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꾼 유태헌·한관우 기자의 금북정맥 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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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꾼 유태헌·한관우 기자의 금북정맥 탐사
  • 유태헌·한관우
  • 승인 2013.09.08 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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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지역 역사·문화·풍속 이야기 ⑬

 

▲ 아산시 도고면 시전리 도고산 전경. 정상인 국사봉에 오르면 서해가 한 눈에 들어오며, 발아래 올망졸망 산골마을의 풍경이 정겹게 펼쳐진다.


'설광봉도' 품안에는 외암 민속마을이 있다 

설화·광덕·봉수·도고산 이어져
설화산 서쪽 아산 외암민속마을
조상의 얼 간직한 고즈넉함 눈길
수림에 둘러쌓인 풍광 단연 으뜸 


'설광봉도(雪廣鳳道)'란 아산시와 천안시, 공주시, 예산군지역을 경계로 하는 설화산(雪華山·448m)과 광덕산(廣德山·699m), 봉수산(鳳首山·535m)과 도고산(道高山·482m)의 4개산을 잇는 40km정도의 종주코스로 산의 위치가 V자를 이루고 있어 산악인들 사이에서는 흔히 '설광봉도V루트'라고 부르기도 한다. 설화산은 온양온천 고을의 안산(案山)이다. 금북정맥에 속하는 산으로 광덕산에서 갈라진 지맥이며, 다섯 봉우리가 솟아서 오봉산이라고도 불린다. 정상에 오르면 지금은 아산시가 된 온양온천 일대와 북동쪽으로는 충남의 관문도시로 성장하면서 꿈틀거리는 천안시가지가 배방산 너머로 들어온다. 남쪽으로는 광덕산까지 뻗어나간 금북정맥 줄기와 망경산이 가로막고 있고, 맑은 날에는 서쪽으로 예산과 서산의 가야산과 광천과 보령의 오서산도 아스라이 눈에 잡힌다. 설화산 자락에는 조선 초기 청백리(淸白吏)로 유명한 고불(古佛) 맹사성 선생이 살았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고려 말) 살림집으로 알려진 맹씨행단(孟氏杏壇)이 남아있다. 하지만 도시화에 밀려 아파트가 자꾸만 설화산을 파고들고 있었다.

광덕산은 아산시 송악면과 천안시 광덕면의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높이에 비해 산세와 조망이 뛰어난 산이다. 온양온천을 지척에 두고 있어 온천산행지로도 널리 알려진 광덕산은 천안, 아산, 공주의 분기점이자 금북정맥상의 각흘고개와 갈재고개 사이의 무명봉에서 북쪽으로 갈래 치면서 천안시와 아산시를 가르며 뻗은 산줄기의 최고봉이다. 흔히 내포지방이라 일컫는 아산, 당진, 서산, 홍성뿐 아니라 평택, 천안, 대전 등 충남북 일원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산이다. 옛날부터 덕이 있다고 하는 광덕산은 '난리가 나거나 불길한 큰 일이 있으면 산이 운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호두나무가 풍성한 광덕사 주변은 갑신정변을 일으켰던 풍운아 김옥균, 임시정부주석 김구 선생 등 역사적인 인물들이 은신했던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 아산시 송악면 외암리 설화산 자락에는 살아 있는 민속박물관으로 불리며 마을 자체가 문화유산인 500년 역사의 양반마을 외암민속마을이 있다.


봉수산은 예산군과 아산시, 공주시 등 3개 지역에 걸쳐있는 산으로 봉황새 머리를 닮았다하여 봉수산이라 이름 붙여졌다 한다. 산의 규모도 작고 나지막한 산이다. 봉수산 기슭에는 887년(진성여왕1)에 도선 국사가 창건했다는 봉곡사(鳳谷寺)가 자리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47년(인조 24)에 중창했다고 전한다. 도고산은 아산시 도고면에 자리해 있으며 산가에 도고저수지를 끼고 있어 주말이면 등산객보다 태공들이 즐겨 찾는 곳이라고 한다. 산 정상에는 조선시대에 통신수단으로 사용하던 봉화대유적이 원형에 가깝게 잘 보존돼 있다. 이곳에서는 삽교천과 아산만이 보이고 멀리 광덕산이 내려다보인다. 하산하는 길에는 중요민속자료 제194호인 성준경 고택과 수령 360여년생의 은행나무가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특히 '설광봉도'루트로 불리는 설화산의 서쪽, 아산시 송악면 외암리에는 충청도 양반마을을 대표하는 마을이 있으니, 살아있는 민속박물관으로 불리는 외암민속마을이 바로 그곳이다. 중요민속문화재 제236호인 외암민속마을은 조선 선조 때부터 예안이씨가 정착하면서 예안이씨 집성촌이 됐고, 이후에 후손들이 번창하여 많은 인재를 배출하면서 양반촌의 면모를 갖추게 됐다고 이곳의 문화관광해설사는 전한다.

