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주목(洪州牧)과 왕사(王師) 보우(普愚)국사의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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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목(洪州牧)과 왕사(王師) 보우(普愚)국사의 고향
  • <특별취재팀>
  • 승인 2015.10.12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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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의 옛 고유지명‘홍주’를 함께 찾아요 ⑩

홍주, 공민왕 7년(1358) 왕사(王師) 보우(普愚)의 고향 목(牧) 승격
홍주(洪州) 조선이 망할 때까지 600여 년 동안 충청지역의 중심지 

▲ 홍성군청 앞 느티나무.

홍성사람들은 지금도 홍주인(洪州人)이라고 스스로를 부르고 있다. 홍주(洪州)가 공주·충주·청주와 더불어 충청지역의 대표적 중심지였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연유에서 출발한다. 더구나 충남도청이 공주시대와 대전시대를 거쳐 2012년 말부터 충청도 홍주 땅에 정착했기 때문에 그 자부심은 더하고 있다. 그런데 정작 어떤 이유에서인지 홍주(洪州)가 목(牧)의 위치를 가지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고 있다. 천년역사의 목사고을이라고 자부하면서도 말이다.

지금의 홍성군청의 마당에는 고려 공민왕(1358년) 때 심었다는 느티나무 두 그루가 웅장하게 서 있다. 안내표지판에는 이 나무가 고을에 액운을 미리 감지하여 밤새워 울면 그 소리를 듣고 서둘러 예방했으며, 역대 목민관이 부임하면 나무아래에 재물을 차리고 백성들의 안녕을 기원했다고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왜 공민왕 때 이 나무를 심었는지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고 있다. 하지만 요즘에도 어떤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기념식수를 하듯이 공민왕 때 홍주(洪州)에 큰 경사가 있었음을 짐작 할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기록에 따라 1356년 또는 1358년의 차이를 보이지만 고려 공민왕 5년 홍주(洪州)출신의 태고보우(普愚)가 왕사(王師)가 되었고, 왕사(王師)를 예우하는 차원에서 왕사의 내향(內鄕)인 홍주(洪州)를 목(牧)으로 승격시켰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심었을 것이란 추정이 가능한데, 족히 650년은 넘었다. 이후 홍주(洪州)는 조선이 망할 때까지 600여 년 동안 충청지역의 중심지였다.

홍성군지 등에는 “1371년(공민왕 20년) 공민왕은 보우(普愚)국사의 사망 후 그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그가 태어난 홍주(洪州)를 목(牧)으로 승격시켰다.”라고 적고 있다. 아마도 이 기록은 공민왕 17년 지주사로 낮추었다가 신돈이 처형된 후(공민왕 20년) 보우(普愚)가 다시 국사로 책봉됨에 따라 목으로 환원된 것에 대한 오기인 것 같다는 주장도 있다. 이처럼 홍주(洪州)가 목으로 승격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태고보우(普愚)라는 탁월한 인물과 지방의 정치력이 그 이유라고 보는 것이 타당 할 것으로 보고 있다. 왜냐하면 홍주(洪州)는 고려 현종 3년(1012) 이전까지는 신라 말 이후 운주라고 불렸으며, 운주 성주 긍준(兢俊)은 왕건을 도와 고려의 건국에 참여하고 일정한 지분을 가졌기 때문이다. 긍준(兢俊)은 태조 왕건의 12번째 왕비인 홍복원부인의 아버지인 홍규(洪規)와 동일 인물로 보우(普愚)와 같은 홍주(洪州) 홍(洪)씨이며, 이 세력들은 고려 내내 홍주지역의 호족으로 영향력을 유지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따라서 그 힘이 태고 보우(普愚)의 왕사·국사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을 추론 해 보는 이유다. 이해를 돕기 위해 임선빈의 관련연구를 인용 정리한다.

