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농반어 사라지고 마을 공동체 파괴로 이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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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농반어 사라지고 마을 공동체 파괴로 이어져
  • 홍주일보
  • 승인 2014.08.07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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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파괴가 부른 재앙 충청해안의 토사퇴적<2> 서천군 연안의 토사퇴적 실태

 


유부도, 멸절 위기에 처한 백합
서천군 통계연보에 따르면 1995년도 서천군의 전업어가 수는 439가구이며 겸업어가 수는 1837 가구였다. 그러나 2005년도에는 전업 어가수가 444가구로 큰 변화는 없으나 겸업 어가수는 854 가구로 급격히 줄었다. 어가 인구수도 1995년도 8779 명에서 2005년도에는 3567명으로 대폭 줄었다. 이같은 변화는 반농반어의 맨손어업이 크게 줄었기 때문이다. 이는 마을에 큰 변화를 불러왔다. 마을의 소득이 크게 줄었으며 젊은 층은 외지로 떠났다. 금강하구를 바라보는 유부도는 백합, 동죽, 바지락 등의 서식지로서 천혜의 조건을 갖춘 곳이었다. 그러나 토사가 쌓이며 모래 함유량이 70% 정도인 모래펄갯벌이 진펄로 바뀌어가고 있다. 이로 인해 이들 어패류가 살기 어려운 조건으로 변화해 가고 있다.

쌓인 진펄로 경운기가 다니지 못해 유부도에서 백합잡이는 2009년도 이후 한 때 사라졌으나 그후 서천군에서 경운기가 다닐 수 있는 길을 조성한 이후 다시 백합잡이에 나서고 있다. 그러나 그 개체수는 날로 줄어들고 있다. <서천군지>에 따르면 마서면 남전리 백사마을 고려말 목은 이색 선생이 이곳에 ‘백사정’이란 정자를 짓고 풍류를 즐겼던 곳이라 한다. 지명 그대로 흰 모래사장이 펼쳐진 곳이었다. 이곳을 ‘옥이 구르는 듯한 물결소리가 나는 곳’이라 해서 ‘쇄팽이’라 불렀다 한다. 마을 주민들은 예로부터 바다에 나가 조개를 줍고 어살을 매어 고기를 잡아 생활했다. 논이 없는 마을이어서 주민들은 바다에 의지했으며 배가 20여척 닿는 제법 큰 포구였다. 꽃게와 대하를 많이 잡았고 배타고 나가면 농어, 도미, 민어, 장대 등을 잡았다. 갯벌에서는 바지락, 가무락조개, 동죽, 맛살, 고막 등을 채취했다.

 

 

 

 


그러나 지금은 진펄이 쌓여 백사장은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다음은 마을 주민 이상식씨의 증언이다. “지금은 토사가 많이 쌓였다. 가슴 높이 만큼은 쌓였다. 하굿둑, 북측도류제 들어서면서 조류가 느려져 쌓인 것이다. 그러면서 고기도 안잡힌다. 조개만 캐가지고는 못산다. 조개는 아녀자들 부수입 정도이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빨리 막아서 공장 지으라고 요구했다. 그러면 나갔던 사람들도 다시 돌아올 것이 아닌가. 그래서 이 마을에서는 갯벌 매립을 찬성했던 것이다.”인근 솔리천 하구는 쌓이는 토사로 갯골이 점점 깊어지고 있다. 만조 때에는 해수면의 상승으로 1924년도 일제가 막은 장뚝을 위협하고 있다.

