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석면산업, 재일 한국인에게 가장 많은 피해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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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석면산업, 재일 한국인에게 가장 많은 피해 줬다
  • 취재=한기원/사진=김경미 기자
  • 승인 2017.10.12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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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 아시아 최대 석면광산 충남, 안전지대일까? 〈6〉
일본 오사카 센난지역 마을에 세워진 ‘센난석면의 비’.
일본 오사카 센난지역 마을에 세워진 ‘센난석면의 비’.

오사카 한국인 40만명 석면방직공장·군함 만드는 군수시설서 일해
석면, 국제암연구소 지정 1급 발암물질 호흡기 통해 체내에 침투해
석면폐, 석면가루 폐에 들어가 염증, 시간 지나면 굳어서 호흡곤란
일본 오사카 센난과 한난지역 석면피해의 상징돼 ‘센난 석면의 비’

일제강점기 일본이 1급 발암물질인 석면을 군수자재로 쓰기 위해 한국에서 석면광산을 개발하거나 일본의 석면광산에 한국인을 강제로 징용했다. 일본은 당시 ‘중요광물 비상증산 강조기간’을 설정, 강제 징용한 한국인들을 한국 각지와 일본 오사카 센난·한난지역의 석면광산 노역에 동원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시작되자 내선일체를 내세워 오사카에 거주하던 40여만 명의 한국인을 석면방직공장과 군함을 만드는 군수시설에서 일하도록 했다.

석면과의 악연은 해방 이후에도 계속 됐다. 1971년에는 일본 최대 석면공장인 ‘니치아스(현 제일E&S)’가 부산으로 석면공장을 이전했다. 이곳에서 일하다가 1994년 폐를 둘러싼 막에 종양이 생기는 악성중피종으로 사망한 여성노동자는 국내 최초 석면피해자로 기록됐다.
 

석면은 세계보건기구(WHO)산하 국제암연구소(IARC)가 지정한 1급 발암물질로 호흡기를 통해 체내에 침투한 뒤 폐암 등을 일으킨다. 일제는 홍성군 광천읍에 건설한 아시아 최대 규모의 ‘광천석면광산’을 시작으로 한반도에 46개의 석면광산을 개발했다. 석면광산은 해방 후 방치되다가 석면수요가 늘면서 잠시 가동됐고 해외 수입량이 늘면서 다시 폐광됐다.

문제는 석면광산 일대가 아무런 조치 없이 방치돼 인근 주민들이 일상적으로 석면에 노출됐다는 점이다. 2008~2010년 정부조사에서 충남 홍성·보령 석면광산 인근 주민들의 석면피해가 대거 확인됐고, 이 사건은 2011년 석면피해구제법이 제정되는 직접적인 단초를 제공했다.

일제강점기가 끝난 후에도 일본은 한국에 석면문제를 던져줬다. 지난 1971년 일본 최대 석면공장 ‘니치아스’가 석면공장을 부산에 옮겨 합작회사를 설립한 것을 시작으로 20여 년간 수십 개의 석면공장이 부산으로 이전했다. 한국은 일본의 ‘공해수출’ 대상이 돼 부산은 충남 석면광산 다음으로 석면피해가 많은 지역이 됐다.

일본 석면산업은 재일 한국인까지 많은 피해를 줬다. 일본은 1937년 중일전쟁부터 본격적으로 한국인 강제노역을 실시해 수많은 재일 한국인은 일본의 명령 아래 강제로 석면공장에서 일하게 됐다. 해방 후에도 일본에 남은 한국인들은 차별과 냉대 속에 다시 석면공장으로 내몰렸다.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 시기 일본석면 산업은 전쟁특수를 누렸지만, 재일 한국인 노동자들은 석면피해를 그대로 받을 수밖에 없었다.

센난지역 취재 광경.
센난지역 취재 광경.

■일본, 2005년 구보타쇼크(대형 석면공해사건)
지난 2005년 일본을 ‘구보타쇼크(대형 석면공해사건)’가 덥쳤다. 일본 전역에서 석면피해를 조사하는 등 일본 전역이 들썩였다. 조사결과, 석면피해자의 상당수가 재일한국인임이 공식적으로 드러났다.

석면피해가 사회문제로 번지면서 일본은 2006년에 석면사용을 금지하는 석면피해구제법을 도입했다. 반면, 한국은 2009년에 석면사용을 금지했으나 석면피해구제법은 2011년 1월에 들어서야 시행됐다. 석면질환은 매우 위험한 질병으로 알려졌다. 석면에 오래 노출되면 석면폐나 폐암 등 각종 질환에 걸릴 위험이 높다.

석면은 잠복기가 10~40년에 이르러 피해자가 질병 발생 유무를 알기 어렵고 치사율이 높다. 특히 석면폐는 석면가루가 폐에 들어가 염증을 일으키고 시간이 지나면 딱딱하게 굳어서 호흡곤란을 일으키는 병으로 석면관련 업종 사람들의 직업병이라 불린다.

당시 일본 오사카에 사는 한국인은 40여만 명에 달했다. 이곳에서 나온 석면은 일본이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을 치르는 국가에 판매할 군수 물자를 생산하기 위해 사용됐다. 1971년에는 일본 최대 석면공장인 ‘니치아스’가 부산에 있는 ‘제일화학(현 제일 E&S)’으로 청석면 방직기계를 이전하고 합작회사를 세웠다. 1994년에는 이곳에서 일하던 여성노동자가 악성중피종으로 사망했다. 이 여성은 한국 최초의 석면 피해자로 인정받았다.

