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왕봉은 속리산의 주봉, 문장대의 유명세에 대접 못받아
상태바
천왕봉은 속리산의 주봉, 문장대의 유명세에 대접 못받아
  • 유태헌 서울본부장
  • 승인 2010.10.15 14:4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유태헌의 백두대간 종주기] 15구간 ②

 


올해 들어 본지는 국토의 등뼈를 밟아나가는 유태헌(홍주신문 서울본부장홍동출신'홍성고 20회'손전화 010-3764-3344) 출향인의 백두대간 종주기를 비롯해 산행기를 연재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편집자 주> 

산행일자 : 2010년 9월 4일~5일
구 간 : 늘재-밤티재-문장대-천왕봉
피앗재-형제봉-갈령
도상거리 : 20.62km
산행시간 : 11시간 30분 소요


강문 들어서면 국내에서 가장 크다는 천왕문이고, 역시 가장 큰 사천왕상이 압도할 듯 지키고 있다. 그 너머로는 우리나라 목탑으로는 유일하게 온전히 남아있는 5층 목탑인 팔상전(국보 제55호)보인다. 이외에도 경내에는 쌍사자석등(국보 제5호), 석련지(국보 제46호), 사천왕석등 (보물 제 15호), 마애여래의상(보물 제 216호)등의 귀한 문화재가 아주 많다. 모두 국보 아니면 보물인데, 지난 2004년엔 수암화상탑과 희견보살상, 학조등글화상탑도 모두 보물로 지정 되었다. 법주사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33m높이의 금동 미륵대불이다. 원래 진표율사가 조성했다는 미륵장육상이 조선 말기까지 봉안되어 있었던 것을 1872년(고종9)경복궁 복원을 명목으로 불상은 철거되어 압수되고 빈터로 남아 있다가, 20세기 초 조각의 선구자 김복진에 의해 100척의 미륵대불이 1939년 불상 제작에 착수 했지만 그 이듬해 김복진이 요절하는 바람에 미완으로 남게 되고 그러다가 20여년의 세월이 흐른 뒤 나라의 도움으로 1964년 단오절에 점안법회를 가졌다. 그런데 법주사 측은 1987년 시멘트 대불을 철거하고 1990년에 청동미륵대불로 해체작업을 했으나 청동불상의 용접부위가 부식되면서 얼룩지자 개금불사를 추진하여 황금가사를 입힘으로서 일단락된다. 황금의 덕인지 청동대불일 때 보다는 표정이 부드럽다.

법주사 경내를 돌다보면 자신의 몸을 불태워 부처님께 공양하는 장엄한 소신공양의 주인공인 희견보살상이 있다. 높이가 2.37m로 금동미륵대불의 천위에 훨씬 못 미치지만 법주사 초창기에 조성된 것이 정감이 간다. 얼굴은 비바람에 깎여나가 알아보기 힘들어도 두 다리는 천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튼튼하다. 이렇듯 정성스레 1000년의 세월을 기다린다는 자기희생 때문일까? 희견보살은 거대함으로만 들어차 있어 기가 눌리기 쉬운 법주사 경내에서 중생들에게 성스러운 교훈을 들려준다. 마치 해질 무렵 울려 퍼지는 법고소리, 미풍에도 깨어 있는 풍경 소리처럼..... 속리산하면 진표와도 관련이 깊지만 조선의 세조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 그가 말을 타고 넘었다는 고개가 '말티고개'이며 내속리면에는 세조의 가마가 소나무가지에 걸려 나아가지 못하자 '길을 열어라'는 세조의 명에 가지를 들어 정이품을 하사 받았다는 '정이품송'이 있음을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또 세조는 '복천암'이나 '상환암'에 자주 들러 기도하고 '복천샘'에서는 눈병을 치유했다고도 전한다. 어린 조카를 왕위에서 몰아낸 자책감에 시달려 피부병과 종기가 많았던 세조는 불법에 더욱 매달렸고 그와 친분이 두터웠던 신미대사의 권유로 자주 속리산을 찾았다고 한다. 이는 신미의 불교 증흥의 야망과도 부합된다.

