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 1952년 4월 초대 읍·면의회의원 선거 142명 선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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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 1952년 4월 초대 읍·면의회의원 선거 142명 선출
  • 한관우 발행인
  • 승인 2017.04.13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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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홍주, 지역사를 다시 읽다 <6>


혼란 속에서도 총선준비가 진행돼 4월 16일 등록을 마감한 결과 의석수 220석에 총 993명(무소속 400,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 221, 이외 한민당과 청년단체 등)이 입후보 했다. 홍성에서도 5·10선거는 치러졌고, 대한민국 정부수립은 현실화 됐다.
홍성에서는 선거가 다가오자 혼란스러운 분위기가 계속됐다. 한독당의 주요 인물들은 선거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 참여자는 대부분 선거참여를 주장했지만, 일부에서는 반대하기도 했다.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 위원장인 손재학은 선거참여 쪽이기는 했지만 여전히 망설이고 있었다.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는 대동청년단·애국부인회·서북청년단과 연석회의를 열고 선거참여에 대한 찬반논의를 해 손재학을 후보로 내세우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결국 손재학은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 회원들이 직접 후보등록을 함으로써 ‘타의에 의해 출마’하게 됐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한독당은 후보자를 내지 않기로 결정했으며, 이에 따라 유승준은 출마하지 않았다. 반면 대동청년단은 독자후보를 내세우기로 결정하고 박준택을 후보로 내세웠다. 당시 홍성에서의 1948년 5·10선거 당일의 분위기에 대해 ‘민족사상 처음으로 실시하는 이번 선거는 입후보자와 유권자가 다 같이 경험이 없는 일이었으나 비교적 질서정연하게 진행됐고, 투표율도 유권자의 90%라는 숫자를 나타냈다. 유권자를 매수하거나 관권의 개입 없이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투표가 진행됐다. 좌익분자들이 투표 2일전인 5월 8일 야간에 방화와 구타를 감행 공포분위기를 조성 투표를 방해하려 했으나 치안책임자의 노력으로 평온한 가운데 투표와 개표가 원만하게 진행됐다. 웃어야할 일로는 입후보자의 사진을 투표장 입구에 첨부케 했는데, 몇몇 유권자가 투표지에 투표를 하지 않고 사진에다 기표하는가 하면 사진을 첨부하지 않은 입후보자는 사진을 찾기 위해 다른 유권자에게 물어보는 일이 벌어졌다는 일화가 있다’고 홍성군지 등에 기록하고 있다. 홍성에서 처음 실시된 1948년 제헌국회의원을 선출하는 5·10 총선거 출마자와 득표상황은 다음과 같다.

■홍성, 5·10총선거에서 손재학 제헌의원 당선
앞의 표에서처럼 홍성에서는 5·10선거에 5명이 출마해 손재학 독립촉성국민회 후보가 1만8260표를 득표해 압도적으로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됐다. 당시 홍성에서는 손재학 후보를 대적할 인물이나 세력은 없었다고 한다. 이 시기는 이승만을 추종하는 독립촉성국민회 세력이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대동청년단도 일정한 세력을 가졌지만 독립촉성국민회와 세력기반이 겹쳐져 독자적인 힘은 갖지 못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손재학(1901~1989)은 홍주(홍성)에서 태어나 1920년대 기독교인으로서 ‘홍성엡윗청년회’에 참여했고, 1940년대에는 홍성교회 내에 있던 고아원 운영을 책임지는 총무를 맡기도 했다. 1920년대에는 유교부식회의 기관지 ‘인도’사의 영업책임을 맡기도 했고, 사상단체 무공회 회원, 신간회 서무부 총무간사, 동아일보 기자 등 사회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해방 이후에는 자치위원회 부위원장,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지부장, 제헌국회의원, 자유당 홍성군당 부위원장 등 우익정치활동을 한 인물로 홍성의 현대 정치·사회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1928년 3월 1일 창간된 월간잡지 ‘인도’는 250쪽 분량으로 5000부를 발간했는데, 일본경찰의 탄압과 강제적인 원고검열 등의 고통으로 1930년 12월호를 종간호로 발행을 마쳤다.
박준택은 본래 운전기사 출신으로 대한통운 홍성영업소를 운영하고 있었으며, 광복청년단과 대동청년단 단장을 지낸 인물이었다. 그의 고향은 홍성이 아니었기 때문에 정치적 기반이 대동청년단과 서북청년단 정도였는데, 대동청년단 조직은 독립촉성국민회 조직과 겹쳐 있어 일사불란하게 그를 지지할 수는 없었다. 이종순은 부여출신으로 당시 현직 홍성군수로서 군수 직을 사임하고 출마했다. 자칭 남인의 후예라고 하면서 표를 얻으려 했다. 박상렬은 홍성의 만석꾼 대지주 박돈규의 차남으로 일본유학을 다녀왔지만 홍성에 아무런 기반이 없었고, 출마 동기도 자신의 의지라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그의 선거자금을 노리고 출마를 권유한데서 비롯된 경우다. 김봉규는 홍성의 부호이며 안동김씨로 갈산의 김병원 차남으로 일본유학을 하고 돌아온 인물이었으나 김병원이 일제하에서 관선 도평의원을 지내는 등 친일의 흔적이 있었기 때문에 지지를 받지는 못했다.

