전에는 금이 많았던가? 높이가 300m가 겨우 넘는 석산은 반쪽짜리 산이 되어 버렸다. 금산이라고 부르는 그 산은 절대로 동강나서는 안 되는 산이었다. 금산은 백두의 정기를 지리산으로 잇는 백두대간의 봉우리기 때문이다. 이런 금산에 처음 삽을 댄 것은 일제 때였다. 석산개발은 해방과 함께 중단 되었다. 그러나 불행은 계속되어 1962년 철도용 자갈을 구한다는 명목으로 금산은 다시 깍이고 그 결과 반동강이가 되었고 그것도 모자라 얼마 후면 그 속의 창자까지 쏟아질 것 같다. 길이 보존해서 후손에서 물려주어야 할 백두대간을 이렇게 훼손해서야 되겠는가? 금산에 올라서니 경부고속도로가 바로 눈앞이다. 서울-부산 간 고속도로는 60년대의 가난에서 벗어나 번영의 70년대로 달려가겠다는 다짐이다. 77명의 목숨과 맞바꾼 428km의 아스팔트 도로는 수많은 부작용을 덮어 버릴 만큼 긍정적 효과도 컸다. 경부고속도로 기념비에는 후대가 경부고속도로의 개통을 "나약과 빈곤을 불사르고 고난과 시련을 이겼다"고 기억해 주기 바라는 마음을 담은 '고속도로의 노래'라는 노산 이은상님의 시가 적혀 있다. 이곳에서 보니 국도, 철도, 고속도로 순으로 나란히 한국 국토의 동맥을 한꺼번에 볼 수 있다.

절개된 금산을 우회하니 직각의 낭떠러지 위로는 나무팬스가 쳐져 있어 위험을 알리고 있다. 조심조심 내려선다. 지도상의 502봉을 지나면서 고도는 평균 500m를 유지한 채 계속 부드러운 능선으로 이어지는데, 이곳이 북진하는 백두대간 200km지점을 통과하는 구간이라 하니 감회가 새롭다. 대간을 시작한지 엊그제 같은데 벌써 200km? 부드러운 능선 길을 따라가다 보면 난함산에 기대선 철탑이 시야에 들어오고 '코뿔소 백두대간5기' 리본이 보인다. 너무 반가워 한 번 더 쳐다본다.

14:30분 경 사기점고개에 도착하니 차량이 동행할 수 없는 묵은 임도길이다. 산행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점심은 열차에서 해결했다. 김밥에 삶은 계란, 옥수수, 과일, 그 옛날 완행열차서 먹던 추억이다. 추운 겨울날 부산행 야간열차가 대전역에서 잠시 머무는 동안에 뜨거운 가락국수를 서서 먹던 생각이 난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높은 봉우리도 없을 뿐더러 등산로도 동네 뒷산 수준으로 편안한 오솔길이었지만 철탑으로 오르는 시멘트도로를 건너니 급경사 오르막이다. 길은 난함산 정상까지 이어지나 했는데 5부 능선쯤에서 좌로 급하게 꺽인다. 이곳이 선답자들이 말하는 난함산 갈림길이다. 시멘트 길 따라 10여분을 걸으니 나뭇가지에 리본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고 대간은 다시 산으로 이어진다. 산에서 내려오면 또 시멘트 길이고 그것이 반복되다보니 어느 작은 지맥 길을 가고 있는 착각이 든다. 우로는 신애원정신병원이 보이고 길은 다시 산길로 붙더니 김천과 영동의 경계인 작점고개에 도착한다(15:20) .

 

 



작점고개 우측으로 가면 김천이다. 김천은 백두대간에서 발원한 감천이 직지천을 받아들이면서 형성된 충적평야 위에 터를 잡고 있는 고을이다. 김천의 가장 큰 젖줄인 감천은 조선시대 말까지만 해도 낙동강 하구에서 소금배가 올라올 만큼 깊었지만 이제는 종아리 정도 깊이 밖에 안 된다. 산줄기의 나무들을 베어내서 토사가 쌓인 탓인데, 그 때문인지 몇 년 전 태풍에 김천시가지 전체가 물에 잠기는 수해를 겪기도 했다. 김천(金泉)이라는 지명은 옛날에 황금이 난다는 금지천(金之泉)이라는 샘물이 있었다는데서 유래한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군 이여송이 이곳을 지나다가 이 물맛을 보고 자기나라 금릉의 과하천 물맛과 같이 좋다고 칭찬하여 과하천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금지천은 물맛이 뛰어났다. 이 샘물로 술을 담근 과하주(過夏酒)는 다른 샘물로는 도저히 맛을 흉내조차 낼 수 없는 명주다. 한자를 풀어 '무더운 여름을 탈 없이 날 수 있는 술'이다. 이 무더위에 과하주 한잔이 간절하다. 과하주가 이렇듯 명성이 높아지자 결국은 임금에게 진상되기 까지 했다. 현재 경상북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추풍령


추풍령을 끼고 터를 잡은 김천은 지리적인 원인으로 시장이 아주 컸다. 경북, 충북, 경남 3도의 과일과 곡식이 모여들어 '삼도시장'이라는 별명을 가졌던 김천시장은 대구, 평양, 전주, 강경장과 더불어 조선중기이후 가장 규모가 컸던 전국 5대장에 손꼽혔고, 3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전국에 남아 있는 5일장 중에 가장 큰 장이었다. 특히 소를 팔고 사는 쇠전(우시장)으로 제법 유명했다. 이 쇠전엔 가까운 선산, 상주, 성주, 거창, 영동에서 백두대간의 추풍령이나 쾌방령을 넘어 소를 몰고 왔다. 당시 하루 장날에 거래되는 소는 평균 500~600마리로 나라 안에서 유명한 횡성쇠전과 수원쇠전도 역사와 크기에서 김천쇠전을 따르지는 못했다고 한다.

또 우피거래양도 전국에서 으뜸이며, 우피의 큰손인 김기진은 요즘 말하는 우피의 달인이었다고 한다. 이런 배경으로 김천시장은 한우 고깃집이 성했고, 탁배기(막걸리) 곁들일 수 있는 장터국밥도 명성이 자자했다. 직지천변에 있던 옛 쇠전을 1991년 외곽지대인 양천동에 4000평 규모의 터를 마련해 이전 했다. 예전 명성에 걸맞게 요즘도 이곳에선 5일장(5일,10일)으로 닷새마다 쇠전이 열린다. 상주, 문경, 구미, 성주, 무주, 영동 등지에서 올라온 소장수들의 고함소리로 한바탕 소란이 벌어지는데, 한창 거래가 활발할 땐 1000여 마리의 소가 붐비는 장관을 구경할 수 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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