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의 남아로서 할 일을 했다”는 25세 청년 윤봉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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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의 남아로서 할 일을 했다”는 25세 청년 윤봉길
  • 글=한관우/자료·사진=한기원 기자
  • 승인 2015.11.26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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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국항쟁의 진원지를 찾는 역사기행 <13>

충청 독립운동가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20세 윤봉길 ‘농민독본’ 스스로 써서 야학 교재로 사용

 

 

 

 

 

▲ 윤봉길 의사가 태어난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의 도중도에 있는 광현당.


윤봉길 의사는 1908년 6월 21일(음 5월 23일) 오후 8시께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의 일명 ‘묵발이’라고 하는 마을 178번지에서 5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윤황(尹璜)은 평범한 농부였고, 어머니 김원상은 친정에서 ‘소학’ 등 한학을 배웠다. 윤 의사의 본관은 파평이며, 고려 예종 때 예진 정벌에 큰 공을 세운 윤관 장군의 27대 손으로, 본명은 ‘우의(禹儀)’였고, ‘희의(熙儀)’라고도 썼으며, 자는 용기(鎔起)였다. 봉길(奉吉)은 별명이었으며, 아호는 ‘매헌(梅軒)’이라 했다. 윤 의사의 고향인 덕산면 시량리는 외지서 오는 부보상들이 집결하는 곳이었으며, 마방과 주막, 투전방들이 늘어서 있어 각 곳의 소식을 쉽게 접할 수 있었다. 가야산(678m)이 멀리 서북쪽으로 솟아있고, 수덕사가 있는 덕숭산이 흘러 내려와 양쪽으로 갈라지며 배형국의 자그마한 섬을 이루다 다시 합쳐져 흐르는데 그 곳이 윤 의사가 태어난 곳이다. 후에 윤 의사는 섬 속의 섬(반도 중에 일본군이 발을 들여놓지 못한 섬)이란 뜻의 ‘도중도’라 명명했다.

윤 의사가 태어나던 시대적 배경은 1908년 3월 23일 장인환, 전명운 등이 의거를 했고, 여름에는 이강년, 허위, 민긍호 등이 일제에 체포돼 순국했다. 12월에 일제는 우리나라의 경제를 독점, 착취하기 위해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설립하기에 이르렀던 것. 또한 1909년 10월 26일에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으며, 1920년 8월 29일 한일합방으로 조선왕조가 27대 519년 만에 멸망하게 된다. 윤 의사는 7세 때 1914년 천자문을 다 외울 만큼 글에 익숙했었고, 이어 ‘동몽선습’도 학습했다. 11세(1918)때 덕산 공립 보통학교에 입학했다가 12세 때 자퇴하고 시량리 솔밭 뒤 최명대 선생의 글방에서 한문을 익혔으며, 14세(1921)때는 서당 오치서숙에서 유학자 매곡 성주록 선생의 문하생으로 한학을 수업했다. 윤 의사는15세(1922년)때 이웃마을의 배용순(당시 16세)과 결혼하고 16세 때 오치서숙의 춘수시회에서 장원을 한다. 19세 때 오치서숙을 떠나게 되는데 매곡 선생이 ‘매헌’이라는 아호를 석별의 정으로 지어준다. 자신의 호 ‘매곡’에서의 ‘매’자와 매죽헌 성삼문(사육신의 한사람으로 덕산에서 가까운 홍성태생)의 정신을 받들라는 뜻으로 그의 호 ‘매죽헌’에서 끝 글자 ‘헌’을 따서 지어준 것이다. 1926년(19세)에는 김흥기, 이규남 등의 권유를 받아 7~8명의 아이들을 가르쳤다. 또 각곡 독서회 회원인 이민덕, 정종갑, 정종호, 황종진, 이태경, 사촌형 윤순의 등과 손을 잡고 농촌계몽운동의 첫 시도로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동네 사람을 설득하여, 그의 사랑방에 마련한 야학당에 아이들이 와서 우리말을 배우도록 했다. 여자들도 여기에 참여했으며, 나이가 든 사람들까지도 야학당에 출입을 했다.