속리산 복천암을 찾아 신미, 학조, 학열 스님과 함께 3일 동안 목욕을 하고는 오랫동안 앓았던 피부병이 깨끗이 나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질환에서 쾌유됨을 경하는 자리에서 왕은 속리산에 있는 승려들을 불러 말하기를 "내 이곳에 와서 부처님의 은덕으로 악질을 고치게 되었으니 그 은덕에 보답하고자 함이니 복천암 앞에 있는 돌을 끌고 다니다가 힘이 빠져 멈추는 곳을 경계로 해서 산천전담을 모두 절소유로 인정하겠다"고 했다. 이에 모든 승려들이 크게 기뻐하여 밖으로 나가 커다란 돌에 밧줄을 매어 앞에서 당기고 뒤에서 밀고 끌고 다니기 시작했다. 복천암에서 내려와 법주사를 지나 사내리를 벗어나자 보은 땅을 차지할 생각으로 모두들 기진맥진되어 더 이상 끌어 갈 힘이 없어지고 말았다. 다시 한 번 힘을 내도록 독려를 했으나 돌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그만하면 공양미와 승려들의 식량이 족할 것이다"라고 하며 사전(寺田)문서를 작성해주고 돌이 있는 곳에서 속리산 쪽 전부의 땅을 법주사에 내주었다는 것이다. 내 키보다 더 큰 산 죽밭을 지나 천천히 비탈을 오르니 드디어 천왕봉(1057m)이다(11시30분).

천왕봉은 속리산의 주봉임에도 문장대의 유명세에 가려 대접을 제대로 못 받고 있지만, 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봉우리다. 바로 한강과 금강 수계를 나누는 분수령인 한남금북정맥이 천왕봉에서 분기하기 때문이다. 천왕봉에서 뻗어나간 한남금북정맥은 말티고개-선도산-청주상단산성-좌구산-보현산을 지난 뒤 칠장산까지 이어진 산줄기로 총 147.5km에 이른다. 이 산줄기는 칠장산에서 다시 한남정맥과 금북정맥으로 갈리는데 한남정맥은 칠장산에서 서북쪽을 향해 백운산-광교산-수리산-계양산-을 거쳐 강화 문수산에 끝을 맺고, 금북정맥은 서남쪽을 향해 칠현산-성거산-흑성산-광덕신-백월산-오서산-용봉산-용문산-덕숭산-가야산을 거쳐 태안 안흥진에서 서해바다에 몸을 담근다. 이 금북정맥의 정기가 많은 충신과 열사를 배출했다.

고려말 최영장군, 사육신 중 한 분인 성삼문이 반세기를 두고 홍성군 홍북면에서 출생했으며 근대에 와서 만해한용운, 백야김좌진 장군 또한 홍성출신이다. 매헌 윤봉길 의사, 이순신장군, 유관순 열사, 추사 김정희, 이응노 화백 등 훌륭한 분이 많은 것도 백두대간의 정기가 천왕봉에서 금북정맥을 통해 전해졌기 때문이다. 결국 천왕봉은 삼파수가 흐르는 봉우리다. 삼파수란 물이 세 갈래 나뉘는 곳으로서 세 개의 큰 강으로 나누는 삼분수(三分水)를 말한다. 곧 천왕봉에 빗방울이 떨어졌을 때 남쪽으로 흐르는 물은 금강, 동쪽으로 흐르는 물은 낙동강, 서쪽으로 흐르는 물은 한강으로 흘러간다. 대동여지도에 천왕봉이 이 땅을 침탈한 일제는 위리 민족의 정체성을 부정하기위해 왕(王)이란 글자를 황(皇)으로 변경했던 것이다. 뒤늦게 천왕봉으로 본래의 이름을 되찾아 정상에 천왕봉(1057m)정상석이 서있어 다행이다.

