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정신·개화사상, 민족의 진로 개척한 이상재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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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정신·개화사상, 민족의 진로 개척한 이상재 선생
  • 한관우 발행인
  • 승인 2015.06.26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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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국항쟁의 진원지를 찾는 역사기행 <3>

충청 독립운동가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충남 서천군 한산면 종지리에 있는 월남 이상재 선생 생가지.

묘소가 있는 경기 양주시 “이상재 선생 묘소 양주에 있는지 몰라요”
독립운동가 묘소 옆 무허가 굿당, 진입로 좁고 주차장·안내판 없어

월남 이상재(1850~1927) 선생은 1850년 10월 26일 충청남도 서천(舒川)군 한산(韓山)면 종지리에서 고려 말 충신 목은 이색의 16대 손으로 태어났다. 한산은 선생의 본관이다. 호는 월남(月南), 본명은 계호(季皓). 그가 태어날 무렵은 조선조 500년의 국운이 쇠하여 관리들의 부패가 극심하고 일본을 비롯한 외세가 침략하려는 움직임이 노골화되던 때였다.

월남은 18살 때 과거를 보러 처음으로 서울에 올라갔다고 한다. 관료계의 부패는 인재를 등용하는 과거시험까지 번져 있어서 합격 여부는 순전히 금권과 정실에 달려있었던 시기였다. 선생은 낙방하여 이 같은 실상을 온몸으로 겪은 후에 “참으로 한심하다. 다시는 들어갈 데가 아니구나”라고 탄식하고 과거장에 들어갈 생각을 버렸다고 한다. 선생은 서울에 남아 세도가의 문객(門客)으로 10년 동안 세상을 배웠다. 이때 그와 사귄 이가 박정양으로 정부가 1881년 일본에 신사유람단을 파견할 때 단장을 맡았던 사람이다. 1884년 우정국총판(郵政局總辦)을 맡고 있던 홍영식의 권유로 우정국 주사가 되어 인천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선생은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연루된 것으로 조사를 받았으나 당당히 처신하고, 고향으로 내려갈 것임을 밝혀 처벌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삼하리 산79 월남 이상재 선생의 묘.

1881년 박정양이 신사유람단의 한 사람으로 일본에 갈 때 수행원이 되어 일본으로 건너가, 동행하였던 홍영식·김옥균, 어윤중 등의 개화파 지식인들과 깊은 교분을 나누었다. 이들의 수행원으로는 미국 유학경험이 있는 지식인인 유길준, 윤치호, 고영희 등이 이상재와 함께 따라갔다. 1884년 개화파가 일으킨 갑신정변이 3일천하로 실패로 돌아가자, 고향인 서천 한산으로 낙향하여 농사를 짓다가 박정양에 의해 계속 등용되었다. 선생은 자신에 대한 신임이 두텁던 박정양이 1887년 초대 주미공사로 임명되자 그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 1등 서기관으로 근무하였다. 당시 월남은 한국사람을 낯설어하는 미국 청소년들이 외교관인 자신에게 돌을 던지면서 무례하게 굴어 경찰조사를 받게 되자 ‘너그럽게 용서해달라면서 선처해 줄 것’을 요청할 정도로 너그러운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이러한 관용은 후에 독립운동가로서의 이념이 되기도 했다. 선생의 미국생활은 오래 가지 못하고 이듬해 청나라의 압력을 받아 사신들과 함께 귀국하였다.
부친상을 당해 고향에 내려가 있던 선생은 박정양이 1894년 갑오개혁 후에 내무독판(內務督辦)이 되자 그의 추천으로 우부승지(右副承旨)겸 경연참찬(經筵參贊)이 되었다. 이어 학무국장(學務局長)을 맡으면서 젊은이들에게 바른 교육을 시키고, 민족자주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깊이 생각하게 됐다. 이후에 전개되는 선생의 후반인생을 보면 그것은 독립운동가로서 전범을 보이며, 올곧은 삶이 무엇인지를 몸으로 보여주는 실천가임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선생은 1896년 서재필, 윤치호 등과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독립협회를 조직하여 대중계몽집회인 만민공동회 의장과 사회를 맡아 활동했다. 하지만 1898년 독립협회는 부보상들의 어용단체인 황국협회를 앞세운 보수파들의 탄압으로 해산되었다. 1902년에는 개혁파 인사들이 대거 구금되거나 일본으로 피신하는 개혁당 사건이 일어나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27년 2월에는 이념을 초월해 민족적 단결을 목표로 하는 민족단일 전선인 신간회가 결성되자 회장으로 추대됐다. 이미 고령과 노환으로 병석에 누워 이를 수락했으나 3월 29일 숨을 거뒀다. 4월 7일에는 선생을 추모하는 장례가 처음으로 ‘사회장’이라는 이름하에 경성(서울)에서 치러졌다. 당시 경성 인구는 35만 명 정도로 추산됐는데, 사회장에 운집한 추모객은 20만 명을 헤아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광복 70년인 지난 3월 서거 88주기를 맞았다.


