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운주의 탄생과 ‘홍주’지명사용 이유 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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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운주의 탄생과 ‘홍주’지명사용 이유 있었네
  • <특별취재팀>
  • 승인 2015.06.25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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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의 옛 고유지명‘홍주’를 함께 찾아요 ②

‘태조 왕건(877~943)의 부인인 홍복원부인(興福院夫人) 홍씨(洪氏)가 바로 홍주(洪州)출신이었다’는 점과‘홍주(洪州)사람 삼중대광(三重大匡) 홍규(洪規)의 딸’이라는 점이다. 홍복원부인 홍씨가 태조 왕건과 결혼했다는 점, 그의 아버지를 홍주(洪州)사람으로 기록한 점, 삼중대광 홍규와 딸인 홍복원부인 홍씨의 성(性)이 홍주(洪州)에서 비롯됐다는 기록에 주목해야 한다.

 

고려사.

고려시대 지명의 변화는 정치·사회적 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현재의 홍성지역은 고려시대에는 운주(運州) 또는 홍주(洪州)라 불리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태조실록에는 “1010년 3월에 왕이 운주(運州)에 입성하였다”라고 쓰고 그 주에 “곧 지금의 홍주(洪州)이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근거로는 “공민왕 5년에 왕사(王師) 보우(普愚)의 내향(內鄕)이라는 이유로 목(牧)으로 승격시켰고 17년에 지주사로 낮추었다가 20년에 목으로 복구하였다. 안평(安平) 또는 해풍(海豊) 모두 성종(成宗)이 정한 명칭이다. 또는 해흥(海興)이라고도 부르는바 본 주(州)애 소속된 군이 3개, 현이 11개 있다.”고 ‘고려사 지리지 홍주조’에 기록돼 있다. 이렇듯 ‘고려사’에도 “지방통치제도가 정비되면서 홍성지역에는 성종 14년(995년) 운주에 도단련사를 파견한 이래, 현종 3년(1012년)에는 도단련사를 폐지하고 지주사를 두었으며, 홍주로 개칭한 뒤 양광도에 배속시키면서 3군 11현을 관할하도록 했다”고 기록돼 있어 ‘홍주(洪州)’라는 지명 사용 기록이 ‘홍양사’나 ‘홍성군지’등의 기록과도 일치하고 있다.

앞에서의 기록을 보더라도 홍주는 995년(성종 14년)에 운주라고 불렸다가 1012년(현종 3년) 처음으로 ‘홍주(洪州)’라는 지명을 사용하기 시작해 어느 때에 ‘홍주’로 개명된 것으로 보인다. 1018년(현종 9년)에는 행정체제 개편에 따라 정식으로 문서에 등장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지명의 명칭을 ‘홍주(洪州)’로 사용한 왕은 ‘현종 3년(1012)’으로 명시돼 있으며, “현종 9년(1018) 주지사(州知事) 두고, 고구(高丘, 喬丘)현 여양(驪陽, 黎陽) 흥양(興陽)현 통합 관할함”이라고 기록돼 있다. 현종 3년(1012)부터 정식으로 ‘홍주(洪州)’라는 지명이 사용된 것으로 명시하고 있지만 기록에 의한다면 이보다 앞서 ‘홍주(洪州)’라는 지명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이 가능해 진다.

 

홍주읍지.

학자들의 논거에 의하면 ‘성종 14년에 처음으로 운주라 불리었다는 말은 틀린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성종 14년의 주(州) 단위 행정구역은 대부분 고려 태조 때에도 주(州)였기 때문이다. ‘고려사’의 찬자도 이것이 의심스러운 때문인지 ‘태조실록’에 ‘운주’가 등장하고 있는데 ‘그것이 곧 지금의 홍주(洪州)다’라는 주석이 있음을 적어 놓고 있다. 그럼 과연 ‘태조실록’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고려시대에도 초창기부터 왕이 죽으면 실록을 편찬하는 제도가 있었다. 그러나 현종대에는 거란족의 침입으로 그 이전의 서적이 모두 불타 버렸다고 한다. 이에 조정에서는 현종 이전의 왕들, 즉 태조·혜종·정종·광종·경종·성종·목종의 7대 실록을 다시 편찬했다. 기록에는 7대사적이라 되어 있지만 이는 실록을 말하는 것임에 틀림없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7대 실록의 하나로 편찬된 ‘태조실록’은 덕종 3년에 완성되었기 때문에 그 시기는 이미 홍주로 바뀐 뒤였기 때문에 ‘운주가 지금의 홍주(洪州)다’라는 주석을 달아 놓았던 것이다. 따라서 운주는 성종대에 탄생한 지명이 아니고 태조대에 이미 불리워지고 있었던 지명이라는 것이 옳다는 주장이다. ‘태조 10년 3월 신유(辛酉)에 왕이 운주(運州)에 들어가 성주(城主) 긍준을 성 아래에서 물리쳤다’는 기록으로 보아 태조 10년(927)에 이 지역의 성주였던 긍준이 항복해 온 댓가로 운주가 된 것이 아닐까하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태조 5년(922) 영안현의 성주 원봉(元奉)이 귀순해 오자 다음해에 이 지역을 순주(順州)로 승격한 예가 있기 때문이다. 또 ‘태조 17년 9월 정사(丁巳)에 스스로 군사를 거느리고 운주(運州)를 정벌하여 견훤과 싸워서 그를 크게 패퇴시키니 웅진(熊津) 북쪽의 30여 성이 위풍을 듣고 스스로 항복하였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지금의 공주인 웅진·웅주는 통일신라시대까지 웅주로 불리어지다가 고려 태조 23년(940)에 와서 공주(公州)라는 지명으로 고쳐졌다. 따라서 7대 실록이 편찬될 때의 지명을 소급해서 쓴 것이 아니라, 당대의 지명을 그대로 쓰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기록을 볼 때 운주(運州)는 태조 이전에 이미 쓰여 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미 궁예 통치기에 금산(錦山·城)이 나주(羅州)로 승격한 예를 볼 수 있다. 이후 성종 14년(995)에 운주도단련사를 두었고 현종 3년(1012)에 지주사(知州事)로 두고 홍주(洪州)로 고쳤다. 그렇다면 홍주(洪州)라는 이름으로 바뀐 것은 고려의 건국과 후삼국 통일에 나름대로 기여한 지역이었다는 측면에서 살펴봐야 할 것이다. 즉 ‘태조 왕건의 부인 29명 가운데 한명인 홍복원부인(興福院夫人) 홍씨(洪氏)가 바로 홍주(洪州)출신이었다’는 기록이다. 고려사에 ‘홍복원부인(興福院夫人) 홍씨(洪氏)는 홍주(洪州)사람이니, 삼중대광(三重大匡) 홍규(洪規)의 딸이다. 태자 직(稷)과 공주 일후(一後)를 낳았다’고 기록돼 있다. 여기서 보는 대로 홍주(洪州) 사람이었던 홍규의 딸이 태조의 부인이 되었던 것이다. 흥복원부인 홍씨는 서열 12위로 기록돼 있지만 부인으로서는 6번째 서열이었다고 한다. 문제의 핵심을 풀 수 있는 단서는 여기에 있다.
 

