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리, 김좌진 장군의 묻혀진 역사의 흔적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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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 김좌진 장군의 묻혀진 역사의 흔적을 찾아서
  • 글=한관우/자료·사진=한기원 기자
    자문=안화춘
  • 승인 2015.12.04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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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국항쟁의 진원지를 찾는 역사기행<12>
충청 독립운동가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백야 김좌진 장군의 굵직하고 짧은 삶에서 북간도지방은 항일독립운동의 현장이며 정신이었다. 또한 청산리전투와 백야 김좌진 장군의 연구를 위해서는 사적과 사적지에 대한 고찰, 자료의 수집 및 발굴 등은 우리에게 귀중한 사료적 자산이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조성된 냉전체제와 이념의 시각차이 등의 원인으로 항일독립운동에 대한 연구는 철저하고도 전면적으로 그리고 사실 그대로 독립운동에 대한 전모를 드러내지 못했다. 특히 자료의 보존 및 발굴과 사적지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최소한 필자가 돌아본 북간도지방의 항일독립운동 사적지에 대한 느낌은 그렇다. 
 

 

 

▲ 청산리골짜기 일대의 현재 모습.

봉오동 골짜기와 청산리 전적지
연길에서 차를 타고 연길, 도문 방면으로 이어지는 길을 달리다가 소반령 터미널을 지나 석교를 조금 지나게 되면 왕청방면으로 갈림길이 나온다. 이곳에서 내려 갈림길을 따라 동북쪽으로 얼마쯤 들어가면 수남이라 불리는 작은 마을이 나온다. 여기서 조금 더 들어가게 되면 토성리라는 마을이 있는데, 병풍처럼 둘러싸인 산은 두 갈래의 골짜기를 끼고 우뚝 솟아있다. 이 골짜기에 들어서면 한 눈에 저수지가 펼쳐지는데 이 저수지를 끼고 갈지자형으로 굽이굽이 동북방향으로 뻗어 올라간 골짜기가 바로 봉오동 골짜기이다. 봉오동 골짜기의 지형을 살펴보면서 동‧서‧북쪽 방면은 높고 가파른 산에 둘러 싸여 마치 삿갓을 씌운 듯했다. 이 골짜기에서 흐르는 물이 봉오동저수지의 수원인 셈이다. 1910년 당시엔 이 골짜기에는 200여 가구에 이르는 작은 자연마을들이 하촌, 중촌, 상촌으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하는데, 봉오동 계곡의 첫 마을을 ‘하촌’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하촌에 들어서면 최진동의 장원이 뚜렷하게 있었다고 한다. 