■1948년 7월 17일 제헌국회, 헌법 제정·공포
1948년 5·10선거에서 당선된 손재학은 독립촉성국민회 지부장을 사퇴했다. 그의 후임 지부장으로는 홍성에서 호서양조장을 경영하고 있던 서창순을 선출하고, 부지부장으로 이하용과 김교성을 선임했다. 1948년 7월 17일에 제헌국회가 소집돼, 헌법이 제정·공포됐고, 정부조직법도 제정·공포됐다. 이 법에 의해 구성된 중앙행정기구는 12부(내무·외무·국방·재무·법무·문교·농림·상공·사회·보건·교통·교통·체신), 4처(총무·공보·법제·기획), 2위원회(고시·감찰) 및 3청(외자구매·외자관리·관재)으로 돼 있었다. 그 후, 일본인 재산의 관리 1950년 한국전쟁으로 인한 ICA원조자금의 처리와 국군제도의 정보 등의 이유로 정부조직 개편이 이뤄졌고, 제2차 개헌으로 정부형태가 대통령제로 바뀌면서 또 다시 정부조직 개편이 이뤄졌다.
홍성에서도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헌법에 입각한 여러 법령이 시행됐다. 군(郡)은 중앙이나 도의 시책과 지시를 읍면과 리동의 주민에게 그대로 전달하는데 그쳤던 과거의 소극 행정에서 벗어나 주민본위 현지행정의 주체가 됐고, 군 조직은 군민들의 생활을 향상시키는 방향으로 개편을 거듭했다. 이와 함께 일제시대 이래의 군청 직제도 많은 변화를 가져와서, 판임관은 사무관(3급), 군속은 주사(4급)로, 기수는 기사(4급)로 고용원은 서기(5급)로 각각 개칭했다. 군수는 3급으로 보해 오다가 1963년부터 3급 을류 지방공무원으로 보했으며, 1981년 직급개정으로 서기관(국가직 4급)으로 보했다. 사법기관으로는 대전지방법원 관하에 5개 지원이 설치됐는데, 홍성에도 대전지방법원 홍성지원이 설치됐다. 검찰은 1946년 대전지방검찰청 산하에 5개 지청이 설치됐는데, 홍성에도 대전지방검찰청 홍성지청이 설치됐다.
제헌국회의원 임기 2년이 끝나고 실시된 1950년 5·30 제2대 국회의원선거에는 독립촉성국민회의 서창순 후보가 출마했고, 한독당 부위원장으로 5·10선거에는 참여하지 않았으나 1948년 정부수립 이후 정부의 문교부 문화국 지도과장으로 근무하다가 5·30 제2대 국회의원선거에 출마한 유승준이 당선됐다. 당시 유승준은 무소속으로 출마했지만 사실상 야당이었다. 서창순은 독립촉성국민회의 조직을 갖고 있었으면서도 명망성에서 뒤졌기 때문에 낙선했다.
한편 1949년 7월 최초의 지방자치법이 제정·공포됐으나, 1950년 한국전쟁으로 일시 중지됐다. 전세가 호전되자 정부는 지방의원선거를 1952년 4~5월 사이에 실시해, 도·시·읍·면의원을 선출하고, 각각의 의회를 구성했다. 이로써 지방자치제도의 근간이 수립됐다. 홍성에서도 1952년 4월 25일 초대 읍·면의회의원 선거를 실시해 142명의 의원이 선출됐다. 제2대 때에는 133명, 제3대 때에는 129명이 각각 선출됐다. 도의회의원선거도 1960년까지 4회 실시 됐는데, 초대와 2대는 3명, 3대는 2명이 각각 선출됐다.한관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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