썰물 때 걸어들어가던 아목섬
송석리는 2001년 해양수산부로부터 서천에서 가장 먼저 어촌체험마을로 선정됐다. 특히 갈목백사장은 모래찜질과 각종 조개 채취로 소문이 났다. 아목섬은 썰물 때면 걸어들어갈 수 있어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마을 주민들에 따르면 갯벌체험마을로 소문이 나면서 어패류 채취 관광객이 하루 1000명, 주말 휴일에는 3000∼4000명 정도 몰렸다 한다. 그러나 지금은 죽뻘이 허리께까지 차 섬에 걸어들어갈 수 없다. 마을 주민들은 한결같이 2006년 새만금방조제가 완공되면서 뻘이 급격히 차올랐다고 말하고 있다.
이와 함께 온갖 어패류로 풍요로웠던 갯벌이 죽어가며 대부분 맨손어업이었던 마을 주민들의 소득원도 사라졌다. 지금은 김양식에 종사하는 몇몇 세대 외에는 더 이상 바다는 이들의 삶의 터전이 아니다. 아항도는 뻘이 차올라 더 이상 걸어 들어갈 수 없는 곳이 되었다. 주된 소득원이 사라지자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 마을을 떠났으며 김 양식에 종사하는 주민 외에 마을 주민 대부분은 70, 80대 노인층이다. 판교천이 유입되는 장구만은 맛살이 버글버글했다고 주민들은 말하고 있다. 장구리에서 만난 마을 이장 임창실씨는 “옛날에 갈코, 맛살개를 저금통장이라 했다. 그것만 있으면 먹고 살았다.

 

 

 

 

 

 


결국 장구만이 사람들 먹여 살린 것이다. 장구만에 맛살이 지천이었다. 맛살 뿐만이 아니다. 백합, 바지락, 동죽, 꼬막이 버글버글했다. 가산여라고 갈목 앞에 여가 있는데 경운기 타고 거기까지 가서 바우지(민꽃게), 굴, 꼬막 등을 잡아왔다”고 말했다. 하굿둑 막고 새만금 막으면서 바다가 급속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뻘이 차올라 더 이상 갯것들이 살지 않는다. 한 때 칠게를 잡아 소득을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사람들은 더 이상 바다에 가지 않는다. 바다 환경의 변화는 마을 공동체 파괴로 이어지고 있다. “전에는 120세대가 넘었다. 자식들은 다들 떠났다. 나만해도 4남매를 두었는데 딸들은 시집을 갔고 자식들은 서울서 산다. 여기서 먹고 살 게 없잖어? 그래서 다들 외지로 나갔다. 나간 자식들이 다시 온다고 해도 뭐해먹고 살겠는가. 바다도 다 죽었지만 젊은 사람들 바다에서 해먹을라고 하겠어? 지금 김 하는 사람들도 다 환갑이 넘었다. 그 사람들 더 늙으면 김 할 사람들도 없을 것 같다.

 

 

 

 

 

 


젊은 사람들이 배워야 하는데 누가 배울라고 하나.” 옛날 해변에서 돌을 쉽게 구할 수 있는 곳에는 독살(石箭)이 있었다. ‘돌로 만든 어살’이라는 뜻이다. 이는 밀물이 들어왔다 썰물이 빠져나가는 곳에 돌을 두세 자 높이로 쌓아두고 고기를 잡는 가장 원시적인 고기잡이 방법이다. 한국의 서해안은 조수 간만의 차가 크고 갯벌이 발달해 있어 먼 옛날부터 이러한 방법을 이용해 대량으로 고기를 포획할 수 있었다. 대나무를 쉽게 구할 수 없는 충청도 해안에서는 독살이 발달했다. 비인만에서는 내도둔과 장포리에 대규모의 독살이 있었다. 두 곳 모두 쉽게 돌을 구할 수 있는 곳이다. 조기는 돌그늘을 좋아하여 펄과 모래가 섞인 암초 주변은 천혜의 어장이었다. 조기가 알을 낳는 데 최적의 수온인 11-14도에 이르는 4월 중순에서 5월 상순이면 수억 마리의 조기떼가 비인만으로 회유해 들어와 독살에 조기떼가 가득 차기도 했다고 마을 사람들은 증언하고 있다. 바지락, 동죽, 백합 등이 지천이던 갯벌은 뻘이 쌓이기 시작해 지금은 들어가기조차 어렵다. 뻘이 차오르며 조개도 모두 사라졌다. 독살 안에도 뻘이 차올라 더 이상 제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다. 할미섬 주변의 암반조간대에까지 뻘이 쌓여가고 있어 주민들의 소득원이던 굴이 사라졌다.
<이 기획취재는 충청남도지역언론지원사업의 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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