기와집 몇 채와 토담을 쌓고 토담의 네 귀퉁이에는 포루까지 수축했었다고 하는데, 이곳 하촌부터 호박골에 이르는 30여 리의 토지가 거의 최진동의 소유였다는 설명이다. 이런 대강의 얘기가 백야 김좌진 장군이 활동했던 시기의 단편적인 봉오동 지역의 모습이라면, 해방 후에는 점차 마을이 없어지고 1970년대에는 봉오동 입구에 저수지를 축조함으로 마을이 없어지게 되었다는 설명이다. 이곳이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가 바로 청산리전투가 이 골짜기에서 벌어졌기 때문이다.
저수지의 댐 쪽에서 골짜기를 바라보게 되면 초성정자(草惺頂子)와 하촌의 일부만이 보이고 중촌과 상촌 쪽에 해당하는 곳에는 잡목으로 우거져 있다고 한다. 상촌입구에 해당되는 골짜기는 동남골과 북골로 갈라지는데 북골을 따라 들어가면 북동에, 동남골을 따라 들어가면 남동에 이르게 되는데, 동남골에는 결국 비파동이란 곳에 이르게 된다. 사람들은 이골을 호박굴이라 불렀다고 한다. 북동의 북골을 넘어가면 왕청현 대차자(大次子)에 이르게 되고 동굴(당시 사람들은 동골을 도투묵 또는 도투묵은골이라 불렀는데, 도투는 돼지를 일컫는 말이라고 함)에 대해서는 아마도 골짜기에 돼지들이 무리지어 놀 수 있는 지형임을 지칭하고 있는 것과 같이 상촌지역의 가운데가 말안장과 같이 솟아있고 사면이 높고 가파른 산들로 둘러싸여 있어 지리적으로 매복전을 하기에 적합한 곳으로 입구가 마치 주머니 모양과 흡사하여 이곳에 일단 들어오게 되면 아무리 재간이 있다 해도 입구를 막게 되면 빠져나올 곳이 없게 되어 있는 지형이다. 그렇기에 결국 김좌진 장군은 이곳에서 독립군을 매복시켜 놓은 상태에서 일본군을 유인하여 승리를 거둔 것으로 생각된다. 이곳이 봉오동 전적지의 옛터인 것이다. 그럼 과연 상촌지역에서 김좌진 장군이 매복을 통해 일본군을 습격했던 정확한 지점은 어디일까. 당시 상촌지역에 주둔한 독립군부대는 홍범도부대, 최진동부대, 안무부대, 신민단 등 이었는데 이들은 하나로 연합하여 독립군단인 대한군북로독군부를 조직하고 있었다. 일제의 기록에 의하면 이 무렵 대한독립군의 병력은 최진동의 군무도독부 약 670명, 홍범도와 안무의 국민회가 약 550명 등 총 1200여 명 정도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독립신문 제88호에 의하면 1920년 6월 7일 홍범도는 주민들을 먼저 산중으로 대피시킨 후 독립군에게 제1연대는 봉오동 상촌부근에 있는 연병장에 집합하여 작전명령과 임무를 정했는데, 제1중대장 이천오는 중대를 인솔하여 봉오동 상촌 서북단에, 제2중대장 강상모는 동산에, 제3대중대장 강시범은 북산에, 제4중대장 조권석은 서산 남단에, 연대장 홍범도는 2개 중대를 인솔하여 중북단에 위치하여 매복하다가 일본군이 마을 입구를 통과하게 한 후에 포위하여 전투를 감행한 것으로 판단된다. 결국 백야 김좌진 장군이 중심이 되어 승리로 이끈 봉오동 전투는 상촌입구의 개활지대의 갈림길 즉, 북동과 남동으로 뻗는 갈림길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는데 일본군은 품자형을 이루고 있는 세 개의 산사이 개활지대에서 독립군에게 포위된 것으로 추정된다.