양주에 잠든 월남 이상재 선생 “양주시는 몰라요”

 

경기도 양주는 천년역사의 터전 위에 세워진 도시로 경기북부지역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이다. 충남출신의 독립운동가 월남 이상재 선생의 묘소가 생가인 충남 서천의 한산에서 떨어져 있는 경기도 양주 땅을 본지 취재팀이 찾았다. 양주시 장흥면 삼하리 노고산 자락에 위치한 영원한 청년 ‘월남(月南) 이상재 선생’의 묘소를 찾는 길은 쉽지가 않았다. 제대로 된 번듯한 이정표나 안내판 하나가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의정부에서 39번 지방도를 따라 송추삼거리, 장흥과 일영을 지나 삼하리 마을회관에 도착했다. 이상재 선생 묘역 안내판이 없어 길가의 한 주민에게 겨우 안내를 받을 수 있었다. 마을회관 건너편 전원일기 테마촌을 지나 1차선 마을길을 따라 지그재그로 1.2Km정도 올라가니 바닥을 드러낸 금바위저수지 상류가 나타났다. 한켠에는 동래 정인보 선생이 지은 신도비가 쓸쓸하게 서있고, 신도비 왼쪽 소로길 사이로 묘소가 보였다. 이곳에도 정확한 안내판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묘소 옆 계곡에는 굿당이 자리하고 있어 굿소리만 쟁쟁거릴 뿐이다. 굿당사람들에게 선생의 묘소를 물으니 “모른다”는 답변만 되돌아왔다. 사실 바로 위쪽인데 ‘모른다’는 답변을 들으니 무슨 사연이 있는 듯 했다. 산중턱 깊숙한 독립운동가 묘소 옆에 굿당이 들어선 것도 실망스러운데, 독립운동가에 대한 무관심은 양주시도 마찬가지다. 양주 땅에 묻혀 있는 독립운동가의 묘소는 관심 밖이기 때문이다. 문화재나 관광관련 부서에서도 이상재 선생도, 양주에 선생의 묘소가 있는 지도 잘 모른다는 대답이다. 양주시청 관계자는 “알 수도 없고 관련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 등록문화재가 아니면 시청에서는 알 수 없다. 묘소는 유가족이 관리하지 않느냐”고 반문하니 말이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 바친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공무원들과 관청의 관심이 이럴진대.

월남 이상재선생기념사업회 이항직 상임이사는 “1957년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서천 한산에서 경기 양주시 장흥면 삼하리 산79로 천묘, 부인(강릉 유씨)과 합장했다”며 “당시 대통령의 지시로 갔는데, 지금 생각하면 후회스런 일”이라며 “산소 옆 굿당도 무허가로 철거판결이 난 상태인데 철거를 못하고 있고, 사실 도로도 포장돼 있지 않고 주차장도 없는 산기슭에 자리하고 있어 후손으로서 부끄러운 일”이라고 심경을 밝혔다. 묘소 주변에는 소나무와 잣나무가 들러 쌓인 가운데 서남향을 하고 있는데, 묘비 정면에는 초대 이승만 대통령이 한문으로 쓰고, 시인 변영로가 삶의 여정을 정리했으며, 서예가 김충현이 누구나 읽기 좋게 한글로 새겼다. 또 묘소 앞에는 YMCA 상징인 심볼(약장)을 상징한다는 역삼각형 연못이 묘지 아래에서 연을 가득 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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