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봉길 홍구공원 폭탄투척 의거, 조국 광복의 초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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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홍구공원 폭탄투척 의거, 조국 광복의 초석
  • 글=한관우/자료·사진=한기원 기자
  • 승인 2015.11.23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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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국항쟁의 진원지를 찾는 역사기행 <14>

충청 독립운동가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 1931년 윤봉길 의사가 한인애국단에 입단할 때 쓴 선언문과 함께 찍은 사진(왼쪽)과 선언문 사본(오른쪽).


1932년 4월 29일 상해의거 결행, 1946년 유해·유품 발굴
오사카 위수형무소 수감, 12월 18일 가나자와 형무소 이감
12월 19일 가나자와 교외 공병작업장에서 탄환 맞고 순국
윤 의사의 관, 십자가 형틀·기타 유품 순국 14년 만에 찾아

1932년 4월 29일, 아침 7시 40분경 윤봉길은 축제 분위기에 들뜬 공원에 입장하는데 성공하여 연단 뒤편에 자리를 잡는다. 식장에는 높이 9자(약 2.7m), 약 4평의 빨간색과 흰색의 헝겊을 두른 식단과 배후에는 큰 국기를 교차시켜서 마련되어 있었으며, 좌우에는 초대된 군·관·민 대표, 전면에는 각급 학생 대표, 재향군인, 일본의용대 등의 단체, 그리고 후면에는 일반 거류민이 자리하여 약 1만 명의 군중이 전승과 축제의 분위기로 들떠 있었다. 11시에는 관병식이 끝난 후 잠시 휴식시간이 있었고 식을 마친 군대는 장외로 나갔다. 11시 반부터 예정대로 축하식이 시작되었다. 흐렸던 날씨는 식이 시작되면서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국가의 합창이 거의 끝나가며 장엄한 기운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별안간 굉장한 폭음이 장내를 진동하고 섬광과 함께 식단은 허연 연기로 가려졌다. 이때가 11시 40분, 우리 시간으로는 12시 40분이었다. 단상에 일렬로 나란히 서있던 일본인들이 그 자리에서 넘어졌고, 시라카와 사령관이 비틀거리며 안면에 흐르는 피를 오른손으로 누르면서 연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윤 의사는 기념식전의 마무리 단계로 일본국가의 제창이 끝날 무렵 확성기의 성능이 나빠 수선하는 어수선한 틈을 타서 손에 들었던 도시락형 폭탄을 땅에 놓고 어깨에 걸었던 물통형 폭탄을 내려 발화용 끈을 잡아당기는 동시에 식단 가까이 돌진했고, 왼편 뒤쪽에서 단상을 향해 이것을 던져 연단 중앙에 명중시켰던 것이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 홍구공원에서 일본 장성들에게 투탄’
윤봉길이 던진 의탄은 연단 앞줄에 자리한 시라카와(白川) 사령관과 우에다(植田) 사단장의 중간쯤에 명중했다. 단상의 일본인들은 파편에 맞아 실로 아비규환의 지옥을 연상케 하는 장면이 벌어졌다. 단상위에 서 있던 시라카와(白川) 대장은 몸에 심한 파편을 맞아 5월 24일 죽었고, 카와바다(河端) 상해 거류 일본인민단장은 창자가 끊어져 폭사했으며, 노무라(野村) 중장은 실명했다. 우에다(植田) 중장은 다리가 절단되는 중상을 입고 절뚝발이가 되었으며, 시게미쓰(重光) 주중공사, 무라이(村井) 상해 총영사, 거류민단 토모노(友野) 서기장 그리고 취재 중이던 일본인 기자 등 다수가 중상을 입었다. 시라카와(白川) 대장의 죽음은 당시 일본 총사령관으로서는 최초의 죽음이었다. 연단의 장면을 확인하고 자폭하기 위해 도시락폭탄을 잡을 겨를도 없이 윤봉길은 달려드는 군중들과 일본 경찰의 폭행으로 현장에서 순간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체포된다.

“그날 일본의 신문에는 폭탄을 던진 중국인의 소위라고 하더니, 이튿날 신문에야 일치하게 윤봉길의 이름을 크게 박고 법조계에 대수색이 일어났다.” -백범일지에서-
윤봉길의 의거 소식이 상해시가를 발칵 뒤집은 것은 그날 오후부터였다. 처음에 사건의 진상을 중국인의 소행이라는 등 제멋대로 보도하던 신문들도 ‘조선인 윤봉길’로 보도하기 시작했고 국내에서는 ‘동아일보’가 호외로 윤봉길의 의거를 알렸다(4월 30일).
 

 

▲ 일본 가나자와의 윤봉길 의사 암장지터. 윗쪽에는 전사한 일본군을 추모하는 묘원이 있다.


