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벌 청산리골에서 울려 퍼지는‘애국가’와 ‘독립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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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벌 청산리골에서 울려 퍼지는‘애국가’와 ‘독립군가’
  • 한관우 발행인
  • 승인 2011.10.13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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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민족의 역사, 애환 서린 만주벌 1만5000리 대장정

항일독립운동의 현장을 가다 <6>

 

청산리대첩비

 

 


우리 민족의 아픈 역사가 남긴 흔적은 아직껏 만주벌 곳곳에 남아 있었다. 세월도 고결한 정신은 이기지 못하는 듯 역사의 현장은 시공을 초월해 민족을 관통하는지 유적지는 아직도 생생했다. 중국 길림(吉林)성 연변(延邊) 조선족자치주의 용정(龍井)시. 이곳은 일제의 억압에 쫓겨 고향땅을 등진 한민족이 타향살이의 설움을 겪은 곳이다. 용정은 박경리의 소설 ‘토지’의 무대로도 잘 알려진 곳이다. 용정시는 시 전체가 한민족의 역사 교육장이나 마찬가지다. 비암산의 일송정(一松亭)과 시인 윤동주의 묘지와 생가, 대성중학교(현 용정중학교), 용두레 우물 등 민족혼이 깃든 현장이 계속 이어진다.

더불어 3·1운동의 민족혼은 아직도 만주벌판에 생생히 살아 있었다. 조국에서 3·1운동이 일어나고 12일이 지난 3·13만세운동이 펼쳐진 역사의 현장인 ‘3·13반일의사릉’은 용정시 외곽에 있었다. 1919년 국내외에서 전개된 3·1운동 가운데 단일 집회로는 최대 규모로 기록된 3·13 용정(龍井) 만세운동에서 희생된 17명의 순국열사가 안장됐다. 이곳의 3·13 반일의사릉도 관리가 허술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곳에는 일본군의 무자비한 진압에 스러진 열혈청년 17명의 의사 중 13명의 무덤과 이들을 기리는 ‘반일의거비’가 서 있다. 조선독립선언서에 남만주 대표로 서명하고 3·13운동을 주도한 남세극 선생의 유해도 묻혔다. 선생은 2000년 국내로 유해가 봉환됐으나, 그의 독립정신은 여전히 이곳에 머물고 있었다.

용정의 3·13운동은 당시 용정에 거주하던 김약전·정재연 등 민족 지도자들과 3만여명의 동포들이 참여했다고 한다. 여기에서도 조국에서 만들어진 독립선언서가 낭독됐으며, 해마다 3월 13일이 되면 동북지역 동포들이 대거 참여해 기념행사를 갖는다고 한다. 이 묘역은 3·1운동이후 방치됐다가 지난 1990년 용정지역 유지들에 의해 목비가 세워진 뒤 지난 1997년 석비로 교체되고 봉분도 단장됐으나 도로에서 불과 20여m떨어져 있었다. 이러한 성지인 참배공간도 아직은 제대로 마련돼 있지 않았다. 그러나 중국동포의 민족의식만으로는 현장 보전과 관리가 역부족인 듯했다. 3·13의사릉 바로 뒤편에는 공장 건물이 흉물스럽게 서 있어 이를 말해주는 듯 했다. 의사릉에는 망국의 한을 안고 애환의 삶을 살다 가슴 벅차게 태극기를 흔들다가 일제에 의해 숨진 영령들의 넋이 영면하고 있다.

다음으로 주목할 곳은 아무래도 길림성(吉林省) 화룡(和龍)시 청산리의 ‘청산리항일대첩기념비’다. 1920년 10월 대한민국임시정부 북로군정서 김좌진 총사령관이 이끄는 독립군이 청산리 백운평 계곡에서 일본군을 섬멸한 것을 기념해 지난 2001년 8월 국가보훈처와 광복회가 세운 것이다. 이 기념비는 5000㎡ 부지에 높이 17.6m, 넓이 25m로 규모 면에서 비석이라기보다는 탑에 가깝게 건립됐다. 광복회에서 공사비를 지원하고 중국 측이 시공했다. 사실 백야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 대첩의 현장에서 찾을 수 있는 흔적이라고 해봐야 청산리대첩기념비 정도다.

청산리전투는 1920년 10월 21~26일까지 백운평(청산리), 완루구, 어랑촌, 천수평, 봉밀구, 고동하 등지에서 6일 동안 벌어진 전투로 독립군이 일본 정규군을 물리친 역사적인 현장이다. 백야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북로군정서군과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 등이 주축이 된 독립군 부대가 당시 화룡현 청산리 일대에서 일본군 3300여명(일본군 공식 발표는 1300여명)을 사살하는 혁혁한 전과를 올린 싸움이다. 다행스럽게도 급속도로 발전하는 중국 땅에서 사라져가는 항일독립운동 유적지 가운데 이곳만큼은 유난히 빛났다. 대장정 학생들은 외로이 서 있는 기념비 앞에 들꽃을 꺾어 헌화한 뒤 묵념으로 이역만리에 떠도는 영혼들을 달랬다.

항일 독립운동가인 김좌진 장군과 홍범도 장군이 각각 이끄는 대한독립군 등이 주축이 된 독립군 부대가 만주 화룡현 청산리 등지에서 일본군과 10여 차례에 걸친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것이다. 하지만 국사과목이 대입시에서도 배제된 것이 오늘날 우리나라 학교교육의 현실이고 보면, 이런 실정에 ‘청산리전투’와 ‘백야 김좌진 장군, 홍범도 장군, 이범석 장군’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들과 학생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하는 의문이 자꾸 뇌리를 스치고 있었다. 청산리 계곡을 따라 올라가다가 주먹밥으로 허기를 달래는 대장정 대원들의 모습을 보면서 홍성출신의 백야 김좌진 장군 등 우리의 독립군들의 위대한 정신에 고개가 숙여졌다. 이렇게 먼 이국땅에까지 와서 구비진 산 속 척박한 환경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했을 옛 선조들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노라니 탄식이 절로 나왔다. 이국땅에 잠든 영혼들을 달래기 위해 이곳 청산리골에서는 변함없이 들리는 외침은 홍성의 대장정 단원들이 목이 터져라 부르는 ‘애국가’와 ‘독립군가’였다.

 

 

 

 

 

 

 

 

 

 

반일의사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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