 

청산리대첩과 백운평전투 사적지 
청산리대첩이란 1920년 10월 21일 청산리 백운평전투를 서막으로 10월 26일까지 와룡구 어랑촌, 고동하 등지에서 전개된 10여 차례 이상의 크고 작은 전투를 가리킨다. 화룡진(삼도구)에서 해란강을 따라 서남방향으로 20여km를 올라가면 청산리라는 마을이 있다. 화룡진과 청산리 사이에는 부흥촌(일명 박달평), 송화평, 이월평, 십리평 등이 해란강을 끼고 1~2km사이에 형성되어 있다. 100여 호나 되었다는 백운평마을, 동서방향으로 확 트이고 남북사이 거리가 200여m밖에 되지 않는 이 마을은 일제 토벌대의 총칼에 주민이 모두 목숨을 잃어버려 95년이 지난 오늘에는 마을의 형체조차 찾아볼 수가 없다. 다만 잡초와 수목만이 우거져있고 당시 주민들이 사용하던 우물터와 밭터, 집터의 주춧돌 등만이 아픈 과거사를 대변해 주고 있었다. 민가가 한집도 없는 우거진 수림만이 가득한 골짜기엔 그 옛날 우렁찬 함성의 김좌진 장군과 독립군들의 조국의 독립을 향한 울분의 메아리가 귓전을 울리고 있을 뿐이다.
청산리대첩의 서막인 백운평전투 지점은 ‘직소’근처라고 한다. 그러면 직소는 어디를 가리키는가. 연변사회과학원의 강용권, 안화춘, 김석 씨 등은 직소의 위치에 대하여 ‘직소란 영액령(英額玲)에서 발원한 해란강이 커다란 암석사이로 흘러내리다가 이곳에 이르러 낙차 높은 바위에서 곧게 떨어지면서 깊은 소가 이루어졌다’하여 직소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직소의 위치는 흔적조차 찾기 힘들고 오직 외나무다리만이 놓여 있을 뿐이다. 직소의 위치는 백운평 마을 터에서 해란강을 따라 2km쯤 올라가 베개봉(증봉산 이라고도 함) 동북쪽 산 밑에 있다는 얘기다. 결국 백운평전투는 이 직소근처에서 벌어진 독립군들의 일본군에 대한 매복전투를 가리킨다. 이 직소근처에서 김좌진의 독립군은 왜적을 얼마나 소멸하고 일본군이 이 골짜기에서 몇 명이 독립군을 추격해 왔는가. 백운평전투를 지휘한 이범석 장군은 “적의 전위부대 1000여명을 전격적인 기습으로 한 시간 반 만에 완전 소멸하고 말았다”고 그의 ‘우등불’에서 회상하고 있다. 그러나 ‘간도출병사’에 의하면 안천(安川)소좌 지휘 하에 전위보병 1개 중대가 아군의 매복지점에 들어왔다가 아군의 습격을 받아 200여명이 소멸되고 뒤이어 주력부대가 이 골짜기에 들이닥쳐 피아간 격전이 벌여졌는데, 격전 중 김좌진 장군의 명령에 의해 아군은 전투장을 떠났고, 적은 날이 어두워져 감히 추격을 하지 못한 채 그 분풀이로 백운평 마을을 덮쳐 주민들을 학살했다는 설이 사실에 근접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어랑촌 전적지와 천수평 전적지
어랑촌은 한일합병 후 함경북도 경성군 어랑면의 농민들이 개척한 마을을 지칭한다. 이 마을은 서성(이도구)에서 서쪽으로 12km가량 떨어져 있는데, 마을 서남쪽으로 4km가량 가면 계남촌에 이르고 계남촌에서 서쪽으로 들어가면 천수평(샘물골)에 이르게 된다. 계남촌에서 서남쪽으로 16km가랑 가면 갑산촌에 이르게 되는데, 어랑촌 서북쪽과 4km가량 떨어진 곳이 와룡이다. 청산리대첩 중 피아간 가장 큰 규모의 전투를 벌였고 시간상 가장 오랫동안 혈전을 치른 곳이 어랑촌 전투인데, 바로 어랑촌완루거우와 천수평에서 벌어졌다. 지금의 어랑촌 마을 터는 경신년 당시의 마을이 아니다. 당시 어랑촌 마을은 어랑촌 북쪽골짜기, 즉 완루거우에서 흘러내리는 냇물 오른쪽에 길게 자리를 잡았었다고 한다. 어랑촌 마을 옛터는 지금은 밭으로 변해 찾아보기 힘들고 마을 터가 냇물의 왼쪽으로 옮겨지게 된 것은 일제의 집단부락 정책에 의해서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1933년 2월 12일 벌어진 어랑촌 전투의 반격전에서 연길지역의 항일투쟁사에 있어서 기록되는 어랑촌 13용사는 피나는 전투에서 장렬히 희생된 용사를 가리킨다는 설명이다. 백야 김좌진 장군의 짧지만 굵직한 생애를 통해 민족애에 대한 족적을 체계적으로 정립해야 하는 일은 앞으로의 과제로 남는다.
 글=한관우/자료·사진=한기원 기자
자문=안화춘 연변역사연구원 교수

<이 기획기사는 충청남도 지역언론 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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