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꾼 유태헌·한관우 기자의 금북정맥 탐사
상태바
산꾼 유태헌·한관우 기자의 금북정맥 탐사
  • 유태헌·한관우
  • 승인 2013.07.08 13:3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내포지역 역사·문화·풍속 이야기 ⑤

 

▲ 가야산 자락에 명당으로 알려진 남연군묘.


가야산, 2대 걸쳐 임금 나온다는 명당 

자연·문화 연결 백제 미소길 조성
남연군묘 2대 천자지지 명성
덕산온천·충의사 등 사적지 산재 

 

가야산, 2대 걸쳐 임금 나온다는 명당 자연·문화 연결 백제 미소길 조성 남연군묘 2대 천자지지 명성 덕산온천·충의사 등 사적지 산재 가야산(伽倻山, 678m)은 백두대간의 속리산 천황봉(1058m)에서 갈라져 나와 칠갑산에서 북진하는 금북정맥이 서해를 향하다가 남은 힘으로 불쑥 솟아 있는 산이다. 금북정맥은 홍성을 지나 삼준산을 빚어 놓은 다음, 노적봉~가야산~석문봉~옥양봉을 들어 올리고는 두 가닥으로 나뉘어져 북서쪽으로 가지를 친 능선은 일락산을 들어 올린 후 서산 앞바다로 가라앉는다. 옥양봉에서 북동으로 달아나는 산릉은 상왕산을 빚어 놓고, 그 여맥을 당진평야에 묻는다. 가야산은 예산군과 당진시, 서산시 등 3개 시군에 걸쳐 들판에 우뚝 솟아 산세가 당당하고 곳곳에 사찰이 자리하고 있다. 신라 때 나라에서는 가야산 동쪽에 가야사를 짓고 제사를 지냈으며, 조선시대까지도 덕산 현감이 이곳에서 봄가을 제를 올렸다고 전한다.

가야산 정상인 가사봉은 군사시설이 있어 일반인은 출입금지 구역이다. 따라서 가사봉 북쪽 2km거리인 석문봉(653m)을 오르는데 그친다. 그러나 예로부터 이곳 주민들은 석문봉을 주봉으로 생각해 왔다고 한다.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와 가야사 터에 맥을 대고 있는 봉이 바로 석문봉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야산 산행은 남연군묘가 있는 상가리에서 옥녀폭포가 있는 일조암 계곡을 경유하여 석문봉을 오르내리는 코스가 가장 많이 이용되고 있다. 또한 일조암 계곡으로 석문봉에 오른 다음 서산 들판이 시원하게 터지는 북동릉을 타고 옥양봉에 이르러 쉰길바위 능선을 거쳐 다시 남연군묘 앞으로 내려서기도 한다. 정상 돌탑에서 남쪽 능선을 타고 내려가면 물이 맑고 계곡이 좋은 용현계곡으로 하산 할 수 있다.
 

▲ 남연군묘 아래 현재 발굴이 진행 중인 가야사 터.

 

 


특히 가야산에는 최근 '백제의 미소 길'이 조성됐다. 백제의 미소 길은 특히 남연군묘를 시작으로 대문동 쉼터, 가야산 수목원, 으름재 쉼터, 백제의 미소공원, 퉁퉁고개 쉼터, 소나무 쉼터, 보원사지, 서산 마애삼존불 등 가야산의 빼어난 자연과 문화를 연결, 제주도 올레길이나 지리산 둘레길에 견줘도 손색없는 명품 숲길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와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6.5㎞를 연결하고 있는 백제의 미소 길은 생태탐방로 6.5㎞와 도로 3.4㎞로, 생태탐방로에는 맨발 체험을 할 수 있는 황톳길과 소공원 7개소, 소규모 공연장 1개, 연못 2개, 가야산 자생식물 수목원 1개소 등이 조성돼 있다.

가야산이라는 산 이름과 같은 가야사는 언제 누가 창건했는지 자세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한때는 규모가 제법 큰 절이었다고 전한다. 1799년(정조 23)에 편찬된 범우고(梵宇攷)에는 '이 절에 금탑(金塔)이 있는데, 매우 빼어난 철첨석탑(鐵尖石塔)으로 탑의 사면엔 감실을 만들어 석불을 봉안하고 있다'는 기록이 나올 뿐이다.

젊은 시절 안동김씨의 세도에 밀려 수모를 겪으며 살던 흥선군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은 18살 되던 해에 부친(남연군 이구, 1788~1836)이 죽자 경기도 연천 땅 남송정에 묘를 썼다. 하지만 풍수지리상 좋지 않은 자리로 생각하고 있던. 흥선군은 식객이자 이름난 지관인 정만인에게 간청을 했다고 한다. 정만인은 가야산 북쪽에 2대 천자지지(2代天子之地)가 있고, 남쪽 오서산 아래에 만대에 걸쳐 영화를 누릴 수 있다는 만대영화지지(萬代榮華之地)가 있다고 하자, 만대 부귀영화보다 2대 천자지지를 선택한 뒤 직접 현지를 답사해보니 공교롭게도 가야사 5층 금탑이 있는 곳이었다고 한다. 1840년 정치적 야심이 컸던 이하응은 가야사를 불태운 뒤 경기도 연천에 있던 남연군의 묘를 이곳으로 이장하기로 작정했다.

