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담계곡, 내설악에서 빚어진 가장 크고 대표적인 골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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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담계곡, 내설악에서 빚어진 가장 크고 대표적인 골짜기
  • 유태헌 서울본부장
  • 승인 2011.09.22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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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헌의 백두대간 종주기] 35구간 ②

산 행 일 시 : 2011년 8월 6일 - 7일
산 행 구 간 : 미시령 - 삼거리 - 황철봉 - 저황령 - 마등령 - 오세암 - 영시암 - 백담사
산 행 거 리 : 16.1km
산 행 시 간 : 10시간

 

 

 

 

 

 

 

 

 

 


오세암이 널리 알려진 것은 우리 불교사와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친 분들이 이곳에서 정진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분이 매월당 김시습, 허응 보우대사, 만해 한용운 선사 등이다.
현재 오세암은 대한불교 조계종 제3교구본사인 신흥사의 말사이며 백담사의 산내암자로 등록 되어 있다.
오세암에서 만경대를 거쳐 영시암(永矢庵)에 도착한다. 영시암은 슬픈 사연이 담겨 있는 암자다.

조선조의 당쟁은 때로는 나라의 위기를 가져오기도 했다. 많은 선비들이 사화(士禍)의 소용돌이 속에서 죽어갔고, 화를 피하기 위해 첩첩산중으로 피했다. 숙종16년(1689)에 있었던 기사환국(己巳換局)은 왕비 인현왕후 민씨가 폐출되고 장희빈이 중전으로 승격되면서 정권이 노론에서 남인으로 넘어가는 엄청난 사건이다. 숙종의 비 민씨는 아기를 낳지 못해 늘 근심과 걱정으로 나날을 보냈다. 그런데 임금의 총애를 받은 후궁 장희빈은 아들을 낳았고, 그 아이가 원자(原子)로 책봉되었다. 장희빈을 사랑하던 숙종은 그녀를 왕비로 승격시킬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것을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노론이 반대하였고, 그래서 숙종은 이들을 숙청하고 남인을 등용했다. 희빈이 낳은 아이의 세자 책봉문제가 나오자 노론의 총수 우암 송시열은, “임금의 보령이 이제 겨우 29세시고 중전은 23세로 아직 젊으신데, 후궁의 아들로 세자를 책봉한다는 것은 시기상조다” 라고 극구 반대했다. 숙종은 송시열의 말을 묵살하고 그에게 사약을 내렸으며 정권을 남인에게 넘긴 것이다.

숙청된 노론 중 김수항(金壽恒)도 있었다. 그의 아들 삼연 김창흡은 어지러운 속세와 인연을 끊고 수도를 하겠다고 암자를 지었는데 그것이 바로 영원히 떠나지 않겠다는 의미의 영시암이다. 그런데 이 암자를 세운지 6년이 지난 어느 날 그의 하녀가 호랑이한테 물려 죽고 만다. 이후 김창흡은 암자를 떠나 어디론가 떠났다고 한다. 혼란한 시대의 뒷면에 존재하는 슬픈 사연이다.

영시암은 ‘庵’이라는 말에서 주는 암자느낌과는 달리 조금 작은 ‘절’ 느낌이 난다. 무단청으로 비바람의 흔적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당우’도 있고 새로 단청을 해 화려한 ‘종주’도 있다. 인상적인 것은 약수터 앞에 한 소쿠리 찐 감자를 놓고 산행객에게 베푸는 공양이다. 감자 두어 개로 허기진 배를 채우고 약수 한 모금 마신 후 길을 떠난다. 백담사 계곡을 따라 솔 밭길을 여유롭게 내려오면 어느덧 수심교(修心橋)에 도착한다.

백담사로 들어가기 위해서 수심교를 건너야 하는데 권력과 돈으로 세상을 내려다보려는 마음, 세상을 바로잡고 싶은 마음, 사로잡은 세상을 맘껏 부려먹고 싶은 마음, 인간의 마음이란 더러워지기 쉬운 한 마당과 같기에 백담사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반드시 수심교를 건너야 하는 것이다. 씻고 또 씻으라고 수심교 밑으로는 계곡의 여울이 그렇듯 흐르고 있는 걸까?

