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꺼진 등불 다시 켜고 조국에 생애 바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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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꺼진 등불 다시 켜고 조국에 생애 바치다
  • 한관우 발행인
  • 승인 2015.07.10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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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국항쟁의 진원지를 찾는 역사기행 <4>

충청 독립운동가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석오 이동녕 선생 생가, 앞마당에는 선생의 좌상이 설치돼 있다.

석오 이동녕(1869~1940) 선생은 1869년 충남 천안 목천읍 동리에서 출생했다. 현재 목천읍 동리의 생가는 복원됐고, 그 옆에는 기념관이 세워져 선생의 위업을 기리고 있다. 독립기념관이 자리한 흑성산을 따라 조금만 가면 병천을 목전에 두고 왼쪽 길가에 ‘이동녕 선생 생가지 2.7km’란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전형적인 시골마을이지만 지금은 변화의 물결이 많이 찾아들었다. 병풍처럼 둘러싼 산 아래 그런대로 형체가 잘 보존된 한옥기와집. 세월이 흐른 탓일까, 벽면은 시멘트벽돌로 고친 흔적이 눈에 들어오지만 1000여평 대지는 오늘도 변함이 없다. 들판 건너로 목천면 소재지가 보이고 바로 앞에는 흑성산이 우뚝 솟아있는 곳. 충남 천안시 목천면 동리, 이곳이 석오 이동녕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1869년 9월 2일에 태어난 석오가 일곱 살 되던 해에는 일본이 운양호에 대한 폭격사건을 일으켰고 그 다음해에는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어 오랫동안 굳게 문을 닫고 있던 우리나라도 그 잠겼던 문을 서서히 열기 시작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출중하다는 칭찬을 받아온 그가 13세가 되던 1882년 8월 30일엔 일본과 제물포조약이 체결되었으며, 15세 되던 1885년 1월 9일에는 한성조약이 체결되어 음흉한 침략의 미수는 점차 한반도에 깊숙이 번지고 있었다. 22살이 되던 1892년엔 응제진사시에 급제하여 2년 뒤에 결혼을 했다. 그로부터 10여년이 흘러 석오가 36세가 되던 해부터는 우리나라에 대한 열강의 침략정책이 점점 노골화되어갔고, 특히 그중에도 우리 국토의 병탄하려는 일본의 야욕은 더욱 기세를 올리기 시작한다. 1904년에 체결된 제1차 한일협약은 일본의 그러한 음흉한 기도가 표면화된 대표적인 일이라 하겠다.

석오 이동녕 선생, “조국이 없는 백성은 노예에 불과하다”
외교권마저 빼앗긴 한국은 “껍데기만 남은 허수아비 왕국”
항일구국운동, 조국 독립과 민권국가 건립에 생애를 바쳐

 

석오 이동녕 선생 기념관.

석오 이동녕은 도저히 기울어져가는 조국을 좌시할 수 없음을 자각하고 조국이 없는 백성은 노예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러한 조국의 현실을 보다 못해 마음으로 분개한다. 조국을 위한 큰일을 가슴에 품고 드디어 서울을 향하게 된다. 서울에 올라간 그는 상동천년회에 가입한다. 상동청년회는 상동교회의 전덕기 목사를 중심으로 김지호, 양기탁, 이회영, 이시영, 김구, 이광 등이 결속한 국민계몽단체였다. 그 이듬해 일본의 이또오 히로부미는 매국노 이완용을 회유하여 강제적인 보호조약을 체결케 하니 외교권마저 빼앗긴 한국은 껍데기만 남은 허수아비 왕국 바로 그것이었다. 연안 이씨 양반 명문가에서 태어난 이동녕 선생은 어려서부터 전통 한학을 익혔고, 1892년에는 진사시험에 합격하는 문재를 보였다. 일제의 거세지는 침략과 민중들의 사회개혁 욕구를 목격하면서 근대화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 과정에서 1894년 동학농민전쟁과 청일전쟁을 경험하면서 이동녕 선생의 근대 민족의식은 더욱 굳어졌다. 경상북도 의성군수와 영해군수를 역임한 부친 이병옥을 도와 함경남도 원산에 광성학교를 세워 교육 계몽운동을 했다. 1896년 독립협회의 간사직을 맡아 개화·개혁운동에 참가하다가 옥고를 치른 것은 그 같은 근대화 의지를 실천한 것이다.

