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리대첩, 망국 10년 원한 마음껏 푼 기적의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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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대첩, 망국 10년 원한 마음껏 푼 기적의 승리
  • 글=한관우/지료·사진=한기원 기자
  • 승인 2015.10.02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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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국항쟁의 진원지를 찾는 역사기행 <11>

충청 독립운동가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 중국 해림시 산시진의 백야 김좌진 장군 구거, 순국지 전경.

함경북도 나남으로부터 제21사단이 북상하는 한편 시베리아 출동했던 제 19사단이 이미 장고봉을 넘어 남하하고 있었다. 10월 16일 독립군이 길림성 화룡현 삼도구 청산리에 도착했을 때이다. 일본 21, 19사단은 물론 만철수비대까지 서진하고 있었고, 이미 3개 전위대대가 공격해 오고 있다는 정보가 다시 입수되었다. 임시로 마련된 작전 회의실에서 참모들이 마주앉아 있을 때 김좌진은 결심한 듯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할 수 없습니다. 이동계획을 포기하고 전투단으로 개편합시다. 적군은 3개 사단의 병력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3분의 1도 안 됩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야 합니다. 그럼 지휘관을 지명합니다. 총사령관은 내가 맡고 참모장에 나중소 동지, 부관에 박두희 동지, 연성대장에 이범석 동지를 명하오. 제1대는 내가 지휘하고 제2대는 이범석 동지가 맡으시오. 전투대형은 제대, 우리는 지리적 이점을 얻어 매복작전으로 기습하는 겁니다. 그리고 이범석 대장은 지금 즉시 편의대를 조직하여 적의 이동상황과 병력을 정찰해 주시오. 그리고 정찰을 나가 청산리 일대의 우리 동포들과 중국인들에게 우리 병력은 형편없이 미미한 규모라고 선전해 주도록 하시오. 심리전이오. 그래서 놈들이 우리를 가볍게 여겨 방심해 있는 틈을 타서 단번에 요절을 내버리는 거요.”

 

 

▲ 청산리 독립군 항전지도.

 

 

 

 

 

 

 

 

 

 

 

 

 

 

 

 

 

 

 

 

 

 

 

 

 

 

 

 

 

 

 

 

 

 

 

 

 

 

 

 

 

 


이때 편의대로부터 정보가 들어왔다. 보고에 의하면 15일 현재 청산리 일대를 일본군이 포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또한 적의 전위부대인 기병대 1개 부대가 이미 백운평 삼림일대로 접근해 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내일 오전쯤 전위대가 독립군이 매복해 있는 백운평 골짜기에 도착하리라는 것이었다. 김좌진과 이범석의 충혈 된 눈에는 눈물이 번지고 있었다. 다른 지휘관들도 마찬가지였다. 풍찬노숙하며 이를 갈며 연마해 왔던 와신상담의 기회다. 장백산의 산기슭 백운평 일대에 10월의 밤은 그렇게 깊어가고 있었다. 찬바람이 불어오는 초겨울의 만주 땅. 망국의 설움을 가슴에 안은 독립군은 방아쇠에 손을 얹은 채 적막한 밤을 지키고 있었다. 열화 같이 뜨거운 조국을 향한 사랑으로 그들은 이미 추위를 잊은 지 오래다. 그러나 낙엽 속에 파묻힌 그들의 숨결조차도 크지 않았고 침묵만이 주변의 긴장감을 감싸고 있을 뿐이었다. 어느덧 나뭇가지 사이로 햇살이 뻗어 내려오는 아침, 드디어 적군이 보이기 시작했다. 군마를 탄 놈들은 멀리 보기에도 태연스럽게 느릿느릿하게 골짜기를 향하고 있었다.