외암마을이 예안이씨 집성촌이 된 유래는 이사종(李嗣宗)이 평택진씨 참봉 진한평(陳漢平)의 사위가 되어 이곳에 들어온 것이 인연이 돼 이사종은 봉수산에 선친의 묘를 정하고, 마을 밖에 정자를 세워 '열승정(閱勝停)'이라 했다고 한다. 정자는 오래전에 없어졌지만 '열승쟁이'라는 지명은 지금도 전해지고 있으며, 그 기문(記文) 또한 건재고택에 온전히 남아 있다는 것이 이 마을 이규정 대표의 설명이다.

 

 

 

 

 

 

▲ 외암민속마을의 초가와 돌담(사진 위) 설화·광덕·봉수·도고산 등산로 이정표(사진 아래)


예안이씨는 전의이씨에서 갈라져 나온 분파로 10세손인 익(翊)이 예안이씨의 시조가 된다고 한다. 7세손인 이연에게는 아들이 셋 있었는데, 둘째 아들 이사종 계열만 번창하고 있는데 이사종 부터 예안이씨 온양파가 시작됐다고 한다. 외암 이간 선생은 조선후기의 문신·학자로 본관은 예안, 자는 공거(公擧), 호는 외암 또는 추월헌(秋月軒)이라고도 했다. 숙종 36년(1710)순무사 이만성(李晩成)에 의해 장릉참봉(葬綾參奉)으로 천거됐으나 취임하지 않았고, 6년 뒤인 숙종 42년(1716)에 다시 천거돼 세자시강원자의가 됐다고 한다.

이곳 외암마을에서는 조선후기에 많은 과거 급제자들이 배출됐다고 설명한다. 예안이씨 집안의 족보를 보면 문과 급제자로 이성렬과 이정렬이 있는데, 이성렬은 고종2년(1865)에 태어나 고종25년(1888) 문과에 급제해 응교, 직각승지, 대사성, 참찬까지 지냈으며, 독립운동에 관여했다고 한다. 이정렬은 고종 5년(1868)에 태어나 24세 때인 고종 28년(1891) 과거에 급제했으며 참판에까지 이르렀고, 고종황제로부터 퇴호거사라는 호를 받았다고 한다. 이정렬의 할머니가 명성황후의 이모였는데, 명성황후는 이정렬을 매우 아껴 필묵과 첨지를 내려줬다고 전해진다. 그는 17세에 명성황후에게 당시 일본의 한반도에 대한 음모가 꾸며지고 있음을 지적하기도 했다고 한다. 34세 때는 일본이 강제로 통상조약과 사법권이양을 요구하니 이에 통분을 이기지 못하고 고종황제에게 상소를 올려 당시의 책임자인 외부대신을 탄핵시킬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공의 뜻이 조정에 받아들여지지 않자 자신은 '나라를 팔아먹는 조정의 신하가 될 수 없다'며 관직을 포기하고 외암마을로 낙향했다고 한다. '참판댁'이라 부르는 퇴호거사 이정렬이 살던 집에는 지금도 유품이 많이 남아있다고 한다.

한편 조선시대 생원·진사 합격자 명단인 '사마방목'을 통해 확인된 외암출신 생원·진사는 11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밖에도 이사병과 이건주가 학행으로 천거됐고, 이건주는 1796년(정조20)에 충청도관찰사 이정운이 국왕의 분부에 응해 천거한 세 사람에 포함됐다는 설명이다. 이 마을에서의 느낌은 단연 옛 사람들은 아무 곳에나 삶의 터를 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바람과 물, 주변 환경과 지리, 나아가 인심까지 두루 살폈던 것이다. 흔히 말하는 풍수는 바로 이런 것들을 살펴보고 살아갈 집터를 결정하는 것이다. 외암민속마을에서는 우리 선조들이 어떻게 삶터를 정해 수백 년을 살아왔는지를 읽을 수 있는 곳이다. 이곳에는 지금까지도 사람들이 살고 있어 생동감이 넘친다. 이처럼 옛 건축물은 주변 환경이나 경관 속에 사람들이 어우러져 살고 있을 때 생동감 넘치는 문화적 가치로 남아 수백 년을 이어오는 것이다.

또 하나의 특징은 이 마을에는 충청도지방의 고유 격식을 갖춘 반가의 고택과 초가, 돌담, 정원 등이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되고 있으며, 다량의 민구와 민속품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는 것이다. 가옥 주인의 관직명이나 출신지명을 따서 참판댁, 감찰댁, 풍덕댁, 교수댁, 참봉댁, 종손댁, 송화댁, 건재고택(영암댁), 신창댁 등의 택호가 정해져 있다. 또한 마을의 뒷산인 설화산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시냇물을 끌어들여 연못의 정원수로 이용하는 등 정원도 특색 있게 꾸몄다. 이 마을에서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단연 자연석 돌담장이다. 전체길이가 6000m에 이르는 돌담으로 연결된 골목길하며, 울창한 수림이 마을의 경관을 더욱 고풍스럽게 간직하고 있는 풍경은 단연코 으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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