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의 참 뜻 품은 정신사의 참 스승 만해 한용운 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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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참 뜻 품은 정신사의 참 스승 만해 한용운 선사
  • 글=한관우/사진·자료=한기원 기자
  • 승인 2015.09.03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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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국항쟁의 진원지를 찾는 역사기행 <8>

충청 독립운동가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 결성면 성곡리 박철마을의 만해 한용운 선사 생가 모습

만해는 빈곤한 우리의 정신사와 역사에 있어서 분명한 주역
지조를 생명처럼 지키며 사리사욕 보다 민족의 장래 아파해


광복 70년, 충청도 홍주를 충절의 고장이라 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홍주(홍성) 땅 곳곳엔 선열들의 구국정신의 넋이 그대로 배인 땅, 모든 곳이 역사의 현장이고 정신이다. 특히 우리민족의 역사와 정신의 주역으로 지금까지도 충청인의 가슴엔 물론 우리 민족의 가슴 깊이에 살아있는 시인이며 승려, 독립운동가로 우리의 뇌리에서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만해 한용운은 1879년(고종 16년, 기묘) 음력 7월 12일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박철동에서 이양공 한명진의 19세 손인 추훈부도사 응준과 온양 방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호적에 기록된 이름은 정옥이며, 불문에 들어가기 이전에는 유천이라고 했다. 그가 부친을 따라 홍성읍 남문동으로 이사한 것은 7세 때의 일인데 어려서부터 천재니, 천동이니 하는 말을 많이 들었다고 전해진다.

만해가 그리워지는 건 그가 지조를 생명처럼 지키며 자기의 사리사욕 보다는 민족의 장래를 가슴으로 아파하며 실천한 한국 근대사의 한 거목이란 점이다. 한마디로 민족정신의 표상이기도 한 만해 선사의 생가지 복원사업 및 기념관 건립과정 등을 통해 보여 온 지역의 높은 관심과 열정에 반비례하는 정부의 인색한 배려를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것은 안타까움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물질의 풍요보다는 정신의 알진 풍요가 더 필요한 시기이기에 말이다.  이러한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만해 선사의 정열적 전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국사의 전반적인 굴곡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될 만큼 참담하다. ‘이러한 참담한 역사의 한 켠에는 고대의 원효와 근세의 만해 두 사람이 있다’라고 시인인 고은은 <역사와 더불어 비애와 더불어>에서 강조한 바 있다.

지금의 우리에게는 시인으로서의 만해, 승려로서의 만해, 독립운동가로서의 만해를 생각할 때 분명 만해는 빈곤한 우리의 정신사와 역사에 있어서 분명한 주역이 되고도 남았다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이 나라의 냉정한 현실과 미래를 걱정해 볼 때 어느 한 만해라도 필요한 시기이며, 또 그 부분들을 이해하기에 힘써야 할 때이다. 그것은 이 나라 이 땅위에 살고 있는 우리의 사명이자 의무이기도 하다. 시인으로서의 만해는 우리에게 그냥 시만 남겨두고 간 게 아니다. 그가 말했듯 시가 비록 인생의 사치품이라는 그다운 시론을 펼쳤지만, 그의 가슴에 분명히 박힌 그의 시는 그답게 민중의식과 역사의식에 투철한 귀중하고 소중한 예리한 단어들을 나열해 엮은 시를 남기곤 했다.

그의 대표적인 시 <님의 침묵>은 전형적인 삶의 능동태를 절실하게 가슴으로 노래하고 있음을 쉽게 볼 수 있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로 시작되는 <님의 침묵>에서 만해 선사가 노래한 ‘님’은 과연 무엇일까.  그는 님의 분명한 뜻을 여러 의미로 명료하게 표현하고 있다.  ‘님 만이 님이 아니라 기리는 것은 다 님이다. 중생이 석가의 님이라면 철학은 칸트의 님이다. 장미화의 봄이 님이라면 마시니의 님은 이태리다.’ 그래서 그의 님이 조국이 되는 것임엔 분명하다. 시는 시로서 평가될 일이긴 하지만 만해는 시를 시로 평가하면서도 그의 가슴 구석구석엔 조국에 대한 현실이 더 깊이에 각인 되었으리라.

만해는 일찍이 동네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했다. 아홉 살에 기삼백주와 서상기를 독파하여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을 뿐만 아니라 무슨 책이고 한 번 읽으면 잊어버리는 일이 없어 향리에서는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열 네 살 되던 1892년에 부친의 명으로 홍성읍 학계리에 사는 전영주의 셋째 딸 정숙과 결혼하였으나 결혼한 지 2년이 되는 열여섯 살에 돌연 집을 떠나 설악산 오세암으로 들어간다. 그는 그곳에서 고용생활을 하였다는데 어린 나이에 부모의 슬하를 떠나 산 넘고 물 건너 그 먼 강원도의 설악산 오세암을 찾아갔다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 결성면 성곡리의 만해사

 

 