안화춘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이곳에 독립군들이 매복해 있으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 잡담을 지껄이며 태연함 속에 간혹 말들의 울음소리가 독립군들의 귓전을 또렷이 울렸다. 드디어 적군의 후위가 골짜기에 들어왔다. 완전히 독안에 들어온 쥐였다. 전위의 지휘관인 듯한 놈이 말에서 내려 땅에 엎드렸다. 말똥을 집어 들고 코에 대보기도 하고. 그렇게 한동안 적의 동태를 살피고 있던 중 탕! 드르륵… 탕! 하는 신호소리가 조용한 골짜기를 울렸다. 제2대의 이범석 장군이 쏜 권총소리였다. 그리고 길지 않은 시간 전위부대를 전원 섬멸해 버린 것이다. 그러나 승리에 취해 있을 시간이 없었다. 포위망을 돌파해야 했다. 독립군은 삼도구 방면으로 밤을 지새워 100여리를 강행군해 갑산촌에 이르러서 적의 포위망 돌파에 성공했다. 천수평에 적 기병대 120여명이 주둔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독립군은 다시 편대를 조직하여 공격으로 돌입했다. 10월 21일 새벽 5시부터 개시한 공격에서 당황한 적의 중대장의 몸에서 적군연대장 가노오에게 보내는 전략보고서를 입수할 수 있었다. 19사단 사령부가 어랑촌에 주둔하고 있음도 알아냈다. 사기가 충천한 독립군은 사단본부의 군을 역습하기로 작전을 세웠다. 청산리 전투 후 이틀 낮, 이틀 밤을 계속한 전투에서 독립군은 100여명이 전사했고, 일본군은 3300여명이 전사했다. 일사불란한 지휘계통과 억센 투지력, 타오르는 우국애의 활화산 바로 그것이었다. 22일에는 어랑촌 마록구 고지를 손쉽게 점령했다. 적군 1개 사단의 전 병력이 고지를 향해 진격해 왔다. 적 1개 사단 1만 명, 독립군 2개 연대 1000여명. 전투는 처절한 혈투였다. 포탄이 터져 김좌진의 철모가 날아갔고 이범석의 군도가 두 동강이 나며 기관총 대장 최인걸은 뜨거운 총열에 몸을 묶어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후위에 있던 독립군 예비소대 1개 소대가 전방방어로 나섰다가 전원이 순국했다. 김좌진과 이범석은 부하들을 독려하여 독립군의 승리를 이끌었다. 1000여명의 사상자를 낸 적군은 마침내 철수했고 독립군은 망국 10년만의 원한을 마음껏 푼 기적의 승리였다.”는 설명이다.

 

 

 

 

 

 

 

 

 

 

 

 

 

 

 

 

 

 

 

 

 

 

 

 

▲ 순국지를 관리하고 있는 조선족 부부.


솟구치는 눈물을 억제할 수 없었다. 눈물을 잊고 살아온 거친 사나이의 반생이었기에 감격은 절정에 이르게 된 것이다. 보급도 여의치 않았고 증원군도 없었던 독립군은 흑룡강변 밀산 지방으로 이동했다. 또한 청산리 작전의 설욕을 꾀한 일본군의 만주 전역에 걸쳐 보복섬멸작전을 개시했으므로 다른 독립군들도 소만국경지대로 집결했던 것이다.

