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 도단련사, 현종 지주사 이후 ‘홍주(洪州)’로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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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 도단련사, 현종 지주사 이후 ‘홍주(洪州)’로 고쳤다
  • <특별취재팀>
  • 승인 2015.08.20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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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의 옛 고유지명‘홍주’를 함께 찾아요 ⑧

홍주(洪州)의 연혁을 보면 ‘<고려태조실록(高麗太祖實錄)> 10년(927년) 정해 3월에 왕이 운주(運州)에 들어갔다고 하였다. “지금의 홍주(洪州)이다.”라고 하였다. 성종(成宗) 을미(성종14년, 995년) 에 운주 도단련사(運州都團練使)를 두었고, 현종(顯宗) 임자(현종3년, 1012년) 에 단련사를 폐하고 지운주사(知運州事)로 고쳤다가, 뒤에 홍주로 고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서도단련사(都團練使)란 고려 초기에 설치되었던 지방관 중 하나다. 성종 14년(995) 지방제도를 재정비하기 위해 전국을 10도(道)로 나누고, 그 관할에 있는 여러 주(州)들에 대해서 등급에 따라 각기 도호부사(都護府使)·절도사(節度使)·도단련사·단련사·자사(刺使)·방어사(防禦使) 등을 파견했다. 도단련사가 파견된 지역은 관내도(關內道)의 수주(水州:지금의 수원), 하남도(河南道)의 운주(運州, 洪州:지금의 홍성)와 환주(懽州:지금의 천안), 영남도(嶺南道)의 대주(岱州:지금의 성주)와 강주(剛州:지금의 영주), 산남도(山南道)의 허주(許州:지금의 함양), 해양도(海陽道)의 담주(潭州:지금의 담양)이다. 이 가운데 운주와 환주는 태조 때 중앙군이 배치되었던 군사적 요지였던 것으로 보아 도단련사도 군사적 성격이 강했음을 알 수 있다. 설치된 지 10년 만인 1105년(목종 8)에 단련사·자사·관찰사와 함께 폐지되었다.

 

고려성종14년 관련 기록 일부.

성종2년 983년 지방제도 정비 전국 12목(牧) 설치 ‘홍주’ 빠져
성종14년 995년 전국 10도(道)로 나눠 ‘운주’에 도단련사 파견
995년 지방제도 10도제(道制)실시 절도사체제(節度使體制)개편
10도제 실시는 우리나라 지방제도상 도제를 수용하는 선구 돼

 

고려시대 군읍도(19세기).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9권 홍주목(洪州牧) 조에 “동쪽으로는 대흥현(大興縣) 경계까지 25리이고, 남쪽으로는 보령현(保寧縣) 경계까지 29리이고, 서쪽으로는 결성현(結城縣) 경계까지 9리이고, 북쪽으로는 덕산현(德山縣) 경계까지 16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3백 45리이다”라고 기록돼 있다. 홍주(洪州)는 본래 고려의 운주(運州)로 성종(成宗) 14년에 도단련사(都團練使)를 두었고, 현종(顯宗) 3년에 지주사(知州事)로 고쳤다가 뒤에 다시 지금의 이름 ‘홍주(洪州)’로 고쳤다. 공민왕(恭愍王) 7년에 왕사(王師) 보우(普愚)의 고향이라 하여 목(牧)으로 승격시켰다가 17년에 지주사로 강등되고, 20년에 다시 목으로 복귀하였는데, 본조에서도 그대로 인습하였고, 세조(世祖) 때에 진(鎭)을 두었다.

