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주(洪州), 태조 왕건과 홍규 결합 거점지역 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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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洪州), 태조 왕건과 홍규 결합 거점지역 부상
  • <특별취재팀>
  • 승인 2015.08.27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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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의 옛 고유지명‘홍주’를 함께 찾아요 ⑨

나말여초 충남지역의 가장 큰 변화 중 하나가 천안과 홍주라는 도시의 새로운 등장이다. 물론 ‘홍주(洪州)’라는 지명의 탄생도 마찬가지다. 천안과 홍주의 등장은 웅주(현 공주) 중심의 지역구도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홍성지역의 옛 지명인 ‘운주(運州)’나 ‘홍주(洪州)’를 논함에 있어서 ‘태조 왕건’과 함께 ‘운주성주(城主) 긍준(兢俊)=홍규(洪規)’를 빼놓고는 역사적으로나 고증학적 측면에서도 쉽게 얘기할 수 없는 대목이다. 결국 신라 말 고려 초에 ‘홍주(洪州)’지역은 ‘태조 왕건’과 함께 ‘운주성주(城主) 긍준=홍규(洪規)’가 장본인이고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허술한 역사적 기록을 논하더라도 실체적 증명이 가능한 시대상황이 이 모든 것들을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이다. ‘운주(運州)’나 ‘홍주(洪州)’는 모두가 신라 말 고려 초에 지역이름으로 등장한다는 점이며, 실제 이러한 가능성의 현상들이 자연스럽게 증명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홍주(洪州)’에 대해서는 ‘운주성주(運州城主) 긍준(兢俊)’의 역사적 의미에 주목해야 하지만, 실제적으로나 기록적인 측면에서는 별로 주목하지 않았던 측면이 많다. 나말여초 홍주와 홍주의 호족세력인 긍준이 가지는 문제는 역사적으로 상당히 중요하고 구체성을 갖는다. 하지만 태조 왕건에게 투항한 세력이란 점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측면도 다분하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들이 최소한 홍주와 관련해서 갖는 역사적 의미나 상징성은 대단하다는 점이 있기 때문이다.

 

고려사 일부, 홍주 관련.

나말여초 충남의 가장 큰 변화 천안과 ‘홍주’의 새로운 등장
왕건, 홍규(洪規)에게 홍씨 하사 ‘홍주홍씨(洪州洪氏)’의 시조
홍주(洪州), 태조 왕건과 운주성주 긍준=홍규(洪規)가 장본인
흥복원부인 홍씨(興福院夫人洪氏) 왕건에게 왕비로 출가시켜

‘운주성주(運州城主) 긍준(兢俊)’은 태조 왕건과의 결합을 통해 ‘홍주(洪州)’가 거점지역으로 등장하고 부상했던 배경이란 점을 들 수 있다. 이들의 결합은 고려 태조의 제12비인 흥복원부인(興福院夫人) 홍씨(洪氏)를 배출한 곳(지역)이라는데 방점이 찍히는 대목이다. 여기서 또 하나 주목해야할 대목이 홍씨(洪氏)다. 홍씨(洪氏)는 태조 왕건이 운주성주(運州城主) 긍준(兢俊)에게 하사한 것으로 추정되는 ‘홍규(洪規)’라는 이름을 하사하면서 ‘홍주홍씨(洪州洪氏)’의 시조가 됐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홍주(洪州)의 개조(開祖)’라고 할 만큼 이 지역에서는 특별한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다. 견훤과 궁예, 견훤과 왕건이 각축하는 시기에 독자세력을 가지고 운신하다가 왕건과의 대결에서 패한 패장(敗將)이면서도 고려의 탄생과정에서 독자적인 홍주의 세력으로서 일정한 지분을 확보하면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태조 왕건이 ‘홍규(洪規)’라는 홍씨(洪氏) 성(性)을 하사하면서 딸을 왕비(興福院夫人)로 왕건에게 준 것은 상당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자신의 딸을 왕건에게 출가시키면서 군사력과 정치적 영향력에 대한 역할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운주’와 ‘홍주’의 이름 탄생까지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이러한 당시의 상황과 기록을 신뢰하는 측면에서 볼 때 ‘운주(運州)’라는 지명은 태조 원년인 918년 이전부터 이미 존재하였을 가능성이 자연스럽게 제기되기 때문이다. 당시는 현재와 같이 기록이 체계적으로 정리되던 시기가 아니기 때문에 특별한 사건 등이 발생하거나 있지 않으면 당시의 상황을 상세히 기록할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았다는 판단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운주(運州)’라는 지명이나 명칭이 나타날 수 있는 여지가 있었느냐의 문제가 핵심이다. ‘운주’라는 지명이나 명칭의 성립 시점을 판단해야 하는데, 주목할 대목은 새로운 ‘주(州)’의 성립과정이나 탄생의 배경을 살펴 볼 필요성이 제기된다.