백담사 오세암서 본연의 천성 깨달아 법명 ‘용운’ 호를 ‘만해’
불교유신론 제창, 불교대전 국한문혼용 편찬·대동단결 호소 


만해 한용운의 비문에 의하면 그의 부친(한응준)이 동학에 가담한 관계로 피신 길에 오른 것처럼 기록되었으나 그의 가정환경이 동학군에 참가할 상황이 아니었고 향리에서도 동학을 했다는 말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홍주군지에 의하면 동학란 당시 한응준이 중군이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준(俊)’자와 ‘준(駿)’자가 있어 판단하기 어렵지만 사실일 수도 있기 때문에 사료적 판단이 요구되는 대목이다. 그가 오세암에서 생활하다 18세가 되던 해 한때 고향에 왔다가 다시 집을 떠나 오대산 백담사에 갔는데, 그때 첫 아들 보국이 출생하였다. 그가 백담사에 있는 동안 김연곡 스님의 간곡한 권고로 불문에 귀의하고 서고에 들어가 삼일 심야를 있다가 나왔는데 그때 서고에 있던 장서는 모두 읽었다고 한다. 그는 그때 자기 본연의 천성을 깨달았으며 이름을 고쳐 법명을 ‘용운’이라 하고, 호를 ‘만해’라 했다.

이렇게 불문에 귀의는 했지만 백형과 함께 의병에 가담했다가 참형을 당한 부친에 대한 생각은 그의 가슴을 때리고 있었다. ‘나는 탕자였다. 중년에 선친이 돌아가시고 편모를 섬겨 불효에 이르렀더니, 지난 을사(1905년)에 입신해서는 더욱 흩어져 국내, 외국을 떠돌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집에 소식을 끊고 편지조차 하지 않았는데, 지난해에 노상에서 고향 사람을 만나 어머니 돌아가신 지가 3년이 지났음을 전해 들었다. 이로부터 만고에 다하지 못할 한을 품게 되었고 하늘의 크기로도 남음이 있는 죄를 짓는 결과가 되었다’고 조선불교유신론 삽입절에 기록하고 있다.

나이 삼십인 1908년 그는 마음속에 결심한 바와 신문화를 접해 보고자 일본으로 건너가 고마자와대학에 다니며 동경 유학생 회장이던 최린과 특별한 교분을 갖게 된다. 귀국한 그는 경성 명진측량강습소를 차리고 소장에 취임한다. 그의 생각으로는 측량에 대한 올바른 인식으로 비록 나라는 일제에 빼앗겼지만 개인소유 및 사찰소유의 땅은 지키자는 의도였다. 그는 그 시절 그의 대표적 저술중 하나인 <조선불교유신론>을 집필했다. 구태의연한 한국불교의 비시대적, 비사회적 풍토를 혁신하기 위함이었는데, 거기서 그가 주장한 승려의 대처 이론은 이미 1908년 당시 중추원 의장 김윤식에게 건넨 백서에 담겨져 있었다.

1910년 서른 두 살 되던 해 그는 만주로 건너가 만주 일대에 흩어져 있던 독립군들에게 민족독립사상을 고취시키고 신채호, 이시영, 유림 등과 만나 조국광복의 문제와 독립운동의 방향, 국내사정 등을 숙의하고 돌아왔는데, 이때에 간첩혐의로 어떤 청년에게 저녁을 받고 쓰러졌다가 다행히 구조를 받아 생명을 구한 뒤 귀국했다고 한다. 이때에 귀밑에 박힌 총알을 마취도 하지 않은 채 수술을 하게 해 의사와 간호사를 놀라게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서른셋이 되던 해 귀국한 그는 조선총독부는 조선사찰령을 공포하고 우리나라 불교를 일본 불교에 예속시키는 동시에 사찰에 대한 권리를 장악하려 함을 눈치 채고 전국의 사찰을 돌며 순회강연을 갖는다. 그는 박한영 등과 손잡고 적극적인 반대운동을 벌이는 한편 불교의 유신론을 제창하고, 불교대전을 국한문 혼용으로 편찬하여 불교계의 대동단결을 호소하면서 불교총본산을 창설하고 중앙집권제를 확립하는 동시에 사찰 내에 있는 삼신각과 칠성각 등의 철폐운동을 펼치면서 대처승제도를 주장하여 불교의 일대 개혁운동을 전개한다.

서른아홉에는 채근담의 주해를 완성하고, 그해 12월 2일 밤에는 오세암에서 선(禪) 중 또 한 번 견성대각하였다고 한다. ‘사나이 이르는 곳 어디나 고향인데 몇 사람이나 오래 나그네로 지냈던가, 한 마디 외쳐서 우주를 갈파하니 눈 속의 복숭아꽃 빨갛게 나부낀다.’는 그의 오도송이 시대를 감싸 안은 그의 가슴과 머리를 그대로 전하고 있는 오늘이다.

 

 

 

<이 기획기사는 충청남도지역언론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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