중국신문들은 은연 중 윤 의사의 쾌거를 통쾌해 했고, 일본신문들은 두려움을 감추지 못했다.
윤봉길 의사는 4월 29~30일 양일간에 걸친 무자비한 고문에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이기며 결코 임시정부 요인과의 관련은 입 밖에도 내지 않았다고 한다. 4월 30일 상해 파견군 헌병대에서 심문을 받던 중에 ‘자기의 권한을 남에게 빼앗기고 분개하지 않을 자가 누구냐’고 반문하며 떳떳한 자세를 굽히지 않았다. -심문 기록에서-

윤봉길 의사는 5월 25일 상해 파견 일본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는다. 이 자리에서 윤 의사는 “이 철권으로 일본을 즉각 타도하려고 상해에 왔다”고 떳떳이 주장한다. 이때의 내용은 그 후 일본에서 찾아낸 ‘사형집행시말서’에서 자세히 볼 수 있다. 사형이 확정된 후 윤 의사는 자신이 쓴 유서를 확인해 주며 “현재는 우리나라가 힘이 약하지만 세계 대세에 의해 반드시 우리는 독립한다. 일본은 지금 열강이지만 시든 나뭇잎같이 항복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윤 의사는 11월 18일 삼엄한 경비 속에 일본에 후송되어 이틀 후 오사카 위수형무소에 수감된다. 이후 12월 18일에 가나자와 육군형무소에 이감된다. 다음날 아침 7시 40분 가나자와 교외 미고우시 공병작업장에서 십자가 형틀에 매어 두 발의 탄환을 맞고 순국하였다. 4월 29일의 거사 직후부터 ‘역적의 집’이라 하여 수라장이 되었던 윤 의사의 집에는 일본 순사가 배치되어 가족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다. 그 후 일본경찰 당국은 덕산주재소의 주임으로 ‘순사부장’을 ‘경부보’로 한 계급 올려서 배치했다. 그들의 감시는 1945년 해방될 때까지 계속되며 아들 종이 이로 인해 학교교육을 받는 데도 어려움을 겪는다. 이후 독립지사인 이종석 선생의 도움으로 그가 설립한 보인상업학교에 진학하게 된 바도 있다(1943년).

윤 의사의 부친은 손가락을 잘라 유골이나마 보내줄 것을 탄원하는 내용의 혈서를 써서(윤남의 님이 부친의 손을 잡고 쓰는 것을 도움) 경찰서에 제출했으나 예산경찰서에서는 냉소로 일관한다. 가족이 원하는 유골은 돌아오지 않고, 윤 의사의 유품만이 돌아왔다. 땀이 얼룩진 흰 손수건과 가죽지갑, 회중시계, 알 없는 안경집, 그리고 도장과 약간의 중국화폐였다(현재 윤봉길 의사 기념관 보관).

특히 중국의 장개석 총통은 “중국의 백만 대군도 못한 일을 일개 조선 한 청년이 해냈다”고 감격해 했다고 전해진다. 그동안 무관심하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하였다. 그리하여 중국육군중앙군관학교에 한인 특별반을 설치하는 등 한국의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성원하였다. 또한 한동안 침체일로에 빠져 있던 임시정부가 다시 독립운동의 구심체 역할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것도 이 의거에 힘입은 바가 컸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중국에서의 독립운동은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으며,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그동안 반역의 집안으로 감시를 받아오던 윤봉길 의사의 집은 의사 댁으로 일컬어지기 시작한다. 8월 16일 덕산에서 도인원 등 약 300명이 회의를 열고 ‘윤봉길 의사 유해봉환위원회’를 발족한다(위원장 조인원, 총무 정인영). 11월 23일 백범 선생이 환국하고, 5월 초에는 재일동포 서상산, 박열, 이강훈 등이 윤 의사 유해 봉환을 추진하여 한국인 청년 50여 명이 나서서 가나자와 교외에서 유해를 찾기에 이른다. 사흘 동안 이곳저곳을 파보았으나 발견하지 못했는데 석천현 출신 장병묘지 관리인 부인이던 노파(80여세)가 일러주는 쓰레기하치장을 파서 가매장된 윤 의사의 관, 십자가 형틀과 기타 유품을 순국 14년 만에 찾아낸다. 5월 중순 윤 의사를 비롯한 이봉창, 백정기 등 3열사의 유해가 부산에 도착한다. 부산 동래국민학교에 빈소를 마련하였으며, 5월 21일에는 부산 대신동 공설운동장에서 3열사 추도식이 엄수된다. 정부에서 마련한 임시 특급열차 편으로 서울에 도착한 유해는 태고사(현 조계사)에 봉안되고 장례준비위원회가 구성된다. 7월 7일 10여만의 추도 인파가 참석한 가운데 서울 운동장에서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등 3열사의 유해가 처음 국민장으로 엄수되어 효창공원 묘역에 안장됐다.

충청도 산야를 덮은 한포기의 풀, 한 송이의 꽃들에서도 윤 의사의 거룩한 정신이 그대로 배어 자양분이 되고 있다. 특히 후손들의 허기진 정신에도 그 의연함과 지조가 배어 있는 고향인 덕산고을과 광복 70년을 맞는 전국에선 올해도 후손들의 마음가짐이 숙연해지고 있다. 항일독립운동사의 거봉으로 농촌계몽운동가로서 민족의 숙원인 조국광복의 실현에서 그의 정신과 사상이 부활되기를 바라고 있다.

 

<이 기획기사는 충청남도 지역언론 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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