1927년(20세)에는 ‘농민독본’을 스스로 써서 야학 교재로 사용했다. 면사무소에 비치된 등사기로 프린트하여 학생들에게 배부해 주었다. 이 프린트 책자는 모두 3권으로 되어 있었으나 1권은 유실되고 2권과 3권 일부만이 전해진다. 윤 의사는 이 ‘농민독본’을 통하여 농촌의 부흥은 물론 차원 높은 계몽운동과 민족운동을 전개하고자 하였고, ‘자주, 자립, 자활정신’을 강조하였으며 평등한 민주사회 건설을 다짐하였다. 1928년(21세)에는 농촌을 부흥시키기 위하여 ‘부흥원’을 설립한다(2월 5일). 야학당의 참여가 늘어남에 따라 넓은 공간이 필요하게 되어, 마을 유지인 주사 윤주봉 댁 소유의 뒷동산 1정보의 귀퉁이 땅을 희사 받아 주민들과 힘을 합해 부흥원을 세우게 된다.

‘농민독본’ 통해 농촌의 부흥·계몽운동과 민족운동 전개

 

 

 

 

 

 

 

▲ 윤봉길 의사 사당인 충의사.


1930년(23세)에는 가끔 찾아온 시조사 기자 이흑룡의 이야기를 들으며 조국 독립운동의 뜻을 품고 만주로 떠날 결심을 한다. 떠나기 하루전날(3월 5일), 친정(김좌진 장군의 고향인 홍성 갈뫼)에 다니러 가신다고 길을 나선 어머니를 따라 나가 지금도 있는 정자나무 아래의 사촌형 가게에서 (찬바람을 피해 머리에 쓰시도록)수건 한 장과 과자 한 봉지를 사들이고 무언의 작별인사를 한다. 다음날(3월 6일) 아침, 사랑방으로 내려가서 책상을 정리한다. 이미 쓰던 물건이며 노트 등은 정리해 놓은 상태였다. 경찰당국이 보아서 트집을 잡을 만한 글이나 편지 등은 모두 불살라 없애버리고 간직해도 괜찮을 것만 서랍 속에 넣어 두었다. 윤 의사는 다시 서랍 속을 점검해 보고 벼루와 붓을 꺼내 ‘장부출가생불환; 사내 대장부는 집을 나가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이라고 백지 조각에 썼다. 식사를 마치고 늘 입던 한복차림에 모자를 쓰고 방을 나오던 윤 의사는 아랫목에서 재롱을 피우던 아기 종을 덥석 안고 부엌으로 가서 아내에게 물을 한 잔 달라고 해서 마셨다. 윤 의사가 부엌에 들어오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아내는 당황한 눈치였다. 아버지께서는 매부 될 사람 선을 보러 간다는 말을 남긴 후 그 길로 망명길에 오른다(상해에서 보낸 편지 중에서).

삽교역에서 장항선 열차를 타고 서울에 도착하여, 중동중학교 졸업반에 재학 중인 사촌 윤신득을 찾아가 앞으로의 일과 고향의 월진회 일을 의논하려 했지만 만나지 못한다. 곧 신의주 역전에서 만나기로 한 이흑룡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경의선 북행열차를 타고 신의주로 향한다. 신득에게 보내는 편지에 입을 옷가지 등을 부탁한 윤 의사는 선천 정주여관에서 답장을 기다리며 머물던 중, 옆방에 묵으며 독립운동을 하는 김태식, 선우옥을 알게 된다. 윤봉길 의사의 편지를 받은 신득의 연락으로 신의주에서 이흑룡을 만나며 김태식, 이흑룡과 함께 국경을 넘어 만주로 간다. 안뚱, 씬징, 지린, 산시를 거쳐 다시 안동으로 돌아다녔을 것으로 보이며, 이 여정을 통해 독립군의 내부 사정이나 교포들의 생활 실태를 파악하고 앞으로의 목표를 설정하기에 이른다.