일본과 독일의 석면방직기계를 들여온 제일E&S는 최근까지 한국에서 가장 많은 직업성 석면 환자를 발생시켰다. 석면 피해자는 ‘환경성’과 ‘직업성’ 질환자가 있다. 일본 정부는 2006년 석면사용을 금지하고 석면피해구제제도를 도입했다. 한국도 2009년부터 석면사용을 금지했으나 구제제도는 2011년에서야 시행에 들어갔다. 이후 한일시민사회는 석면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교류하며 피해자 대책 활동을 함께 전개하고 있다.

 

센난지역석면피해시민모임의 유오카 대표와 시노 사무국장.
센난지역석면피해시민모임의 유오카 대표와 시노 사무국장.


■오사카 센난·한난지역 석면피해의 상징
일본 오사카에서 동남쪽으로 1시간여 떨어진 작은 도시 센난과 한난지역의 마을은 석면피해의 상징이 된 곳이다. 지난 2014년 10월 일본 환경운동사에서 아주 빛나는 주민들의 승리가 있었다. 10월 9일 일본 대법원은 오사카부 센난지역의 석면 방적공장 근로자와 유족 89명이 제기한 소송에서 “국가가 석면이 인간의 신체에 끼치는 악영향을 알고 있으면서도 규제하지 않았다”며 “원고들에게 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고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일본 언론뿐 아니라 국내 언론에서도 판결 내용을 중요하게 전하며 국내 석면 피해 관련 소송과 정책에 영향을 미칠지 주목했다. 하지만,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주민들의 고통과 슬픔의 역사, 위대한 투쟁과정은 보도되지 않았다. 특히 다수 피해자들이 재일교포이며 한일관계의 역사적 비극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은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역까지 마중을 나오고 취재진에게 점심을 대접하는 등 친절과 적극성을 보이며 석면피해 실태를 설명해준 시민모임 대표자들의 태도는 우리를 놀라게 했다.
 

이 자리에서 센난지역석면피해시민모임의 유오카 가즈요시(80) 대표는 “일제강점기 오사카 일대에는 징용 등으로 끌려온 조선 사람들이 40만 명 이상이었다. 2차 대전 전후로 제일교포들이 센난 지역으로 들어와 피해를 입었고, 양심적인 일본인들의 마음에는 그것이 고통으로 남아 있다. 석면 제품을 만들 때 일본, 특히 센난 지역에는 2차 대전 이전과 이후에 걸쳐 많은 재일 교포가 왔다. 석면공장이라는 혹독한 환경 속에서 힘든 일을 할 수밖에 없었고 피해자가 속출했다”며 역사적 배경도 상세하게 설명했다.

“센난 지역은 1900년대 초부터 석면 공장이 많이 생겼고 불과 10여 년 전까지도 주변에 공장이 많이 남아 있었다. 100년 동안 이 지역에서는 석면 산업이 계속 발전해 왔고 1945년까지 군수물자, 전쟁을 위한 용도로 이용됐다. 제품을 만드는 사람들은 석면의 위험성을 몰랐지만 정부는 석면이 위험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산업발전이라는 위험성을 숨겼고, 그 결과로 피해자들이 생겨나게 됐다. 우리는 재판에서 국가의 책임을 물었고, 결국 2014년 10월 9일 대법원에서 우리가 승리했다”고 밝혔다.

취재진의 일본 석면과 관련된 취재의 시작은 ‘센난 석면의 비’에서부터 시작됐다. ‘센난 석면의 비’가 세워진 곳은 오래 전 동네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노는 곳이었다고 한다. 일본 전역으로 이어지며 오래된 절을 이어주는 순례자의 길옆이고 유오카 대표가 사는 집 바로 옆이기도 했다.

유오카 대표는 “이 기념비는 석면 피해자와 소송을 기억하기 위한 것입니다. 몇 년 전 90세의 일기로 돌아가신 석면 피해자 다나카 할머니의 말처럼 센난에서 석면은 사람들을 먹여 살리기도 했고 또 아프게도 했습니다. 이 때문에 이 비의 이름을 ‘센난 석면의 비’라고 했습니다. 석면 사업을 하는 집안사람으로서 석면 피해자 모임을 주도하는 것이 부담스러웠습니다. 사람들이 요청했을 때 처음엔 거부했었어요. 센난 지역의 석면 사업자와의 관계도 있었고 석면 사업을 하는 집안 사람이라는 부담 때문이었죠. 하지만 피해자들을 위해 무언가 하긴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죠. 처음에는 소송이 2년 정도면 될 거라고 봤는데 5배인 10년이 걸렸습니다.”

유오카 대표는 1942년생으로 1962년 교토대학에 입학한 후 학생운동과 정당운동을 하다 제적됐다. 1968년부터 집안의 가업인 방적 사업을 이었지만 석면을 원료로 사용하지는 않았고 담요, 카펫 등을 만들었다.

2005년 6월 29일 구보타 쇼크가 터졌고 유오카 대표는 ‘아사히신문’의 기사를 보고 석면 문제를 알게 된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석면 방적업을 해온 가족 친지 중에서도 석면 질환 피해가 있었는데, 둘째와 셋째 작은 아버지와 그들의 자녀들에게 석면폐, 폐암, 흉막비후가 진단됐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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