볕은 여름이고 바람결은 가을이다. 잠자리 떼가 경연하듯 몸짓 바쁜데, 푸른 하늘엔 뭉게구름이 둥실댄다. 사방이 오로지 산, 산, 산뿐이니, 거대한 산군이 물결치듯 에워싼다. 천왕봉은 한섬이요, 그 위에 내가 서있다. 절경에 푹 젖고 싶고, 여유로움에 맘껏 함몰되고 싶은데 시간은 촉박하고 갈 길은 멀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형제봉을 향해 출발한다. 전망바위를 지나 암릉을 넘고 피앗재를 지나 주먹 불끈 쥔 형태의 할매 바위가 수문장처럼 버티고선 형제봉(828m)에 도착한다(13시20분).

탁 트인 시야는 충북 알프스를 굽어 볼 수 있고 49번 도로와 마주한 두루봉(837m : 대궐터산) 청계산과 도장산(828m)이 보인다. 지난대간 길의 봉황산이 날개 활짝 피고 금방이라도 비상하려는 듯 꿈틀대고, 용의 등줄기처럼 삐죽삐죽 치솟아 날카롭기만 하던 구병산(877m)도 발아래다. 해변가 자갈처럼 하늘, 땅, 그 틈새 내가 있으니 천(天), 지(地), 인(人) 삼위일체라... 내가 우주고, 내가 자연이고, 내가 구름 몰고 다니는 바람임을 깨우치게 될 것이다. 늘재에서 북으로 곧게 뻗어 내리던 작은 실개천은 용이 꿈틀거리는 것처럼 보이는 용송(龍松:천연기념물 제290호)이 뿌리내리고 있는 삼송리 지나고, 다음구간인 대야산에서 발원한 선유동을 받아들이면서 덩치를 키운 다음 화양동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깨끗한 물과 기묘한 바위 덩어리가 조화롭게 절경을 이룬 이곳은 맑은 기운이 넘치는 백두대간의 별천지다.

백두대간 깊은 산중에 은자처럼 숨어 있던 이 계곡을 역사의 전면으로 드러나게 한 이는 조선시대의 유학자 우암 송시열(1607~1689)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이름이 3000번 이상 언급된 송시열은 83세의 나이에 '죄인들의 수괴'라는 죄목으로 정읍에서 사약을 마시고 세상을 떠나 섰다. 그러나 죽고 난 후 성균관 문묘에 공자와 함께 배향되었고, 공자, 맹자, 주자 처럼 송자(宋子)라 불리는 영광도 누렸다. 주자학의 대가였던 송시열은 일찍이 화양동 경치를 사랑하고 즐겼다. 지금은 대전에 속한 회덕에서 이곳을 찾아오던 그는 60세가 되던 1666년(현종7) 여름에 금사담 위에 '바위에 틀은 둥지'라는 뜻의 '암서재'를 짓고는 아예 정착해 버렸다. 화양동주라는 송시열의 또 다른 호에서 그가 화양동계곡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 수 있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인 '송자대전'의 '암서재중수기'엔 다음과 같은 글이 나온다.

"이 골짜기로 들어오면 심신이 상쾌해져 마치 선경에 있는 것 같다. 여기서 회덕을 돌아보면 회덕은 참으로 진세더라, 어찌 다시 무릉도원을 찾을 필요가 있겠는가"