일본 천황 생일 천장절 축하행사·전승경축식 폭탄 투척

상해 프랑스 조계 화합방 동포석로 91호에 있는 안중근 의사의 동생 안공근의 집 3층에 숙소를 정한다. 그는 김구를 찾아가 조국의 광복을 위하는 길이라면 목숨을 바쳐서라도 싸울 것을 각오했노라고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였는데 상해사변도 끝나고 아무리 보아도 자기가 죽을 자리를 구하기가 어렵다고 한탄한 뒤에 동경의 이봉창 사건과 같은 계획이 있거든 자기를 꼭 써달라고 간청하였다. 김구는 그의 조국의 독립을 위한 희생적 정신에 감복하여 마침 그대와 같은 인물을 구하던 참이니 안심하라고 말했다. 그는 곧 애국단에 입단 선서를 했다. 그 후 어느 날 그에게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일본신문인 상해일일신문에 뜻하지 않은 희소식이 보도된 것이다. 다가오는 4월 29일 상해사변의 승리로 의기충천한 일본인들이 홍구공원(현 노신공원)에서, 일본 천황의 생일인 천장절 축하기념행사와 더불어 전승경축식을 일본 관민이 합동으로 거행한다고 보도된 것이다.

이 보도를 접하자 김구와 윤봉길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준비에 착수하였다. 이제 일은 결행하는 것뿐이었는데 4월 29일이 박두하자 그는 며칠 동안 계속 채소장수로 가장하고 홍구공원 근처를 배회하면서 며칠 후에 전승 경축식이 열린다는 식장의 거리와 거사할 위치 등을 세밀히 조사하여 만일의 실수가 없도록 세밀히 준비하였다. 4월 27일 오후 1시경 윤 의사는 한창 식전이 꾸며지고 있는 공원을 돌아보았다. 발밑에 밟히는 공원의 잔디가 그대로 일어나지 못하는 것도 있고, 다시 일어나는 것도 있음을 발견하고는 사람 또한 힘이 강한 자에게 짓밟힐 때에는 그 잔디와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에 슬픈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고 한다.

‘백범일지’에는 당시의 정황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윤 군을 여관으로 보내고 나는 폭탄 두 개를 가지고 김해산 군의 집으로 가서 김 군 내외에게 내일(4월 29일) 윤봉길 군이 중대한 임무를 띠고 똥싼성으로 떠나니 고기를 사서 이른 조반을 지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나는 김해산 집에서 윤봉길 군과 최후의 식탁을 같이 하였다. 밥을 먹으며 가만히 윤 군의 기색을 살펴보니 그 태연자약함이 마치 농부가 일터에 나가려고 넉넉히 밥을 먹는 모습과 같았다. 식사도 끝나고 시계가 일곱 점을 친다. 윤 군은 자기의 시계를 꺼내어 내게 주며, 이 시계는 어제 선서식 후에 선생님 말씀대로 6원을 주고 산 시계인데, 선생님 시계는 2원짜리니 제 것하고 바꾸시죠. 제 시계는 앞으로 한 시간밖에는 쓸 데가 없으니까요’하기에 나도 기념으로 윤 군의 시계를 받고 내 시계를 윤 군에게 주었다. 식장을 향하여 떠나는 길에 윤 군은 자동차에 앉아서 그가 가졌던 돈을 꺼내 내게 준다고 할 즈음에 자동차가 움직였다. 나는 목이 메인 소리로 ‘후일 지하에서 만납시다’하였더니 윤 군은 차창으로 고개를 내밀어 나를 향하여 숙였다.” -백범일지(1932년 4월 29일)-


<이 기획기사는 충청남도 지역언론 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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