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주(運州)’지명 고려 건국한 918년 기록에 처음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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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주(運州)’지명 고려 건국한 918년 기록에 처음 등장
  • <특별취재팀>
  • 승인 2015.07.09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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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의 옛 고유지명‘홍주’를 함께 찾아요 ③

홍주는 고려 이전의 역사를 잘 알 수 없다는 것이 대체적으로 역사학자들의 견해다. 따라서 ‘고려사’나 ‘동국여지승람’과 같은 지리서에서도 ‘홍주’의 연혁은 고려 초 ‘운주’로부터 시작된다. 홍주지역의 성주(城主)가 ‘긍준(兢俊)’이라는 이름이 나타나면서 ‘운주(運州)’라는 지명이 고려가 건국한 918년의 기록에 처음 등장한다. 태조 원년 ‘고려사’의 기록에 의하면 “웅주, 운주 등 10여 주현이 배반하여 권훤의 후백제에 귀부하였다”는 기록을 보면 ‘운주’라는 지명은 고려 건국 이전부터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대목이다. ‘운주’라는 지명은 ‘웅주’에 대항하거나 겨루는 의미로 지어진 이름으로 추정된다. 웅주(공주)는 백제시대 후광을 배경으로 신라 통일기에 도독관이 중앙에서 파견되는 당시의 행정 및 군사의 거점이었다. 이에 반해 ‘운주’는 신라가 역사에서 퇴장하는 시점에서 새로운 시대를 주도할 신세력의 거점이라는 점에서 웅주에 대한 경쟁의식이 발동하였을 것이라고 보는 측면도 있다. 운주는 웅주와 발음이 비슷하다. 하지만 운주는 새로운 시운의 도래를 선포하는 것이며, 웅주를 대체하는 새로운 세력의 거점으로서의 의미를 강조하는 것이었다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운주’지명은 ‘웅주’에 대항하거나 겨루는 의미로 추정해
‘운주’를 홍주(洪州)로 개칭, 양광도에 배속 3군·11현 관할
 운주성주 긍준 태조 왕건 결합 홍주가 거점도시 등장 배경

고려사 ‘홍주’와 관련된 부분.

 중요한 것은 홍주(운주)는 신라 말 고려 초에 이름이 등장하며, 고려 태조의 제12비인 홍북원부인을 배출한 지역과 연관이 있는 듯하다. 이 같은 ‘홍주’의 등장에는 당시 호족의 등장이 배경이 되고, 이로 인한 지방사회의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 지역으로 꼽히는 사례다. 홍주에 대해서는 운주성주 긍준의 역사적 의미에 주목할 만한 의미를 지닌다. 운주성주 긍준이 태조 왕건과의 결합에 의해 홍주가 거점도시로 등장하는 배경이 된다. 태조 왕건은 정략적인 혼인정책을 통하여 각 지방의 유력한 호족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면서 그들의 지지를 얻고자 하였는데, 이때 태조의 12번째 후비(后妃)가 된 흥복원부인(興福院夫人) 홍씨(洪氏)도 마찬가지다. 운주를 장악하면서 운주성주 긍준이 자신의 딸을 태조 왕건에게 왕비로 바친 점에서 이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왕건은 아들 25명, 딸 9명을 합해 34명의 자녀를 두었다. 이들은 근세조선의 경우와는 달리 똑같은 대우를 받았던 것을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곧 처첩이나 적서의 차별을 두지 않았다는 점이다. 25명의 아들 중 왕이 되었거나 승려가 된 자를 제외하고 11명은 태자로 불리었으며, 나머지 7명은 군(君)으로 불렸다. 태자는 왕위 계승자를 의미하므로 11명 모두 왕위 계승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호족의 외손들이 왕위 계승자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은 정략적인 성공을 뜻한다. 일반 왕자들에게 붙여졌던 태자라는 호칭은 965년 왕건의 손자인 주가 광종의 유일한 태자로 책봉된 뒤 사라지고, 그 뒤부터는 왕위 계승권자 한 명에게만 적용되었다. 왕건의 혼인 정략은 뒤의 왕들에게도 이어져 2대 혜종은 4명, 정종은 3명, 현종은 13명, 11대 문종은 5명의 부인을 두어 호족들과 이리저리 연관을 맺었다. 이러한 왕실의 혼인 정략은 처음의 의도와는 달리 외척들의 치열한 왕위 쟁탈전을 불러와 분열의 꼬투리가 되었으며, 왕실과 호족끼리 혼인을 맺는 폐쇄적인 근친혼 풍습을 낳았다.

홍주읍 홍주성지도.

