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를 잃어버린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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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잃어버린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 한관우 발행인
  • 승인 2015.08.07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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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국항쟁의 진원지를 찾는 역사기행 <6>

충청 독립운동가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의 유관순 열사 생가와 왼쪽으로 매봉교회가 조금 보인다.

“내 손톱이 빠지고 내 귀와 코가 잘리는 고통은 이길 수 있어”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 밖에 없는 것이 유일한 슬픔”

유관순 열사는 1902년 12월 16일, 충청남도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지금의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에서 아버지 유중권(柳重權)과 어머니 이소제(李少悌) 사이의 3남 2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유관순의 집안은 개신교 신자였던 할아버지 유윤기(柳閏基)와 숙부 유중무(柳重武)로 인해 일찍이 개신교 집안이 되었고, 유관순도 자연스럽게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였다.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은 사회개혁, 부녀자 계몽, 교육사업 등을 통해 자주독립의 길을 찾고자 흥호학교(興湖學校) 운영에 가담하여 인재 배출을 위해 노력하였고, 자녀 교육에도 적극적이었다. 이러한 노력 때문에 큰 아들 유우석(柳愚錫)은 공주영명학교에서, 둘째 딸인 유관순은 서울 이화학당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유관순의 고향은 철도가 부설되기 전 서울과 충청남도 공주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로 선교사들이 집중적으로 개신교를 전파하던 곳이었다. 이에 따라 많은 교회가 생겨나게 되었고, 지령리에도 1901년경 이미 교회가 들어섰으나, 1907년 8월 국채보상운동에 이 교회가 동참하는 등 애국활동을 펼치자, 그해 11월 일본군의 방화로 소실되었다.

유관순의 일가인 유빈기(柳斌基)는 케이블(E. M. Cable, 한국명 奇怡富) 선교사와 함께 고향에 개신교를 중흥시키고자, 1908년 조인원(趙仁元) 등과 함께 불타버린 지령리 교회를 다시 세웠다. 이후 숙부 유중무가 선교사로 교회를 이끌면서 유관순도 5∼6세를 전후하여 개신교를 접하게 되었다. 유관순은 1916년경 지령리 교회에 자주 들르던 샤프(Alice Hammond Sharp, 한국명 史愛理施) 선교사의 추천으로 사촌 언니 유예도(柳禮道)와 함께 이화학당에 편입학하였다. 유관순은 교비 유학생으로 보통과에 편입하였고, 유예도, 서명학(徐明學), 이정수(李禎洙) 등과 함께 기숙사에서 5년 동안 같은 방을 사용하였다. 유관순은 1918년 3월 18일 이화학당 보통과를 졸업하고, 같은 해 4월 1일 고등과 1학년에 진학하였다. 이화학당에서는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이문회(以文會)를 중심으로 오후 3시만 되면 모두 수업을 중단하고, 조국 독립을 기원하는 기도회와 시국토론회 및 외부인사 초청 시국강연회 등을 개최했는데, 유관순도 회원으로 활발히 활동하였다.
1919년 1월 22일, 고종이 서거하자 학생들은 자진해서 상복을 입고, 휴교에 들어갔으며, 2월 28일에는 정기모임을 통해 전교생이 적극적으로 만세를 부르기로 결의하였다. 이 결의에 따라 이화학당 학생인 신특실(申特實), 노예달(盧禮達) 등은 파고다공원에서 벌어진 3·1 만세운동에 직접 참여하였고, 당시 고등과 1학년인 유관순은 서명학·김복순·김희자·국현숙 등과 함께 ‘5인의 결사대’를 결성하여, 소복을 하고 기숙사를 빠져나와 대한문 앞에서 망곡(望哭)을 한 뒤, 남대문으로 향하는 시위 행렬에 합류하였다. 이후 3월 5일, 학생 연합 시위가 벌어졌는데, 이화학당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는 정보를 미리 알아낸 학교 측은 교문을 잠그고, 교사들로 하여금 교정 곳곳을 지키게 하였으나, 많은 학생들이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 중 신특실·유점선·노예달 등은 검거되었고, 교사 김독실(金篤實) 등은 투옥되었다. 이날 유관순도 만세를 부르다가 일경에 붙잡혔으나 곧 석방되었다. 학생들의 시위가 극심해지자 일제는 3월 10일 전국적으로 휴교령을 내렸고, 학교로 갈 수 없게 된 유관순은 13일 기차를 통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 때 고향으로 돌아오는 기차에서 친구들이 기차소리를 듣고, ‘동전 한 푼, 동전 한 푼’ 하는 소리로 들린다고 하자, 유관순은 ‘대한 독립, 대한 독립’ 하는 소리로 들린다고 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기도 한다.

