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 선사는 불교와 문학, 민족을 위해 한 삶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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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 선사는 불교와 문학, 민족을 위해 한 삶을 살았다
  • 글=한관우/자료·사진=한기원 기자
  • 승인 2015.09.10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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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국항쟁의 진원지를 찾는 역사기행 <9>

충청 독립운동가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 강원도 인제군 백담사의 만해 기념관.

 

 

 

 

 

‘독립선언서’초안 작성, 독립비밀결사조직 ‘만당’ 조직
특유의 비판정신으로 민중의 의식을 깨우치기에 힘써
1905년 백담사에서 가르침을 받고 득도한 한용운은 건봉사와 유점사 등지에서 계속 불경을 공부했다. 속세와의 연을 끊고 공부에 게을리 하지 않았지만 한용운은 인생에 대한 번민과 회의를 계속했고 젊은 혈기의 충동을 느꼈다. 이때 그는 청나라의 서계여가 지은 세계 지리책인 ‘영환지략(瀛環志略)’을 읽고 알게 된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을 품었다. 이에 1905년경 세계여행을 계획해 시베리아 등을 직접 방문했다. 이후 백담사로 돌아온 그는 양계초(梁啓超)의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을 통해 근대 서구의 자유평등사상을 주체적으로 수용했는데, 이는 그의 개혁사상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줬다. 1908년 4월에는 새로운 문화가 융성하던 일본을 돌아보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기도 했다.

만해 선사의 백담사와 오세암 시절과 관련해 백담사 주지 삼도 스님은 “백담사는 만해 스님의 본거지와도 같은 곳이죠. 1915년 백담사가 화제로 불타 거의 사라지고 없을 때 스님이 향한 곳이 오세암 입니다. 스님이 젊은 시절 불교경전을 공부할 때 오르내리던 암자인데, 오세암은 예나 지금이나 눈과 바람이 센 곳인데, 만해 스님은 그곳에서 겨울을 지내면서 철저하게 외부와 단절된 선방에서 좌정하고 수도에 정진한 곳입니다. 오세암은 만해 스님이 ‘님의 침묵’을 집필한 곳인 만큼 스님의 보금자리와 같은 곳”이라며 “1907년 건봉사에서 수거안거를 성취한 이래 10년 만에 마침내 오도(悟道)에 이른 것”이라고 설명했다.

일제강점기 만해 한용운 선사는 ‘독립선언서’초안을 작성하고, 독립비밀결사조직 ‘만당’을 조직했다. 항일운동가들의 은신처였던 경남 사천시 봉명산 기슭에 자리한 다솔사는 1917년 만해 한용운 선사가 ‘독립선언서’ 초안을 작성한 항일운동의 성지라고도 할 수 있다. 만해 선사는 이후 10년 넘게 다솔사를 왕래하며 1930년 당시 만해 한용운 선사의 제자였던 효당 스님과 김법린, 김상호 등과 항일비밀결사 ‘만당’을 조직했다. 다솔사 요사채 ‘안심료’는 당시 만해 선사가 머물던 곳이다. 당시 다솔사 주지였던 효당 스님은 스승이 조직한 ‘만당’을 중심으로 김범부, 법린 스님 등과 다솔사에 불교 강원을 세워 민족주체 교육에 힘썼다고 한다. 현재는 다솔사에서 독립 운동가들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지만, 만해 선사가 머문 안심료 앞에는 선사의 회갑을 맞아 제자인 효당 스님과 김범부 선생이 함께 심은 황금 편백나무 세 그루가 지금도 당시 항일운동의 정신을 이으며 올곧게 서 있다.

만해 한용운 선사의 나이 사십이 되던 1918년 서울 계동에서 불교 잡지 ‘유심’을 발간했으며, 십현담 주해를 완성한다. 또한 1919년은 그의 생에 있어서 또 하나의 굵직한 획을 긋는다. 그의 나이 마흔 하나, 기미년. 일본에 있는 유학생들이 2·8독립선언을 하자 국내에서도 최린, 손병희, 이승훈과 협의하여 독립선언을 준비하고 거사 계획을 세운다. 최린 등과 긴밀히 연락하여 한 개의 종교단체가 아닌 각계 인사를 망라한 거국적인 행사가 돼야 한다고 주장하고, 33인의 민족대표로 독립을 선언하는데 주동적 역할을 한다. 그는 선언서에 공약삼장을 추가하였고, 드디어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은 서울의 태화관에 모여 만해의 연설과 함께 독립선언의 기치를 드높였다.

‘우리의 조선 독립을 세계만방에 엄숙하게 선언하노라. 우리는 기필코 민족의 독립을 쟁취할 것으로 믿습니다. 독립이 선포된 이상 우리는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싸워야 합니다… 우리 다함께 독립만세를 부릅시다.’ 그때가 오후 2시. 명월관 지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그는 군중들의 만세소리가 천지를 진동하고 있음을 느끼면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일본 경찰에 의해 연행되어 재판을 받는 자리에서 만해의 태도는 꼿꼿했다. 다른 사람들이 재판 때 대답을 할 때에 그는 묵묵부답이었다. 대답을 요하는 일경에게 만해는 호통으로 응대하며 덧붙였다. ‘조선 독립의 서’는 독립의 이유를 민족의 자존성과 조국사랑, 자유주의, 대세계의 의무라 갈파한 불후의 명문으로 꼽히고 있다. 만해는 옥중에서도 사식이나 변호인을 거부하고 4년의 형기를 꼬박 마쳤다.