한국독립운동은 1894년 의병 봉기로부터 시작됐고, 1945년 8월 일제의 항복으로 끝이 났다. 실로 한국독립운동은 무장투쟁으로 시작해서 무장투쟁으로 끝났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특히 올해는 광복 70주년으로 항일 무장투쟁과 관련해 매우 뜻 깊은 해다. 이동녕 선생은 독립협회 가입을 시작으로 언론·교육활동, 청년회 조직 등을 통해 개화민권, 항일구국운동을 전개하면서 이후 조국 독립과 민권국가 건립에 전 생애를 바쳤다. 3·1운동 이후 임시정부 수립의 주역으로서 임시의정원 초대의장으로 국호, 임시헌법, 관제제정, 민주공화정부수립을 선포했다. 이후 의정원의장, 국무총리, 국무위원, 주석 등의 중책을 맡아 어려운 시기 임시정부를 실질적으로 이끌었고, 1928년 한국독립당을 결성 이사장을 했고, 1935년 한국국민당 당수로 정당통합 운동에도 노력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난 뒤 1939년 김구와 함께 전시 내각을 구성하고 조국의 광복을 위해 싸우다가 마침내 1940년 3월 13일에 급성폐렴으로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장한을 품고 이역만리 중국 땅에서 세상을 떠났으니, 그의 나이 72세였다. 실로 석오 이동녕의 생애는 임시정부와 운명을 함께 했고, 고락을 같이 나누었다. 실의와 낙망, 좌절과 절망의 벽 앞에서도 바람 앞에선 바윗돌처럼 흔들리지 않고 줄기차게 버텼다. 중국 쓰촨성에서 서거, 임시정부 국장으로 모셨고, 광복 이후 김구 선생의 주선으로 유해를 봉환, 사회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광복 70주년을 맞는 지난 3월 서거 75주기를 맞았다. 1962년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다. 꺼져버린 한국의 등불을 다시 켜기 위해서 일신의 고생과 영화 조금도 돌보지 않고 그의 생애를 고스란히 조국에 바친 것이었다.

우리는 오늘 광복 70주년을 맞이하면서 민족과 국가에 대한 선열들의 깊은 뜻을 헤아려 이국땅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독립을 보지 못한 채 눈감은 한은 조국통일의 위대함으로 보답해야 할 것이다. 희망 가득한 꿈을 안은 채 조국의 완전한 통일이 이뤄지는 그날, 이 민족의 완전한 광복의 그날 ‘대의(大義)’를 꿈꾸면서 말이다. 조국은 영원한 어머니의 품이다.


이동녕 선생 기념관 “숭고한 정신을 기린다”

석오 이동녕 선생의 생가는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동리에 있다.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한 이동녕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지난 2005년 12월 생가지 보수 및 정비가 완료됐다. 생가에는 안방, 사랑채 등 옛가구 및 인물모형이 전시되어 있으며, 주변에는 우물, 이동녕선생 좌상이 설치되어 있다. 이동녕 선생 기념관은 2010년 개관됐으며, 생가와 마주하고 있다. 충남도 기념물 72호인 이동녕 선생 생가지 정비사업과 병행 추진된 이번 사업은 선생의 출생지인 천안시 목천읍 동리 79-2번지 일원 8091㎡에 부지에 단층 건물(349㎡)로 건립된 기념관은 선생의 생애 소개와 유품 등을 전시하고 있다. 기념관 앞에는 선생이 생전에 자주 인용한 산류천석(山溜穿石: 산에서 흐르는 물이 바위를 뚫는다는 뜻으로, 물방울이라도 끊임없이 떨어지면 마지막엔 돌에 구멍을 뚫듯이 작은 노력이라도 끈기 있게 계속하면 큰일을 이룰 수 있다는 의미)을 새긴 가로 3m, 세로 5m 규모의 휘호석이 세워져 있다. 기념관 입구에는 선생의 흉상과 태극기를 배치했고, 안에는 선생의 유품과 함께 연보, 가계도, 삶과 사상 등을 소개하는 ‘석오 이야기’와 독립운동 및 임시정부 활동을 소개하는 ‘구국의 일정’ 등 6개의 테마로 구성되어 있다.
석오 이동녕 선생 기념관은 천안시가 지역출신 독립운동가인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충절의 고장’이란 이미지를 높이기 위해 추진한 것으로 총 사업비 41억 원을 투입, 6년 만에 문을 열게 됐다는 것이 천안시청 관계자의 설명이다. 천안시는 이동녕선생 기념관 건립으로 인근에 있는 독립기념관과 같은 병천면에 있는 유관순 열사 추모각, 조병옥 박사 생가 등과 연계, 호국 관광코스로 발전시킨다는 계획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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