 

유관순 열사의 서대문 감옥 수형자 기록표 사진.

고향에 돌아온 유관순은 부친 유중권과 조인원 등 마을 어른들에게 서울에서의 만세운동 소식을 전하고, 숨겨온 독립선언서를 내놓으며, 병천시장에서의 독립만세운동 계획을 상의하였다. 유관순과 사촌 언니 유예도는 만세운동에 주민들이 사용할 태극기를 만드는 등 만반의 준비를 하였고, 1919년 4월 1일, 조인원·유중권·유중무 등과 함께 병천 시장에서 수천 명이 참여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이 사건이 바로 아우내독립만세운동 이었다. 이날 유관순의 부모를 포함하여 19명이 시위 현장에서 순국하였으며, 30여 명이 큰 부상을 당하였다. 유관순은 주도자로 체포되어 공주교도소에 수감되었고, 이곳에서 공주영명학교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구속된 친오빠 유우석을 만나기도 하였다. 5월 9일, 유관순은 공주지방법원에서 5년형을 언도받았고, 중형을 받은 사람들과 경성복심법원으로 넘겨져 6월 30일 3년형을 언도받았다. 함께 재판 받은 사람들은 모두 고등법원에 상고하였으나, 일제의 재판권을 인정하지 않은 유관순은 상고하지 않았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유관순은 이신애, 어윤희, 박인덕 등과 함께 1920년 3월 1일 오후 2시를 기해 3·1 운동 1주년 기념식을 갖고, 옥중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3000여 명의 수감자들이 크게 호응하여 만세 소리가 밖으로까지 퍼져나갔고, 만세를 외치는 함성에 형무소 주위로 인파가 몰려들어 전차 통행이 마비되고, 경찰 기마대가 출동하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유관순은 물론, 많은 애국지사가 심한 고문을 당하였다.

 

매봉산 자락에 있는 유관순 열사의 초혼묘.

1920년 4월 28일 영친왕(英親王)의 결혼기념 특사령으로 유관순의 형기도 1년 6개월로 단축되었으나, 오랫동안 계속된 고문과 영양실조로 1920년 9월 28일 오전 8시 20분, 19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유관순 열사의 마지막 유언은 “내 손톱이 빠져 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 밖에 없는 것만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이화학당은 형무소 당국에 유관순의 시신 인도를 요구하였으나 일제는 이를 거부하였다. 그러자 이화학당 교장 월터(Miss Jeanette Walter)는 이 사실을 미국 신문에 알려 세계 여론에 호소하겠다고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결국 일제는 해외 언론에 알리지 않고, 장례는 조용히 치러야 한다는 조건을 붙여 시신을 인도하였다. 1920년 10월 12일, 유관순의 시신이 이화학당으로 돌아오자 학생들은 통곡으로 맞이하였다. 시신은 이화학당 수위실에 안치하였고, 세브란스 교의를 불러 수습하였다. 유관순의 직접적인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수형기록표의 사진을 통해보면 심한 구타와 영양실조 등의 부작용에 따른 갑상선 기능저하증이 주된 원인으로 추정되고 있다. 10월 14일 이화학당 측은 정동교회 김종우 목사의 주례로 이태원 공동묘지에서 조촐히 장례를 지냈다. 이후 일제가 이태원 공동묘지를 군용기지로 개발하면서, 유관순의 묘는 미아리 공동묘지로 이장되었으나 소실되었고, 현재 유관순 생가의 뒷산인 매봉산 자락에 초혼묘(招魂墓)가 봉안되어 영혼을 안은 채 말이 없다. 1947년 유관순열사기념사업회가 결성되었으며, 1951년 순국의열사 심사위원회에서 순국의열사로 선정되었다.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1972년에는 유관순이 생전에 살았던 천안시 병천면 탑원리에 추모각이 건립됐다.