송시열은 이곳에 은거하면서 중국의 무이구곡을 본받아 화양동에 9곡(경천벽, 운영담 음궁암, 금사담, 첨성대, 능운대, 와룡암, 학소대, 파천)의 이름을 지었다. 송시열을 배향한 화양 서원은 영조 때에는 관찰사로 하여금 봄, 가을로 제사 지내게 하는 등 17세기 말엽부터 19세기 중엽까지 나라 안에서 가장 힘을 자랑하는 서원으로 자리매김 했다. 그러나 국가적인 지원에다 노론 관료들과 유생들의 재산기증이 이어짐에 따라 서원의 재산은 갈수록 불어났고, 그사이 유생들의 세력 근거지로 변해 가면서 민폐의 온상이 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화양묵패󰡑다. 이는 만동묘와 화양서원에서 제사 지내는데 들어가는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인근 고을의 수령들에게 보내는 청구서였다. 거부할 경우 화양동 유생들은 수령을 축출하거나 백성들을 사사로이 처벌하기도 했다. 유생들의 폐단은 극에 달해, 한량으로 지내던 대원군도 아마비에서 내리지 않는다 하여 묘지기에게 발로 걷어차일 정도로 기세등등했다. 이렇게 망신을 당해 서원을 '도둑놈의 소굴' 이라며 이를 갈던 대원군은 훗날 섭정을 시작하자 곧 서원 철폐령을 내렸다는 뒷이야기가 전해진다. 늘재 북쪽의 화양동이 조선을 지배해온 자들의 흔적이 생생이 남아있는 곳이라면, 남쪽의 용유동은 피지배자인 민초들이 그들의 절박하면서도 질박한 꿈을 모아 이뤄낸 이상형이다. 용유동은 병화(兵火)가 침범하지 못한다는 신비한 마을이다. 이곳의 지형이 마치 소의 배안처럼 생겨 사람살기에 더 없이 좋다하여 '우복(牛腹)'이라 부른다. 용유동의 지세를 보면 서쪽은 백두대간의 속리산 바위 병풍에 첩첩이 막혀있고, 북쪽은 백두대간 늘재를 넘어야 괴산으로 연결되며, 남쪽은 갈령을 넘어야 멀리 상주로 갈수 있는데다가 고개를 넘지 않는 유일한 관문인 동쪽의 문경 가는 길은 가파른 벼랑이 연이어 있는 쌍룡계곡이 막고 있다. 이처럼 예전에는 접근이 어려운 깊디깊은 산골이었다. 결국 우복동은 전쟁이나 천재지변에도 안심하고 살 수 있다 하여 이 땅에 사는 민초들이 영원한 이상형으로 여겨온 십승지의 다른 이름인 것이다. 풍수가들은 󰡐속리산 천왕봉, 청화산, 도장산을 잇는 산줄기의 형세가 마치 속세를 떠난 유, 불, 선의 대가들이 모여 앉아 담소하는 형국󰡑이라 말하고 있다.

우복동 믿음의 중심지인 용유동엔 󰡐洞天󰡑이라 쓰인 바위가 있다. 비스듬히 누운 바위에 새겨진 글씨는 조선의 명필 양사언(1517~1584)의 친필이라 전한다. 우복동의 비결을 믿는 사람들은 󰡒분명 우복동천(牛腹洞天) 일 것인데 우복동을 함부로 밝힐 수가 없으니 양사언이 지명을 밝히지 않고 그냥 동천이라고만 쓴 것󰡓이라고 말한다. 한편 상주시청에서는 우복동을 중심으로 회란석-도장산-갈령-형제봉-천왕봉-문장대-밤티재-늘재-청화산-시루봉-회란석 까지 37.8km를 개설하여 일반인에게 개방하고 그 산줄기를 우복동천이라 부른다.

형제봉 정상에서의 역사속 생각에서 벗어나 마지막 갈령을 향해 출발하면 20여분 후에 갈령 삼거리에 도착한다. 오른쪽으로 가면 충북 알프스 첫 구간인 구병산과 연결된다. 충북보은군에서 1999년 서원리- 구병산-석기산-장고개-갈령-형제봉-천왕봉-문장대-관음봉-묘봉-상학봉-활목재 에 이르는 43.9km능선을 '충북의 알프스'라하며 보은군에서 특허청에 업무표창까지 등록해 화제다. 이래저래 속리산 구간은 백두대간, 충북 알프스, 우복동천이 동시에 통과하는 큰 산줄기다. 예정시간보다 1시간이상 늦게 날머리 갈령에 도착하여(14시30분) 시원한 수박화채 한 잔에 갈증을 푼다. 이번 대간 길은 힘은 들었지만 산하의 아름다음에 오늘도 행복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