운주성주(運州城主)였던 고려의 홍규(洪規)는 태조(太祖) 왕건을 섬겨 벼슬이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이르렀다. 진준(陳俊) 여양(驪陽) 사람으로 용력이 있어 군졸의 대열에서 발탁되어 공로를 쌓아서 위장군(衛將軍)이 되었다. 명종(明宗) 때에 여러 번 벼슬을 전전하여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에 이르고,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승진되었다. 경계(庚癸)의 화란 때에 문신(文臣)들의 집이 진준에게 힘입어 온전히 살아난 자가 많아서 당시 사람들이 말하기를 “음덕이 있어 그 뒤가 반드시 창성할 것이다”라 하였다. 진식(陳湜) 진준(陳俊)의 손자로 과거에 올라 문명(文名)이 있었으며, 벼슬이 어사대부(御史大夫)에 이르렀다. 진화, 진식의 아우로, 신종(神宗) 때에 과거에 올라 한림원(翰林院)에 뽑혀 들어갔고, 우사간(右司諫) 지제고(知制誥)로 지공주사(知公州事)로 나왔다가 죽었다. 시사(詩詞)를 잘하여 그 말이 맑고 미려하였으며, 젊어서는 이규보(李奎報)와 같이 이름을 떨쳤다. 본조 이첨(李詹)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에 장원으로 과거에 뽑혀 세 번 전전하여 정언(正言)이 되었다. 일찍이 아홉 가지 규간(規諫)의 말을 올리기를 “첫째 덕을 길러야 하며, 둘째 일을 멀리 생각하여야 하며, 셋째 허물을 고쳐야 하며, 넷째 근본에 힘써야 하며, 다섯째 자기 몸을 겸허(謙虛)하게 가져야 하며, 여섯째 은혜를 베풀어야 하며, 일곱째 같은 유(類)는 유대로 나란히 포열(布列)하여야 하며, 여덟째 정사를 밝게 하여야 하며, 아홉째 백성의 업(業)을 보호 육성하여야 한다.” 하였다. 누차 승진하여 지신사(知申事)가 되었는데, 어떤 일로 말미암아 영산(靈山)의 계성(桂城)으로 귀양갔다가 얼마 안 되어 석방되었다. 본조에 들어와서 전서(典書), 집현전 직학사(集賢殿直學士), 예문관 학사(藝文館學士),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 등을 역임하고 죽었다. 시호는 문안(文安)이며 그의 저술인 <쌍매당집(雙梅堂集)>이 세상에 간포(刊布)되어 있다. 이서(李舒) 개국공신(開國功臣)으로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효행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규장각 소장 호서읍지에 수록돼 있는 공주목과 결성현의 모습. 당시 공주목과 홍주목의 결성현은 충남에서 가장 큰 지역으로 꼽히던 곳이다.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성종대 지방제도의 정비에 처음으로 착수한 것은 983년(성종 2) 2월이었다. 이때 처음으로 전국에 12목(牧)을 설치하고, 금유·조장을 혁파하였다. 12목이 설치된 곳은 양주·광주·충주·청주·공주·진주·상주·전주·나주·승주·해주·황주였다. 12목의 설치를 계기로 고려의 지방제도가 본궤도에 오르게 되었다는 점에서 설치의의는 매우 크다. 12목 설치 당시에는 지방관만이 임지에 부임하고 가족의 동반은 허용되지 않았으나, 986년 8월에 12목에 대해 가족과 함께 부임하는 제도적 조처가 이루어졌다. 그 뒤 987년 8월에는 12목마다 경학박사(經學博士)·의학박사(醫學博士) 각 1인씩을 보내어 지방교육을 맡게 하는 한편, 유교적 교양이나 의술이 있는 인재를 중앙에 천거하도록 하였다. 993년에는 양경(兩京)과 함께 12목에 상평창(常平倉)을 두어 물가조절의 기능을 맡아보게 하였다. 또한, 이 해 8월 주·부·군·현과 역로(驛路)에 공수시지(公須柴地)를 지급했는데, 이미 983년 6월에 주·부·군·현과 관(館)·역(驛)에 전지(田地)를 지급한 사실을 감안하면, 993년에는 지방 각 관아의 경비지출을 위한 공해전시(公廨田柴)의 법이 정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례를 통해 성종대에 지방제도의 정비작업이 꾸준히 진행되어, 지방행정의 기능이 크게 강화되었음을 볼 수 있다.

한편, 지방제도의 정비와 함께 중앙행정력이 각 지방에 직접 침투하게 되면서 각 지방의 호칭에 대한 개정작업이 이루어졌다. 즉, 992년 11월에는 주·부·군·현 및 관(關)·역·강(江)·포(浦)의 호칭을 고쳤다. 995년에는 지방제도에 관한 중요한 조처가 취해졌다. 10도제(道制)의 실시와 절도사체제(節度使體制)로의 개편이 그것이다. 먼저 10도제는 당나라의 10도제를 본받아 제정했던 것으로 추정한다. 당나라의 10도제는 당나라 태종(太宗)이 원년에 산천의 형편에 따라 천하를 10도로 나누었다고 한다. 고려의 10도도 그 도명으로 보아, 지리적인 조건을 고려해 제정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10도의 명칭은 관내(關內)·중원(中原)·하남(河南)·강남(江南)·영남(嶺南)·영동(嶺東)·산남(山南)·해양(海陽)·삭방(朔方)·패서(浿西)였다. 10도제는 실시 이후 지속적으로, 그리고 효율적으로 운용된 것 같지는 않다는 것이 학계의 주장이다. 그러나 10도제는 우리나라 지방제도상 도제를 수용하는 선구가 되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다음으로 절도사체제로의 개편은 995년에 이미 앞서 983년에 설치했던 12목에 절도사를 두게 되었음을 말한다. 983년 이래 지방행정의 근간이 되어오던 12목을 12절도사로 개편한 것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지방행정에 있어 군사적인 면이 크게 강조되었다. 목을 파하고 군(軍)을 두고 있는 데에서 그 사실을 엿볼 수 있다. 12절도사와 아울러 7도단련사(都團練使)·11단련사·21방어사(防禦使)·15자사(刺使) 등의 지방관제가 새로 설치되었다. 따라서 995년의 지방관제개편의 근본목표가 당나라에서 안사(安史)의 난 이후에 편성한 것과 동일한 군사적인 절도사체제로의 지방관제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체제개편은 군정적인 지방행정을 통해 지방의 호족세력을 통제함으로써 중앙집권을 이룩하고자 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그러나 10년 뒤인 1005년(목종 8)의 지방관제 재정비과정에서 12절도사·4도호부와 동서북계방어진사(東西北界防禦鎭使)·현령·진장(鎭將)만을 두고, 그 나머지 관찰사·도단련사·단련사·자사는 모두 혁파된 사실이 주목된다. 이것은 당시 그러한 외관이 설치된 지방행정단위까지 장악할 수 없었던 중앙행정력의 한계성을 나타내주는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운주성주(運州城主)였던 홍주홍씨의 시조인 홍규(洪規)는 왕건이 견훤을 칠 때 공을 세워 ‘삼한상중대광 벽상익찬공신’(三韓三中大匡 壁上翊贊功臣)으로서 해풍부원군(海豊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해풍(海豊·홍주의 옛 지명)을 본관으로 삼아 지금까지 홍주(洪州)에서 세계를 이어오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기사는 지역공동체캠페인사업으로 한국언론진흥재단·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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