운주성주 ‘긍준’이 왕건에게 항복을 하고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특히 딸까지 왕건에게 출가시킨 점, 홍씨라는 성을 받을 수 있었고, 왕건의 일등공신으로 오른팔 역할을 하면서 ‘홍주홍씨(洪州洪氏)’의 시조가 됐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따라서 ‘운주(運州)’의 고려 귀속이 태조 17년(934년)의 일이었고, 태조 10년(927년)의 기록에 “왕건이 운주로 쳐들어가 성주 긍준을 성 부근에서 패배시켰다”는 의미에서 볼 때, 태조 왕건이 운주성주 긍준에게 홍씨(洪氏)라는 성을 하사 이름을 ‘홍규(洪規)’로 바꾸었으며, 딸인 흥복원부인 홍씨(興福院夫人洪氏)를 왕건에게 왕비로 준 것 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하지만 2차 운주전투는 긍준과의 전투가 아니라 왕건과 긍준이 결합한 이후 견훤과의 싸움으로 보는 측면에 설득력이 실리고 있다. ‘견훤이 주도한 최후의 전투는 934년 9월 운주(홍주)전투’로 기록되고 있기 때문이다. 왕건이 운주로 진공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견훤은 갑사 5000명으로 운주로 진군하여 왕건에게 화의를 신청하였다. 위세를 보여 백제가 힘을 회복할 시간을 벌고자 하는 계책이었을 것 같다. 그러나 유금필은 “오늘의 정세는 싸우지 않을 수 없으니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염려마시고 저희들이 적을 격파하는 것이나 보십시오!”라며 “아직 대오가 정돈되지 않은 견훤군에게 용맹한 기병 수천으로 돌격, 술사 종훈, 의사 훈겸, 용장 상달과 최필을 사로잡았다. 이 전투의 패배로 전장 부근의 웅진에 속한 30개 성들이 고려에 항복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후 백제의 패권은 옛 백제의 영토였던 웅주 일대에서도 약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태조 10년인 927년에서 태조 17년인 934년 제2차 운주전투가 벌어졌기 때문에 이 기간 동안에 공식적으로 ‘홍주(洪州)’라는 이름을 사용한 것은 아니지만 어디선가에서 사용되고 있었던 ‘홍주(洪州)’라는 이름에서 따온 홍씨(洪氏)를 ‘홍규(洪規)’에게 하사함으로써 ‘홍주홍씨(洪州洪氏)’의 시조가 되었던 점은 분명해 보인다.

 

태조 왕건과 관련한 기록 일부.

태조 왕건(877년 1월 31일~943년 7월 4일)은 전설에 따르면, 왕건은 서해 용왕의 외손자라고 한다. 그래서 고려의 역대 임금들은 용의 피가 흐르고 있는 용의 후예라고 믿어왔다. 그의 출생에 대해선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 송악의 호족 왕륭이 송악의 남쪽에 집을 새로 짓고 있었다. 그때 마침 그곳을 지나던 도선대사란 고승이 문 밖에서 이것을 보고 “북쪽으로 옮겨 지으면 이곳에서 세상을 구할 성인이 태어날 것”이라고 중얼거리며 탄식하였다. 그러면서 왕륭에게 새 집터를 잡아주고 이 일을 비밀로 할 것을 당부한 뒤 길을 떠났다. 그로부터 얼마 후 왕륭의 부인 한 씨에게 태기가 있더니 그 이듬해 1월 14일 아들이 태어났다. 아기가 태어날 때 신비한 광채와 자줏빛 기운이 방 안 가득 빛나고 하루 종일 뜰에 서려 있었다. 왕륭은 도선대사의 예언대로 아들이 태어나자 이름을 건이라 지었다. 이후 918년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박술희 등의 추대를 받아 군사를 이끌고 봉기하여 궁예를 몰아내고 새 임금으로 추대되어, 918년 6월 15일 철원의 포정전에서 즉위하였다. 그는 국호를 고구려의 뒤를 잇는다는 데서 고려, 연호를 천명을 받았다는 뜻으로 천수(天授)라고 하여, 자신의 고향이자 세력 근거지인 송악을 ‘개경’으로 이름을 고쳐 수도를 이전하고 새 왕조를 세웠다. 이로써 자신의 정치적·군사적 기반을 확고히 다질 수 있었다. 왕건은 943년 임종을 눈앞에 두고 고명대신 박술희에게 자신의 사상 배경과 정책의 요체가 집약된 훈요 10조를 내려 자신의 자손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데 원칙으로 삼는 귀감으로 남겼다고 전한다.

가계를 살펴보면 29명의 왕비 중 홍주출신인 흥복원부인 홍씨(興福院夫人洪氏)는 태조 왕건의 제12비이다. △신혜왕후 유씨(神惠王后) △장화왕후 오씨(莊和王后) •혜종 △신명순성왕후 유씨(神明順成王后) •정종 •광종 •문원대왕(文元大王) •증통국사(證通國師) •낙랑공주(樂浪公主) •흥방공주(興芳公主) △신정왕후 황보씨(神正王后) •대종(戴宗) •대목황후(大穆皇后) △신성왕후 김씨(神成王后) •안종(安宗) △정덕왕후 유씨(貞德王后) •왕위군(王位君) •인애군(仁愛君) •원장태자(元莊太子) •문혜왕후(文惠王后) •선의왕후(宣義王后) △현목대부인 평씨(獻穆大夫人) •수명태자(壽命太子) △정목부인 왕씨(貞穆夫人) •순안왕대비(順安王大妃) △동양원부인 유씨(東陽院夫人) •효목태자(孝穆太子) •효은태자(孝隱太子) △숙목부인(肅穆夫人) •원녕태자(元寧太子) △천안부원부인 임씨(天安府院夫人) •효성태자(孝成太子) •효지태자(孝祗太子) ▲흥복원부인 홍씨(興福院夫人) •일후공주(一後公主)를 낳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태조는 중요지점의 지방세력가의 딸을 후비로 맞아들였던 것이다. 흥복원부인 홍씨(興福院夫人洪氏)는 태조와의 사이에 1남 1녀를 두었다. 아들은 태자 직(稷)인데 후손이 없었고, 실명(失名)의 공주는 태조의 제3비 신명왕후(神明王后) 소생 태자 태(泰)에게 출가하여 이복남매 간의 근친혼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 신명왕후의 둘째아들인 정종, 셋째아들인 광종이 차례로 왕위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맏아들로 기록된 태자 태는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으로 보아 아마 일찍 죽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 기사는 지역공동체캠페인사업으로 한국언론진흥재단·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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