태조 10년(927) 운주(運州)의 성주(城主) 긍준이 항복한 시점 이후, 성종 14년(995)에서 현종 8년(1018) 사이에 이미 홍주(洪州)라는 지명은 이 지역에 존재하며 사용되고 있었다는 추정이다.

‘태조 왕건의 부인인 홍복원부인(興福院夫人) 홍씨(洪氏)가 바로 홍주(洪州)출신이었다’는 점과 ‘홍주(洪州)사람 삼중대광(三重大匡) 홍규(洪規)의 딸’이라는 점이다. 홍복원부인(興福院夫人) 홍씨(洪氏)가 태조 왕건과 결혼했다는 점과 그의 아버지를 홍주(洪州)사람으로 기록한 점, 삼중대광(三重大匡) 홍규(洪規)와 홍복원부인(興福院夫人) 홍씨(洪氏)의 성(性)이 홍주(洪州)에서 비롯됐다는 기록에 주목해야 한다. 속·군현의 정리에 따라 홍주(洪州)로의 개명이 이루어졌다는 주장은 행정명칭으로 정식으로 사용됐다는 근거는 될지 몰라도 홍주(洪州)라는 지명이 처음 나타났거나 사용됐다는 주장과는 거리가 멀다. 왜냐하면 현종 9년(1018)에 속·군현이 정리됐다는 기록은, 이미 삼중대광(三重大匡) 홍규(洪規)와 홍복원부인(興福院夫人) 홍씨(洪氏)가 홍주(洪州)출신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는 이후라는 점이다. 최소한 홍규의 아버지대나 홍복원부인(興福院夫人) 홍씨(洪氏)가 태조 왕건의 부인이 되기 전의 시점에 이 지역에서는 홍주(洪州)라는 지명이 이미 사용되고 있었다는 반증이 가능하다. 어디에선가 운주(運州)라는 지명과 함께 홍주(洪州)라는 지명도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홍주(洪州)사람 홍규(洪規)라는 기록과 홍복원부인(興福院夫人) 홍씨(洪氏)가 홍주(洪州)출신이었다’고 기록한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특히 주목할 점은 태조(太祖, 877년 1월 31일 ~ 943년 7월 4일) 왕건은 후삼국시대 후고구려의 장군이자 고려의 초대 왕으로 재위기간이 918년 7월 25일 ~ 943년 7월 4일이다. 최소한 홍복원부인(興福院夫人) 홍씨(洪氏)는 왕건이 왕이 된 이후 부인이 됐기 때문에 이 근거로 본다면 홍주(洪州)라는 이름은 918~943년 사이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되는 셈이다. 당시는 기록하는 것도, 기록을 보관하는 일도 쉽지 않았던 시절이 아니던가?

 

흥복원부인에 대한 고려사 후비열전 기록.

홍주(洪州)라는 지명이 현종 3년(1012)이든, 현종 8년(1018)이든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진 지명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홍주(洪州) 지명탄생이 현종 3년(1012)이냐, 현종 8년(1018)이냐를 따지거나 규명하는 일은 사실상 무의미하다는 판단이다. 태조 10년(927) 운주(運州)의 성주(城主) 긍준이 항복한 시점 이후, 성종 14년(995)에서 현종 8년(1018) 사이에 이미 홍주(洪州)라는 지명은 이 지역에 존재하며 사용되고 있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는 대목이다.
현종 시에 홍양(洪陽)현을 다시 진(鎭)으로 승격했다. 고종 32년(1895)에는 ‘홍주부(洪州府)’로 충남을 공주부와 홍주부 둘로 나누고, 홍주부 밑에 22개 군이 있었다. 이후 광무 원년(1897)에는 홍주군(郡)으로 이어져 오다가 일제식민통치기인 1914년 총독부령 111호에 의거 홍주군과 결성군이 합쳐지면서 ‘홍성군(洪城郡)’으로 명칭이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우리나라 지명중에서 1000년의 역사를 가진 곳도 드물다. 홍주지명 1000년의 역사적 의미와 상징성이 갖는 가치를 지역주민들과 지역발전을 위한 계기로 삼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기사는 지역공동체캠페인사업으로 한국언론진흥재단·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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