 

 

 

 

 

 

 

 

▲ 독립운동 당시 동지들과 주고받았던 한용운의 친필편지.


벽초, 7000명 승려를 모아도 못 당해 낼 사람 ‘만해’
지조·불굴의 의지 남기고 입적 世壽 66세 法臘 40년


만해는 경험에서 우러나는 정신 철학으로 강연을 하곤 했다. 특유의 비판정신으로 민중의 의식을 올바로 깨우치기에 힘썼는데, 철창철학이나 육파라밀 등의 강연은 청중을 사로잡았다. 마흔일곱 되던 해 설악산에 들어가 우리 시사에 큰 기둥이 된 ‘님의 침묵’이라는 88편으로 된 시집을 탈고하였고, 그 다음해에는 불교전문학교에서 교수직을 교섭 받았으나 거부하고 불교청년회와 불교유신회, 만당 등 지하단체를 조직하고 불교의 유신과 항일투쟁을 하다가 투옥되는 일이 잦았다. ‘개성 송악산에서 흐르는 물이 만월대의 티끌을 씻어가도 선죽교의 대는 못 씻으며 진주 남강 흐르는 물이 촉석루 먼지는 씻어가도 의암에 서려있는 논개의 이름은 씻지 못 합니다’이런 중에도 그는 중편 소설 ‘죽음’을 탈고 했다.

만해는 또 백담사에서 ‘님의 침묵’ 시집을 탈고하면서 ‘독자여, 나는 시인으로 여러분 앞에 보이는 것을 부끄러워 합니다… 새벽종을 기다리면서 붓을 던집니다’고 심경의 올 곧음을 보이기도 했다. 만해의 곧은 절개만큼 일제의 압력은 컸으며 회유와 위협엔 지조로 지켰다. 20만 평의 큰 땅을 준다는 꼬임엔 호통이 답의 전부였고, 조선총독부가 미워 집(심우장)도 반대방향인 북향으로 지었던 우리 민족의 절개요, 지조요, 민족의식의 전부였던 만해. 이 시대 우리들에게 정말 그리운 인물임에 틀림없다.

충절의 고장 충청도를 지켜내는 의식의 뿌리인 만해는 불교와 문학 그리고 민족을 위해 한 삶을 살았다. 쉰다섯 살에 다시 입산했고, 쉰일곱 살에는 보령 출생의 유숙원과 재혼해 이듬 해 딸 영숙을 낳았다. 육십에 장편소설 ‘박명’을 조선일보에 연재했는데, 이해에 유씨 부인이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서울의 망우리 산장에 안장시켰다. 만해는 66세가 되는 1944년 초 겨울눈이 많이 와 눈을 쓸다가 쓰러져 심한 고통을 겪다가 그해 5월 9일 심우장에서 그의 지조와 불굴의 의지를 남기고 입적했는데 세수 66세, 법랍 40년이었다. 홍제동 화장터에서 다비된 유해는 망우리 공동묘지에 쓸쓸히 묻혔다. 벽초의 말대로 7000명 승려를 주워 모아도 못 당해 낼 한 사람이었던 만해. 몇 년 전까지 당시 5원을 주고 깎아 세운 비석과 허술한 묘는 십 수 년이 흐른 지금은 그래도 말끔했다. 다만 ‘한용운지묘’라는 비석이 ‘만해 한용운 선생 묘’로 비석이 바뀌었을 뿐, 고귀한 정신을 남기고간 만해 한용운 선사의 사상과 삶의 철학은 변함없이 우리의 삶 속에 깊이 자리할 것이다.

특히 올해는 광복 70주년을 맞아 민족을 위해 헌신한 만해 선사를 기리는 행사가 탄신일인 지난 8월 29일 전국 각지에서 봉행됐다. 한국불교문인협회(회장 선진규)는 서울 성북구 심우장에서 민족 시인을 기리는 ‘광복 70주년 및 만해 한용운 탄신 136주년 기념 한국문학축전’이 문인 3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이날 참가한 문인들은 헌장에서 “문학은 당대의 세계와 소통하며, 이 소통이 시대와 호응속에 이뤄지고, 그것이 긍정적인 변화로 실현되는 창작활동을 지향하자”고 다짐했다. 한국불교종단협의회장 자승 스님(조계종 총무원장)은 홍파 스님이 대독한 경축법어에서 “만해 스님은 걸출한 문인이자 혁명가요, 수승한 납자로 우리에게 큰 가르침을 남겨주셨다”며 “남과 북의 경계를 넘어 하나됨을 꿈꾸고 대립과 갈등을 넘어 자비와 화쟁으로 나가는 길이야 말로 민족의 통일을 실현하는 방책”이라고 법문했다.

한편 같은 날 만해 선사의 출생지인 홍성에서도 독립정신을 기리는 행사가 다채롭게 열렸다. 만해 선사의 생가지인 만해사당에서 추모다례가 봉행됐는데, 이날 다례에서 만해한용운선사기념사업회 이사장인 옹산 스님(덕숭총림 수덕사 주지)은 “만해선사는 명예나 돈이나 어디에도 집착함이 없이 올곧은 마음가짐이 수행인의 표본”이라며 “민족의 독립과 자존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선사의 독립정신이 통일정신으로 이어지길 바란다”고 설했다.

광복 70년을 맞은 오늘 우리는 만해가 그리운 세상의 언저리에 걸터앉아 있다. 그의 정신이 정말로 소중하게 생각되는 오늘임에랴.


<이 기획기사는 충청남도지역언론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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