 


 

유관순 열사 관련 논란 ‘무엇이 문제?’

유관순 열사 첫 학교 공주영명여학교? 이화학당?

 

이화학당 시절, 뒷줄 오른쪽 끝이 유관순 열사.

유관순 열사의 첫 학교가 이화학당이 아닌 공주영명여학교인 것으로 확인됐다는 주장에 관심이 쏠린다. 천안시는 유관순 열사의 학교 기록을 수정해 달라는 충남향토연구회 박철희(72)씨의 민원에 따라 국가보훈처와 독립기념관에 관련 내용을 질의한 결과 ‘유관순 열사가 1914년 공주영명여학교에 입학해 수학했다’는 답변을 지난 4월에 받았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독립기념관 학술연구팀은 ‘이화백년사(이화여자고등학교, 1994)’와 ‘영명100년사(공주영명중고등학교, 2007)’ 등 각종 문헌과 자료 등을 종합 분석한 결과 유 열사가 1914년 공주영명여학교에서 2년간 공부한 뒤, 1916년 4월 이화학당에 편입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는 것. 이에 따라 천안시는 유 열사의 학력 연보를 ‘1915년 이화학당 보통과 2학년 편입’에서 ‘1914년 공주영명여학교 2년 수학한 후 1916년 4월 이화학당 편입’으로 수정키로 했다. 공주영명여학교는 현재 공주시 중동에 있는 영명중·고교의 전신이다. 또 국가보훈처와 유관순열사기념사업회도 각종 서적이나 인터넷 사이트, 인명사전 등에 기록된 유 열사의 학력 수정 작업을 벌이기로 했다.

이명화 독립기념관 학술연구팀장은 “각종 자료를 고증한 결과 유 열사의 첫 학교가 이화학당이 아니라 공주 영명여학교인 것이 확인됐다”며 “국가보훈처 등에서 각종 서적이나 인터넷에 기록된 유 열사의 학력 수정 작업을 진행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유 열사 학력 수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박철희 씨는 30여 년간 교직생활을 한 뒤 2006년 대전 문지중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임 한 향토사학자다. 박 씨는 “유관순 열사가 공주에서 공부했다는 사실을 알릴 수 있게 돼 기쁘다”며 “소중한 우리 역사를 다시 쓰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한편 지난 5월 6일 향토사학자 임명순 씨는 “천안시가 타 지역 향토연구가의 주장을 받아들여 유 열사가 이화학당에 들어가기 전, 공주영명여학교를 다닌 것으로 수정했으나 이는 확신할 수 없는 자료에 근거한 것으로 오류”라고 주장해 논란이 일고 있다. 천안시가 문의한 두 기관은 ‘영명백년사(2007년)’ 등을 참조해 답변했는데, 이 책은 미 한인교회단체서 2002년 발간된 잡지의 ‘사부인(사애리시 선교사)이 유관순을 공주로 데리고 가서 영명학교 초등과에 입학시켰다’는 내용에 근거해 집필됐다는 것. 이에 반해 임씨는 “유 열사가 영명학교에 다니지 않았다는 명확한 증언이 있다”고 밝혔다. 유 열사와 같은 해 태어나 1917년 영명학교를 졸업한 유중영 씨는 “관순이는 영명학교를 안 가고 똑똑하고 성격도 좋으니까 사부인이 이화학당에 보내주마 하여 이화학당에 들어갔다”고 1988년 증언했다는 것. 임 씨는 “유관순 집안이 살기 어려운 생활을 해 사부인이 유관순을 공주에 데리고 간 건 사실이나 영명학교에 정식으로 입학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어 논란이 일고 있어 향후 처리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유관순 열사 뺀 교과서로 우리 역사를 가르친다?”