안 교수는 “1920년 12월 김좌진의 북로군정서도 합류하여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하였는데 합류된 9개 독립군의 부대는 대한독립단, 간도국민회, 대한신민회, 의군부, 혈성단, 광복단, 도독부, 야단, 대한정의군정사 등 이었다. 김좌진은 대한독립군단의 부총재에 파선되었다. 병력은 약 3500여명. 3개 대대로 27개 소대로 편성한 대부대였다. 1921년 1월 흑룡강 너머 노령 자유시 이만지방에 주둔하고 레닌정권의 치따지방 정부와 협정을 맺어 실력양성을 위해 전력을 다했다. 백계노군을 토벌하여 대가로 그들의 무기와 원조를 얻고 상해 임시정부로부터도 원조를 받아 사관학교를 설립했다. 이해 연말에 캄챠카반도 연안의 어업전에 관한 협정이 일본과 소련 사이에 체결되었는데, 일본 측은 소련영토 내에서 한국독립군을 양성하면 양국의 우호관계에 큰 지장을 초래할 것이라고 소련대표 카라한에게 협박했다. 혁명으로 국력이 쇠약했던 소련은 일본에게 독립군의 무장해제를 약속하고 만다. 이리하여 독립군의 비극적인 흑하사변이 터지게 되었던 것이다. 1922년 6월 소련군은 독립군의 무조건 무장해제를 명령한다. 피압박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투쟁한다는 소련정부의 혁명구호를 내세우며 항의했으나 마침내 소련군은 독립군의 토벌작전에 나서게 되어 피아간에 일대격전이 벌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 전쟁으로 인해 전사 272명, 포로 417명, 행방불명 272명, 익사 31명이라는 막대한 손실을 보고 독립군은 비분의 눈물을 삼키며 다시 만주로 돌아오게 된다. 1925년 10월, 그는 다시 북만의 영안으로 돌아왔다(일설에는 흑하사변 이전에 돌아왔다고도 함) 흩어진 동지들을 규합하여 북로조정서 정신에 입각한 신민부를 조직했다. 원로들은 중앙위원회에 앉히고 김좌진은 군사집행위원장이 된다. 이때 신민회 병력은 500여명에 불과했으므로 김좌진은 목릉현과 소추풍에 성동사관학교를 설치하여 청년사관 양성에 힘써 정예군 500여명과 신민부 지휘하의 한교들 자세 가운데 17세 이상 40세까지의 동원령을 내려 군적에 편입시켰다. 또 한편으로는 게릴라작전을 실시하여 민족반역자를 응징하고 일본 등 각 기관을 기습하여 파괴하는 신경전을 벌였다.”는 설명이다.

 

 

 

▲ 중국 해림시 산시진의 백야 김좌진 장군이 운영하던 금성정비소. 이곳에서 배신자 박상실의 흉탄에 순국했다.


한편 상해 임시 의정원에서는 1925년 10월 10일 김좌진을 국무원으로 임명했으나 취임을 거부하여 이듬해 2월 18일 해직되었다. 다시 그해 10월 10일에는 국무원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취임을 거부하여 명리를 초월한 그의 순수한 애국심을 엿볼 수 있다 하겠다. 1937년에는 신민부를 대표하여 민족유일당 조직에 손을 대어 남만주의 정의부와 참의부 등을 합하여 통합체를 만들고자 시도했었다. 그런데 신민부 안의 무인파와, 문인파, 정의부의 촉성회파가 갈려 있었고, 참의부에서도 촉성회를 지지하는 심용준파로 분열되어 있었다. 신민부의 무인파와 정의부 및 참의부의 협의회파가 통합하여 국민부를 결성하고 김좌진이 이끄는 무인파와 정의부, 참의부의 촉성회파가 단합하여 재만유일당책진회를 조직하였다.

이 책진회에서는 독립운동기구의 통합을 내세워 일을 추진하고 각계인사를 포섭하였다. 그렇듯 소만국경과 남북만주를 한방처럼 드나들며 온갖 전설과 신화를 남겼던 민족의 영원한 벗 김좌진 장군은 1930년 1월 24일 오후 2시경 자신이 운영하던 정미소에서 자신을 배반한 옛 부하 박상실의 흉탄에 맞아 숨을 거두게 된다. 이국땅에서 오직 ‘조국의 독립’만을 위해 바친 그의 시신은 그곳에 묻혔다가 후에 부인이 손수 충남 서부에 옮겨 묻었다가 다시 충남 보령의 청소 땅에 묻혀 오늘도 말이 없다. 그렇게도 그리던 조국광복을 보지 못하고 불운에 숨진 김좌진 장군에게 정부는 1962년 3월 1일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여 그의 업적을 빛냈다. 청산리지역에서의 백야 김좌진 장군의 숨결의 흔적은 그래서 더욱 빛나는 애국투혼이며, 오늘날 우리의 가슴 속 깊이에 다가오고 있다.

자문=안화춘 연변역사연구원 교수

<이 기획기사는 충청남도지역언론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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