운주성주 긍준과 태조의 제12비인 흥복원부인의 아버지인 홍규(洪規)는 동일인물로 홍주의 유력한 호족세력이었다는 추정이 유력하다. 홍규의 활약상을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홍주지방은 934년(태조 17) 후백제 견훤(甄萱)과의 싸움에서 전취한 지점이다. 이로 인하여 공주 이북의 30여 성이 고려의 입장에서는 후백제와의 싸움에서 전세를 역전시키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이곳은 또한 충청도에서 서해로 나가는 출구로서 중국 사신의 접대와 영송(迎送)이 이루어지는 곳이기도 하였다. 이처럼 태조는 주요 지점의 지방세력가의 딸을 후비로 맞아들였던 것이다. 홍규(洪規)의 본관은 홍주(洪州)다. 충청도 홍주(洪州, 또는 운주, 지금의 충청남도 홍성군) 출신으로, 삼중대광(三重大匡)을 지내고 홍주 홍씨의 시조이다. 홍규의 원래 이름은 긍준(兢俊)으로, 운주성주(運州城主)를 지냈던 인물이다. 운주는 ‘홍주’의 옛 이름이며, 현재의 충청남도 홍성군이다. 927년(태조 10년) 음력 3월 태조 왕건은 운주성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이때 운주성주였던 긍준은 자신의 딸을 바쳤으니, 그녀가 곧 흥복원부인(興福院夫人) 홍씨다. 그밖에도 당시 운주(홍주)는 중국 사신들이 입출항이 이루어지던 중요한 곳이기도 하였다. ‘고려사’ 등에는 출신과 소생 말고는 자세한 생애에 대한 기록이 전하지 않으며, 호는 흥복원부인(興福院夫人)이다. 남편 태조와의 사이에서 1남 1녀를 낳았다. 아들은 태자 직(太子 稷)이며, 후손은 없었다. 딸의 이름이나 호는 전하지 않으며, 단지 태조의 제3비인 신명순성왕후(神明順成王后) 소생의 장남 태자 태(太子 泰)에게 시집을 갔다는 기록만 있다. 훗날 왕위를 신명순성왕후의 차남(정종)과 3남(광종)이 각각 이은 것으로 볼 때, 태자 태는 요절한 듯하다. 가족 관계를 보면, 흥복원부인(興福院夫人)의 아버지는 홍규(洪規, 또는 긍준, 생몰년 미상), 남편은 제1대 태조 신성대왕(太祖 神聖大王, 877~943 재위: 918~943)이며, 아들 태자 직(太子 稷, 생몰년 미상)과 딸 공주(公主, 이름 미상, 생몰년 미상), 태조와 신명순성왕후의 장남 태자 태와 혼인하였다. 따라서 ‘홍주(洪州)’라는 지명은 흥복원부인(興福院夫人)의 아버지인 홍규(洪規)의 성(性)인 홍((洪)자와 본관이 홍주(洪州) 등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1872년 홍주남산 일대.

‘홍주’는 성종(成宗) 14년(995년)에 운주도단련사(運州都團練使)를 두었다가 현종(顯宗) 3년(1012년)에 지주사(知州事)로 고쳤으며 뒤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태조실록(太祖實錄)》 10년 3월에 「왕이 운주(運州)에 들어가다」 의 주(註)에 말하기를 「곧 지금의 홍주(洪州)이다」라고 하였다.】 공민왕(恭愍王) 5년에 왕사(王師) 보우(普愚)의 내향(內鄕)이므로 올려 목(牧)으로 삼았고 17년에 지주사(知州事)로 내렸으며 20년에 다시 목(牧)으로 삼았다. 별호(別號)를 안평(安平)이라 하고 또 해풍(海豊)【모두 성종(成宗) 때에 지정한 것이다.】 이라 하였으며 또 호(號)를 해흥(海興)이라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결국 ‘고려사 지리지’의 내용을 정리하면, 성종 14년(995년) 운주(運州)에 도단련사(都團練使)를 파견한 이래 현종 3년(1012년)에는 도단련사를 폐지하고 지주사(知州事)를 두었으며, 그 뒤 운주(運州)를 홍주(洪州)로 개칭한 뒤 양광도에 배속시키면서 3군(郡)과 11현(縣)을 관할하도록 하였다. 3군(郡)은 혜성군(지금의 당진 면천면), 대흥군(지금의 예산 대흥면), 결성군(지금의 홍성 결성면)이며, 11현(縣)은 고구현(高丘縣, 지금의 홍성 갈산·서산 고북면 일대, 고려 초에 지금의 명칭으로 개칭), 보령현(保寧縣, 지금의 보령 주산면), 흥양현(興陽縣, 지금의 보령 천북면), 청양현(靑陽縣, 지금의 청양읍), 신평현(新平縣, 지금의 당진 신평면), 덕풍현(德豊縣, 지금의 당진 고덕면), 이산현(伊山縣, 지금의 예산 덕산면), 당진현(唐津縣, 지금의 당진읍), 여미현(餘美縣, 지금의 서산 해미면), 여양현(驪陽縣, 지금의 홍성 장곡면, 고려 초에 지금의 명칭으로 고치고 감무 설치), 정해현(貞海縣, 지금의 서산 고북면∼해미면 일대) 등이다.

<이 기사는 지역공동체캠페인사업으로 한국언론진흥재단·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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