지난 2013년부터 고등학교에서 필수로 배우는 한국사 교과서 8종 가운데 4종이 유관순 열사를 다루지 않고 있어 논란이 일고 있다. 이런 교과서를 채택한 고교가 전체의 60%다. 나머지 4종 중 2종의 교과서도 사진 설명 정도로 유 열사의 애국활동을 다룬다. 학생들은 유관순이란 이름 석 자와 관계없이 3·1 운동과 항일독립운동사를 배우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유관순 열사에 대한 교과서 기술이 빠지게 된 건 우연도, 실수도 아니며, 일부 편향된 시각을 가진 사람들의 의도라고 볼 수 있는 정황이 드러나 충격을 주고 있다. 김정인 춘천교대 사회교육과 교수는 최근 연구 성과를 근거로 “유관순은 친일경력이 있는 박인덕이 해방 후 발굴해 이화 출신의 영웅으로 만든 것”이라고 밝혔기 때문이다. 그가 근거로 한 연구 성과란 정상우 서울대 강사가 지난 2009년 한국역사연구회가 발간한 ‘역사와 현실’이란 학술지에 낸 논문 등을 말한다는 것. 이 논문에서 “이화학당 교사 박인덕과 교장 신봉조가 해방 이후 자신들의 친일이란 과거를 덮고 새로운 도덕적 권위를 부여해 줄 표상으로서 유관순을 발굴했으며, 유관순열사기념사업회엔 미군정 관료를 비롯해 우익계열 인사들이 포진했다고 써 있다. 유관순 열사는 친일과 우익인사들에 의해 재탄생됐다”는 게 논문의 요지다. ‘유관순 만들기’가 소설도 아닌 학술이란 이름으로 다뤄진다는 게 놀라운 일이라는 지적이다.

유관순 열사가 1919년 아우내 장터에서 주도한 만세 시위사건의 기록, 경성재판소의 판결문 기록, 서대문형무소 복역기록과 사진 등은 인터넷에서도 널리 공개돼 있다. 그런데도 일부 학자들이 이를 무시한 채 부풀려진 인물인 양 매도하며 고교 교과서를 집필하고 있다는 사실이 충격적인 일이다. 아이들이 배우는 교과서는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담아야 한다. 편향된 시각을 가진 역사학자의 취사선택에 맡길 일이 아니다. 교육부는 유관순 열사를 다루지 않은 교과서에 대해 개정을 요구해 바로잡아야 한다는 요구에 주목해야 할 일이다. 한편 지난해 일부 고등학교 한국사 국정교과서에서 누락된 데 이어 초등학교 교과과정에서도 홀대를 받아 그 의미가 점차 퇴색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지난 3월 교육부에 따르면 새 교과과정에 따라 지난 2011년부터 5학년 1학기 국어 국정교과서에 등재됐던 유 열사와 관련된 기록이 올해부터 2학기 국어 교과서(5-2-나)로 옮겨졌다.

교육부 관계자는 “유 열사와 관련된 기록은 바뀐 과육과정에 따라 올해부터 2학기 10단원 전기문으로 옮겨져 유 열사의 일대기가 수록될 예정”이라며 “이번 교육과정은 지난 2009년부터 연차적으로 추진한 새 교과과정에 따른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와 관련 천안의 향토사학자인 임명순 씨는 “초등학생들에게 3·1운동의 대표적 독립운동가인 유 열사와 관련된 기록을 3·1절과 광복절을 벗어난 2학기 교육과정에서 가르치는 것은 시기적으로 벗어났다고 생각한다”며 “때 늦은 교육은 독립운동의 의미를 퇴색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유 열사의 기록은 한 때 초등학교 교과서에 이유 없이 사라졌다가 지난 2009년 4학년 1학기에 등재된 후 2011년부터 5학년 1학기에 수록됐다”며 “독립운동가에 대한 교육이 2학기로 미뤄진 것이 타당한지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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