내설악에서 빚어진 가장 크고 대표적인 골짜기는 바로 수심교가 놓여 있는 백담계곡이다. 백두대간 분수령에서 흘러내리는 길골. 곰골, 가야동계곡, 백운동계곡, 수렴동계곡, 그리고 서북릉에서 발원하는 귀때기골, 대승골 물줄기가 모두모여 백담계곡이 된다. 거기에 백담사(百潭寺)가 있다.

‘님은 갔습니다. 아 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黃金)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서(盟誓)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微風)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雲命)의 지침(指針)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만해 한용운님의 시 ‘님의 침묵’ 중에서)

일제 치하에서 우리 민족의 지도자였던 만해(萬海)한용운(韓龍雲,1879~1944) 시인은 백담사를 사랑했다.
만해 한용운은 우리고장 충남 홍성군 결성면에서 한용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동학혁명에 가담 했다가 몸을 피해 찾아온 백담사와 처음 인연을 맺은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후 잠시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25세 때 다시 백담사로 돌아와 이듬해 출가했다. 3·1 운동 당시 33인 대표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3년간의 옥고를 치른 뒤에도 다시 백담사로 돌아와 1925년 불후의 명시집 ‘님의 침묵’을 탈고하는 등 만해는 인생의 고비 때마다 이곳 백담사를 즐겨 찾았다.

백담사는 만해의 사연 깊은 절집이면서도 만해가 ‘님의 침묵’을 탈고했다는 화엄실 외에는 한국전쟁 때 모든 게 사라졌다. 요즘에는 늘상 사람들로 붐비는 큰 절이지만, 1980년대까지만 해도 비만 오면 떠내려가는 섶다리, 자그만 채마밭, 퇴락한 당우 몇 채만 겨우 버티고 서 있던 내설악 깊은 산골의 자그마한 절집에 불과했다. 만해가 머물렀던 사연을 아는 문학도들이나 가끔 들를 뿐 많은 등산객들도 만해와 백담사의 인연을 잘 알지 못했다. 그러다 1988년 11월 전두환 전 대통령이 이곳으로 쫓겨 와 25개월 은둔생활을 하면서부터 일반인에게 만해와 백담사의 인연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후 백담사의 변화는 상전벽해였다. 경내에는 여러 불사가 이루어졌고, 부속암자인 오세암과 봉정암도 더 이상 초라한 제비집이 아니었다. 용아장성과 어우러져 소박한 맛이 넘치던 봉정암 사리탑도 이 무렵 거창하게 단장했다.

한용운의’백담사 사적기’에 의하면 647년(진덕여왕 원년)에 자장율사가 설악산 한계리(지금의장수대부근)에 한계사로 창건하고 아미타삼존불을 조성 봉안하였다. 한계사는 창건 후1772년(영조51)까지 운흥사, 심원사, 선구사, 영취사 등으로 불리다가 수차례 불이나면서 이곳으로 옮겨왔는데 1783년 휘봉과 운담이 백담사로 개칭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백담사라는 사찰의 이름은 설악산 대청봉에서 절까지 크고 작은 담(潭)이 100개가 있는 지점에 세운데서 ‘백담사(百潭寺)’라고 일컫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 백담사에는 법당, 범화실, 화엄실, 나한전, 관음절, 산신각 등 기존건물 외에 만해 한용운 선사의 문학사상과 불교정신을 구현하기 위해 만해 기념관, 만해 교육관, 만해 연구관. 만해 수련원, 만해 도서관, 일주문, 금강문, 만복전, 요사채, 만해당, 적선당 등 16개의 건물로 구성된 한국의 대표적인 고찰이다.

등산객보다 관광객이 많다보니 용대리 주차장까지 가기 위해 마을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끝이 보이지 않는다. 30여분을 기다려 버스를 타고 용대리에 도착해 시원한 맥주 한 잔을 하니 온몸에 피로가 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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