 

 

 

 

 

▲ 남은들 상여. 현재 광천리와 남연군묘 아래 복제품이 전시돼 있다.


남연군의 네 아들 중 막내인 이하응은 호를 석파(石坡)라고 하는데, 추사 김정희로부터 서화를 배웠다. 특히 난을 잘 그려서 석파란(石坡蘭)이라 할 만큼 서화가 유명했다고 한다. 가진 재산이 없던 이하응은 가깝게 지내던 판서 김병학을 찾아가 그가 좋아하는 난을 그려 주고, 그 대가로 김병학이 가보로 전해오던 벼루를 얻어 영의정 김좌근에게 선물로 줬다고 한다. 그리고 김좌근으로부터 충청감사에게 가야사를 흥선군의 부친인 남연군의 묘를 쓰는데 협조해주라는 편지를 받아들고, 금탑을 허문 자리에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썼다. 그리고 때를 기다렸다고 한다.

아무튼 흥선대원군은 남연군을 이장하면서 도굴을 염려하여 쇠 수 만근을 붓고, 석회를 비벼 봉분을 만들었다. 무덤 좌우에 석양(石羊) 2개, 돌망주 2기와 '이대천자지지'라고 새긴 석등까지 세웠는데, 그 음덕인지 1852년 이하응은 아들 명복(明福 =載惶)을 낳았다. 그 후 철종이 아들을 낳지 못하고 죽자, 철종의 6촌형 뻘인 이하응은 왕실의 가장 어른인 대왕대비 조대비에게 접근해서 둘째아들 명복을 철종의 양자로 삼게 한 뒤 철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니 바로 조선 26대 임금 고종이다.

이렇게 명당을 믿고 부친의 묘까지 이장한 이하응은 12세에 임금이 된 아들 덕택에 임금의 아버지가 받는 대원군(大院君)이 됐다. 하지만 남연군묘는 1868년 독일인 에른스트 오페르트의 도굴사건이 터지면서 대원군이 쇄국정책을 강화하고 천주교를 탄압했던 계기가 됐던 사연도 안고 있다.

대원군은 가야사를 불태워 버린 죄책감에 사로잡혔다가 아들인 고종이 즉위하자 가야사를 승계하여 1871년(고종 8년) 불살라버린 가야사의 동쪽 산중턱 서운산 남쪽 기슭에 새 절을 창건했는데, 이절은 부처님께 속죄한다는 뜻으로 '보덕사'라 명하였다 한다. 가야산 자락에는 백제초기부터 들어서기 시작한 사찰들이 많은데, 가야사, 개심사, 수덕사, 보원사 등 100여개의 절이 있었다고 한다. 이중 보원사와 가야사는 폐사됐고, 개심사와 수덕사는 지금까지 남아 있다. 남연군묘 아래 가야사 터는 현재 발굴이 한창 진행 중에 있다.

한편, 1844년 경기도 연천에 있던 남연군묘를 덕산으로 이장하는데, 상여의 운구는 길가의 마을주민들이 동원됐다고 한다. 그때 사용했던 상여는 마지막 구간 운구에 동원되었던 덕산면 남은들(광천리 옛 지명)마을주민들에게 하사, 지금까지 남은들 상여(민속자료 제31호)라 하여 보존되고 있다. 긴 멜대를 중심으로 한 기본 틀 위에 관을 얹는 몸체에는 봉황, 용무늬 등이 새겨졌고 색색의 띠와 술을 늘어뜨려 화려하면서도 엄숙한 분위기를 갖게 한다. 덕산면 광천리에 보관하고 있던 진품 남은들 상여는 훼손 및 도난방지를 위해 지난 2006년 국립고궁박물관에 보존돼 있다. 현재 원상여막은 덕산~해미로 가는 광천리 도로변에 있고, 남연군묘 아래 상여막에는 예산출신 전흥수 대목장과 배순화 매듭장이 만든 복제품 상여를 전시하고 있다. 남은들 상여는 흥성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장례 때 사용됐던 것으로 조선 황실에서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며, 의례나 풍속연구에 있어 귀중한 민속문화재로 평가되고 있다.

지금도 가야산 자락에는 덕산온천관광지가 있고, 윤봉길(1908~1932) 의사를 모신 사당인 충의사 등 사적지가 있어 역사, 문화, 관광지로 각광받고 있다.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관련기사
산꾼 유태헌·한관우 기자의 금북정맥 탐사
산꾼 유태헌·한관우 기자의 금북정맥 탐사
산꾼 유태헌·한관우 기자의 금북정맥 탐사
산꾼 유태헌·한관우 기자의 금북정맥 탐사
산꾼 유태헌·한관우 기자의 금북정맥 탐사
산꾼 유태헌·한관우 기자의 금북정맥 탐사
산꾼 유태헌·한관우 기자의 금북정맥 탐사
산꾼 유태헌·한관우 기자의 금북정맥 탐사
산꾼 유태헌·한관우 기자의 금북정맥 탐사
궁예·임꺽정·어사 박문수 일화가 전해지는 칠장산
산꾼 유태헌·한관우 기자의 금북정맥 탐사
산꾼 유태헌·한관우 기자의 금북정맥 탐사
산꾼 유태헌·한관우 기자의 금북정맥 탐사
산꾼 유태헌·한관우 기자의 금북정맥 탐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