조선시대 내포의 중심고을이었던 홍주목(洪州牧)은 신라 말 고려 초의 격변기에 요충지로 부각되었다. 나말여초 이 지역은 원래 후백제의 영역이었는데, 왕건이 태조 10년(927) 운주를 공격하여 성주 긍준(兢俊)을 패배시켰다. 긍준은 태조 19년(936) 일이천 전투 시 왕건 측의 장군으로 참전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왕건에게 스스로 항복하여 그 공으로 홍규(洪奎)란 이름을 하사 받고, 자기의 딸을 왕건에게 결혼시킨 것으로 보인다. 태조의 부인 중 12번째 왕비인 흥복원 부인이 홍주(洪州)출신 홍규의 딸이었다. 그런데 긍준이 패배한지 1년 만에 이곳에는 성이 축조되었다. 운주의 옥산에 성을 쌓고 군대를 주둔시켰는데, 그 성은 기록에 보이는 여양산성이나 월산성(月山城)일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다가 태조 17년(934) 9월에 운주 부근에서 왕건과 견훤 간에 전투가 벌어져 왕건이 승리하였다. 그러자 ‘삼국사기’ 제12권 신라본기(新羅本紀12, 敬順王 8년)에 의하면 운주 부근의 30여 군현이 귀순해 왔다. 여기서 운주(運州)는 곧 조선시대의 홍주(洪州)이다. 이 시기에 ‘웅진 이북의 30여 군현을 아우르는 요충지’로 부각되었던 것이다. 이들 군현은 홍주의 속군현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운주에는 현종 3년(1012)에 지주사(知州事)를 두었다. 뒤에 지명을 홍주(洪州)로 개칭하였으나, 그 시기는 분명하지 않다. 이후 홍주(洪州)는 5도 양계의 제도가 시행되자 양광도(楊廣道)에 속하였고, 혜성군( 城郡), 대흥군(大興郡), 결성군(結城郡)과 고구현(高丘縣), 보령현(保寧縣), 흥양현(興陽縣), 청양현(淸陽縣), 신평현(新平縣), 덕풍현(德豐縣), 이산현(伊山縣), 당진현(唐津縣), 여미현(餘美縣), 여양현(驪陽縣), 정해현(貞海縣) 등 3개 군, 11개 현을 속현으로 거느렸다. 홍주(洪州)는 공민왕 7년(1358) 왕사(王師) 보우(普愚)의 고향이라 하여 목(牧)으로 승격되었다가, 공민왕 17년(1368) 지주사(知州事)로 강등되었고, 공민왕 20년(1371) 다시 목(牧)이 되었다.
 

▲ 군청 느티나무.


홍주(洪州)의 고을명이 충청도 도명(道名)에 반영된 것 9번 기록돼
홍주목(洪州牧) 신라 말 고려 초 격변기 요충지로 부각된 중심고을


조선왕조가 들어서면서 태조 4년(1395)에 도읍을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기고 양주(楊州)․광주(廣州) 관할 군(郡)․현(縣)을 양광도에서 갈라 경기(京畿)에 옮겨 붙이게 되자, 충청지역은 더 이상 양광도라는 도명을 사용할 수 없게 되어 충청도로 개칭되었다. 이후 홍주(洪州)는 충청도의 4목(충주·청주·공주·홍주) 가운데 하나였다. 사실 양광도라는 도명이 사용되던 태조 2년(1393)에 전국 각도의 계수관을 정할 때, 양광도의 계수관은 광주(廣州), 충주(忠州), 청주(淸州), 공주(公州), 수원(水原)이었으므로 홍주(洪州)는 계수관에 해당하지 않았다. 이후 홍주(洪州)가 충청도의 계수관에 포함된 시기가 언제인지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태종 8년(1408)에 여양현(驪陽縣)을 홍주(洪州)에 합치고 비로소 판관을 설치한 것은 아마 계수관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측될 뿐이다.

태종 13년(1413)에 고을 명칭의 일제 정비가 이루어지면서, 정3품 품계의 목사가 수령으로 파견되는 큰 고을에만 지명에 ‘주(州)’자를 사용하게 되었다. 이후 홍주(洪州)는 조선 전 시기를 거쳐 충청도 4목으로서의 위상을 견지하면서 행정적․군사적으로 내포지역을 대표하는 고을이었다. 다만 조선후기에는 홍주지역에서 몇 차례 일련의 불미스러운 사건들이 발생하여 홍주목이 홍양현으로 강등되었다가 다시 복구되는 과정을 겪었다. 최초의 강등은 현종 2년(1011)에 있었다. 이유는 임금의 상징인 전패(殿牌)가 변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현종 대에 특히 전패의 변이 많이 발생하고 있었는데, 조정에서는 이러한 사건에 대해 간악한 백성이 수령을 쫓아내기 위한 계책으로 보고, 그 고을은 강등시키되 수령에게는 죄를 묻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홍주(洪州)의 경우 전패의 변이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에서 발생한 것인지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다른 지역에서 백성이 전패를 몰래 훔쳐가는 예가 많은 것으로 보아 이와 비슷한 사건이 발생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때 효종 조부터 사용되던 충청도(忠洪道)라는 도명도 충공도(忠公道)로 바뀌게 되었다.

조선시대 도명의 개호와 읍격의 강등은 재지세력을 견제하고 지방민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지방통치책의 일환으로 이루어졌다. 강읍호된 고을의 복호기간은 선조대까지는 대신들의 목의(收議)에 의해 결정되었으나, 광해군 이후에는 대체로 10년을 처벌기한으로 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강등된 홍양현(洪陽縣)도 10년이 지난 현종 11년(1670)에 홍주목으로 승격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홍주목은 숙종 36년(1710)에 다시 홍양현으로 강등되었는데, 육친을 살해한 망상죄(綱常罪)를 지은 삼성죄인(三省罪人)이 태어난 고을이기 때문이었다. 이때도 10년이 지난 숙종 45년(1719)에 홍주목으로 승격되었다. 또한 당시 홍양현감 이정제(李廷濟)는 일찍이 3품을 거쳤기 때문에 그대로 홍주목사에 승부(陞付, 높은 곳에 오르다. 승진하다)되었다.

<이 기사는 지역공동체캠페인사업으로 한국언론진흥재단·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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